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여유가 없다. 새로운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새롭게 펼쳐질 이야기에 설렘을 느끼며 꼭 봐야지,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 고개를 젓는다. 심지어는 스몰토크 따위에서 흔히 회자되곤 하던 마블 영화였는데,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이제는 개봉했는지조차 모르는 영화들이 꽤 있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그랬고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도 그랬다. 왜 이렇게 화제성도 잃고 인기도 잃었을까.
단적으로 이유를 꼽는 건 쉬운 일이었다. PC함에 대한 집착적인 묘사, 이전 인기 캐릭터들의 부재, 이미 끝나버린 초반의 이야기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계속 고민했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를 보면 이유는 제법 명확해 보인다. 딱히 히어로 무비 팬도 아니고 코믹스에 관심도 없지만 화려하고 재미있는 영화만은 좋아하는 지인의 말을 빌려 본다.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거야, 일상적이고 평범한 듯하지만 뭔가가 분명 있고, 그래서 더 재미있는 거.”
생각해 보면 꽤 이상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는 평범한 배경도 없고 평범한 인물도 없다. 현실에서는 아직 불가능한 은하계 여행을 테마로 하고 있고, 심지어 말하는 라쿤과 말하는 나무도 등장한다(염력 쓰는 개까지 덤이고). 지구인 휴먼이라고는 스타로드밖에 없는(그조차도 평범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 일상적이고 평범한 매력을 줄 수 있었다는 건, 그리고 실제로 인기를 얻었다는 건 참 양면적인 얘기다.
디즈니 플러스의 출범
케빈 파이기는 디즈니 플러스의 출범 당시 이제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를 보지 않으면 MCU 영화를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사업적으로는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지 모르겠으나, 대중을 아우르는 '메이저 장르'로서의 MCU에게 패착이었을 수 있다.
안 그래도 코믹스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100% 즐길 수 있는 장르가 히어로 무비인데, 이전 영화에서 봐서 알고 있는 캐릭터라 하더라도 디즈니 플러스를 보지 않으면 중간에 서사가 끊겨 버린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등장한 '스칼렛 위치' 완다 막시모프가 좋은 예다.
물론 드라마를 챙겨봤다 해도 서사적으로 문제는 있었다. <완다비전> 마지막화에서, 모든 걸 희생해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가족과 집을 끝내 자기 손으로 소멸시켰던 완다 막시모프가 왜 다시 자기 아이도 아닌 멀티버스의 아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완다비전>을 보지 않은 사람은 왜 완다가 그렇게 강해졌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닥터 스트레인지와 적대 관계가 되었는지 당위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디즈니 플러스를 본 사람도, 안본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할 이야기를 잃은 캐릭터들
어벤져스의 주축이었던 캐릭터들은 이제 없다. 캡틴 아메리카는 오랫동안 자기 것이 아니었던 개인의 행복을 선택하기 위해 은퇴했고, 아이언맨은 숭고한 희생을 통해 온 세상을 구했다. 양대산맥이었던 두 캐릭터들이 없는 상황에서 든든한 토대였던 블랙 위도우 역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택하고 그들 모두를 지켜냈다. 그리고 이제 페이즈는 남은 히어로들의 몫이다.
부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캐릭터들이 메인으로 등장하는 건 분명 매력적인 일이지만, 원대하고 거대한 이야기를 더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좀 더 준비가 필요했다. <팔콘과 윈터 솔져>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로키> 시리즈가 인기리에 시즌 2를 확정하기는 했지만 예전만큼 화제가 될 수는 없었고 늘 그랬듯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래서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MCU에 출연하는 캐릭터 토르에게 기대감이 쌓였는지 모른다. 원년 멤버 중 솔로 무비 시리즈를 갖고 있고, 인기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캐릭터였기에. 하지만 그 토르, MCU 최초로 시리즈 네 번째 영화를 들고 돌아왔지만 이전의 성공만큼 달콤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로키도 없고, 아스가르드의 군주도 아닌 토르가 홀로서기를 하는 이 시점, 그에게 주어진 서사는 참신하지 못했다. 로키와의 기나긴 오해와 갈등이 해소되었다 싶으니 로키는 유명을 달리했고, 아스가르드라는 신비한 도시는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신 아스가르드의 면모는 관객을 압도하기에는 어딘지 익숙한 부분이 많고, 이야기의 중심도 아녔기에 크게 묘사되지는 않았다.
