남쪽 지역에서 '귄있다'라는 말은 가히 최고의 칭찬이다. 호감형 인간에게 보낼 수 있는 제일의 찬사 '귄있다'는 '귀엽다', '매력 있다', '센스 있다' 등을 의미하지만, 현존하는 그 어떤 말도 이 단어가 가진 뉘앙스를 완벽히 설명하진 못한다. 한데, 스티븐 연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귄있음'의 화신을 본 듯했다.
고백하자면, 스티븐 연을 처음 알게 된 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코난쇼’를 통해서였다. 코난과 스티븐 연의 코리아타운 찜질방 체험기, 국경 없는 코난: 한국 편, 스티븐 연의 어색한 키스 테크닉 등 한국 문화와 자신의 작품을 위트 있게 소개하는 그의 모습에 '아, 이 배우의 '귄'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야 하는데…'라고 조급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고 다녔었다. 이렇게나 금세 세계적인 배우가 될 줄은 그땐 모르고….
<워킹 데드>로 180도 인생 전환!
스티븐 연의 할리우드 데뷔는 의외로 순탄했다. 대학 졸업 후 시카고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스케치 코미디 그룹 멤버로 2년간 활동한 그는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되는데, 이주 6개월 만에 오디션을 통해 <워킹 데드>의 '글렌 리' 역을 거머쥔 것. <워킹 데드>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그의 연기 인생도 180도 달라졌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글렌 리' 캐릭터는 시즌 2 중반 이후부터 농장집 딸 매기(로렌 코핸)와의 로맨스가 시작되며 본격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아포칼립스물에서 꼭 한 명쯤 등장하는 용감하고 영리한 행동대장으로 활약하며 당시 몇 개의 전형에 갇혀 있던 동양인 캐릭터의 틀을 깼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명대사 "Maggie, I'll find you"를 남기고 죽음을 맞이해 많은 팬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워킹 데드> 시즌7 이후 그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에 출연하며 한국 관객들에게도 그 이름을 점차 알리게 된다.
블랙코미디에서 더 빛나는. <메이헴> <옥자> <쏘리 투 보더 유>
2017년, 스티븐 연은 드디어 첫 단독 주연을 맡게 된다. 좀비 드라마 <워킹 데드>의 변형격인 영화 <메이헴>을 통해서다. 여기서 그는 원초적 본능이 뇌를 장악하는 변종 바이러스가 퍼진 세계에서 자신을 해고한 상사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원맨쇼를 펼치는 '데릭'을 연기한다. 성공을 위해 가족, 개인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일의 노예가 되어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하지만 언제든지 필요 없어지면 소모품으로 전락해 버려지는 사회를 풍자한 이 잔인한 블랙코미디에 키득거릴 수 있음은 99% 스티븐 연의 연기 덕이다.
<옥자> 속 떨떠름한 거짓 통역으로 블랙 코미디의 맛을 살려내는 '케이' 역과 <쏘리 투 보더 유>의 '스퀴즈' 역도 그의 필모에서 빼놓을 수 없다. 독특하고 기발한 블랙 코미디의 옷을 입었을 때 스티브 연은 빛난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그는 “관객이 기꺼이 용서할 만한 매력과 귀여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지도. 특히 블랙 코미디를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쏘리 투 보더 유>는 절대 놓쳐선 안된다. 제34회 선댄스영화제부터 제24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리에서 주목받은 이 작품은 코믹한 대사와 기발한 설정으로 인종차별과 자본 만능주의의 폐해를 폭로한다.
커리어의 정점? <미나리>, <놉>
“미국에서는 동양인을 미국인이라 생각 안 한다”라는 배우 스티븐 연의 인터뷰 한 줄에서 그가 감내했을 수많은 인종차별적 순간이 스친다. 그는 그가 관통한 차별과 정체성의 혼란을 연기로 승화하는데, 영화 <미나리>로 그 정점을 찍는다. 영화 <미나리>에서 낯선 땅에서 가족을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 '제이콥'으로 열연한 스티븐 연은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된다. 한국계 미국인 최초이자 동아시아계 배우 최초의 노미네이트였다.
이후 영화 <놉>에서 대중의 관심을 갈구하며 파국을 맞는 '리키 주프 박'을 연기한 스티븐 연은 “내 존재가 인종으로 규정될 때 독특한 고립감을 느낀다”면서 “누군가를 어떤 틀 안에 넣어 정의하는 느낌, 그 비인간화의 깊은 외로움 속에 리키가 살아왔다고 봤다”라고 캐릭터에 그만의 깊은 해석을 더하며 연기 호평을 이어갔다.
K-장남은 참지않긔! <성난 사람들>
그의 가장 최근작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원제 BEEF). 스티븐 연은 분노에 사로잡히고 책임감에 짓눌린 K-장남 '대니'를 맡아 이민자의 삶을 설득력 있게 펼쳐 놓는다. 일견 과하게만 보이는 대니의 분노가 종국에 납득이 되는 것은 이해받을 길 없는 한 인간의 절박함을 표현한 그의 미친 연기력 때문. 한국적 정서가 짙게 깔린 이 작품에 세계가 호응하며 로튼토마토 언론·평단 신선도 지수 98%를 기록하는 등 호평 세례가 이어졌다.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 최고작”(영국 GQ) 등의 찬사부터 “이 드라마를 위한 에미상을 미리 닦아 놔라”(ABC뉴스) 등 내년도 주요 시상식 수상까지 벌써 점쳐진다.
차기작은? 봉준호의 <미키 17>
그의 다음은 '봉준호'와 함께다. <옥자>에 이어 두 번째로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미키17>에 출연하게 된 것. <미키17>은 에드워드 애슈턴 작가의 소설 「미키7」을 원작으로 하는 SF 장르의 영화로 일찍이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테넷>, <더 배트맨> 등에 출연하며 할리우드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한 로버트 패틴슨이 출연을 확정해 화제를 모았다. 또한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헐크로 활약한 마크 러팔로와 <유전>, <나이브스 아웃>의 토니 콜렛 역시 출연 소식을 전했는데, 스티븐 연까지 합세하며 작품에 대한 기대는 더 커지고 있다. 2024년 개봉 예정.
“내 이름 내건 프로덕션 만들고파”
스티븐 연의 꿈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덕션을 만드는 것이다. 작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제 프로덕션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며 그중 하나가 ‘백남준 다큐멘터리 작업’이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도 전했다.
제가 다리를 만들거나 닫힌 문을 부숴버리는 걸 도울 순 있지만, 그 다음에는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계속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죠. 누구라도 제가 부순 문을 통해 오려고 한다면 그들이 있을 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을 도와야겠죠.
GQ와의 인터뷰 中, 2022.06.21
배타적인 할리우드에서 다리를 만들고 닫힌 문을 부수며 스티븐 연은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곳은 또 다른 시작점일 뿐이다. 스티븐의 뒤엔 그가 이어 만든 다리를 건너고 그가 부순 문을 통과해 온 이들이 있기에.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기꺼이 돕고자 마음 낸 ‘프로듀서’로의 그의 앞날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니.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