새로운 이야기라고 한다면 마이티 토르로 컴백한 제인 포스터이겠으나, 묠니르와 관련된 설정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끼워맞춰지는 것을 보면서 원작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고 잘 모르는 관객들은 그래서 어떻다는 건지 의문을 품었을지 모른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토르: 라그나로크>가 <토르> 시리즈에 대한 평가를 바꿔놓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다. 제인 포스터의 컴백만으로는 부족했고 그 이상으로 할 이야기가 없으니, 결국 서사는 뭔가 어색한 느낌으로 지지부진해졌다.
PC함과 재미의 문제
히어로 무비는 오락영화다. 큰 예산이 투입되고, 스케일이 엄청난 액션씬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대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비싸진 영화 관람료에 시장 상황도 안 좋은 판에, 재미없는 영화에 기꺼이 지갑을 열 만한 관객이 대체 얼마나 될까.
솔직히 말해 2시간 혹은 3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영화 관람'은 꽤나 열정을 필요로 하는 취미 아닌가. 관객은 늘 여유롭진 않다. 재미없고 이해 안 될 것 같은 영화에 기꺼이 시간과 돈을 쓸 만큼 한가한 사람만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심지어는 한가해도 그런 수고를 감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지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영화라면 일단 영화 그 자체로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MCU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이유는 현실적인 공감대 형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금의 시대에 어떤 콘텐츠건 간에 일정 수준의 윤리적 기준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지금의 디즈니와 마블은 왠지 그 윤리적 잣대를 지키기 위해 콘텐츠로서의 재미를 포기한 것 같아 보인다.
소위 돈 냄새 나는 화려한 CG,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액션씬. 거대 자본을 기반으로 한 블록버스터 무비가 갖고 있는 장점은 굳이 히어로 무비가 아니더라도 다른 영화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관객들은 화려한 액션씬으로 점철된 영화를 보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 게 아닐 테니까. 그들이 원하는 건 캐릭터에 대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측면,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재미다. 하지만 MCU의 최근 영화들은 이해하기엔 너무 알아야 할 게 많았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끝내주게 재미있지도 않았다.
인피니티 사가를 마무리하는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된 후, 한창 MCU의 10년 히스토리를 되짚어보던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히어로 무비도 이제 끝물이겠다는. 물론 그렇게 말하기에는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은 오랫동안 인기를 끌어왔다. 괴로운 현실 속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그게 가상이라 할지언정 히어로는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히어로 장르에서 캐릭터 하나로 시리즈를 이어가는 형태는 꽤 있었지만, 영화 속 세계관 자체가 매력적이라는 느낌을 원작의 팬뿐만 아니라 관객 대다수에게까지 줄 수 있었던 영화들은 많지 않았다. MCU는 다수의 영화와 시리즈에서 그런 감상을 주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인기를 얻었다. 영화 속 히어로들이 그저 영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화려한 히어로의 이름 뒤 가장 인간적인 모습들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2008년 <아이언맨> 1편의 개봉 이후 MCU가 누렸던 흥행 성공 가도는 최근 맥동하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 흥행은 성공했다 쳐도, 그저 수치화된 성공일 뿐 과거의 찬사와는 거리가 멀다.
안타까운 일이다. 혹자는 이제 마블이 디즈니 플러스와 스크린에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건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사랑했던 MCU의 그것이 아니라는 말도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인피니티 사가의 주역들이 세계관 내에 자신의 소임을 다한 후, 멀티버스로 MCU 세계관이 대폭 확장될 거라 기대했지만 성공적인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도구적으로 소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정복자 캉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시크릿 워를 재해석할 방식도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민심을 잃어 가고 있는 이 프랜차이즈가 다시 화제가 될 방법은 일견 명확해 보인다. 재밌게 만드는 것. 간단하게 만드는 것. 그걸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