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민 케인>을 안 볼 수 있죠?"
"그러는 당신은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가 나눈 대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적이 없고, 마고 로비도 <시민 케인>을 안 봤다며 놀림을 당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수식을 단 채 오래도록 칭송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 영화 봤어?"라는 질문에 이들처럼 우물쭈물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도 안 봤다기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봤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는가? 그런 고전 혹은 명작들을 소개하는 '솔아안 시네마'로 안내한다.
* 영화 <소림축구>, <족구왕>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족구왕>(2014)이 나온 건 10년 전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에 회초리를 맞고 '88만 원 세대' 광풍에 휩쓸려 초토화된 당시의 캠퍼스에서 낭만이 완전 소멸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시절이었다. 그 즈음엔 유독 '잉여 인간'과 '사회인'의 경계에 선 청춘들을 다룬 작은 영화들이 많이 나왔는데, <족구왕> 역시 그중 하나였다.
군 전역 후 곧장 복학한 홍만섭(안재홍)은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길 생각으로 가득하다. 남들은 한 번쯤 다 해 본다는 캠퍼스 커플도 하고 싶고, 공 하나만 있으면 소속도 나이도 상관없던 족구장에서 다시 땀도 흘리고 싶다. 특히 족구는 만섭에게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족구로 돈을 번다거나 인기를 얻고 싶은 것이 아니다. 족구는 그에게 수단이 아닌 목적이고, 단지 좋아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학교에 족구장은 사라졌고, 기숙사는 발소리조차 함부로 내면 안 되는 독서실처럼 변해 버렸다. 만섭은 족구장을 되찾기 위해 전교생 앞에서 총장에게 건의하고 서명 운동도 벌인다. 그러나 만섭을 제외한 모두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는 중이다. 그들의 시야엔 공무원 시험 합격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하다. 타인이 말릴 수도, 욕할 수도 없는 질주 속에서 만섭의 족구 타령은 공염불처럼 들릴 뿐이다. 거기서 만섭은 말한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숨기고 사는 건 바보 같다”라고. 학자금 대출 이자를 못 갚아 등록금 미납으로 학기 등록이 취소돼도 씩 웃으며 공을 차는 만섭을 보며 캠퍼스의 경주마들도 잠깐 멈춰 '좋아하는 것', '재미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옆과 뒤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불확실한 미래, 청춘, 열정, 꿈, 스포츠 따위의 단어가 한곳에 모였을 때 나올 이야기는 뻔하다. 심지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의 비현실성은 더 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야 마는 조합이다. 영화 <소림축구>는 이 분야의 고전이다. 청춘은 잊어야 한다고 강요당한 사람들이 끝내 청춘의 한순간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현실이건 비현실이건 가끔은 보고 싶어지는 광경이다.
왕년에는 '황금 오른발(黃金右脚)'로 불렸던 전설의 축구 선수 명봉(오맹달)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절 사고로 다리 한 쪽을 쓰지 못하게 됐다. 거금의 유혹을 받고 승부 조작을 하려다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불의의' 사고는 아니다. 선수 때 무시했지만 현재는 최고의 축구단 구단주인 강웅(사현)의 밑에서 그가 20년 동안 심부름을 하는 건 축구 감독이라도 시켜주겠거니 하는 마음 탓이었다. 하지만 명봉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강웅에게 내쳐지고 만다.
인생을 포기한 듯 막 살던 명봉은 우연히 한 남자가 다리 힘만으로 깡통 자루 위에서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본다. 소림사에서 수행했지만 사부가 죽은 후 쿵푸의 효과적 홍보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남자의 이름은 씽씽(주성치). 남루한 행색에도 눈빛은 형형했지만, 당장 명봉에게는 그가 청소부든 쿵푸의 대가든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씽씽이 걷어찬 깡통이 한참 떨어진 곳의 벽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한 명봉은 그를 주축으로 한 축구팀을 결성해 큰돈을 벌겠다고 결심한다.
한편 씽씽은 피부병 때문에 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만두 가게의 아매(조미)가 태극권을 이용해 만두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감동한다. 씽씽이 이를 노래로 표현하자 만두를 먹던 손님과 행인들도 저마다 가슴속의 불꽃이 피어난 듯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족구에 미쳐 있던 <족구왕>의 만섭이 캠퍼스에 족구 열풍을 일으킨 것처럼, 쿵푸에 미친 씽씽이 사람들의 마음에 열정 한 방울씩을 떨어뜨린 셈이다.
그런 씽씽은 쿵푸의 부흥을 위해 사형과 사제를 찾아다니며 뜻을 모아 달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벅찬 모습이다. 씽씽은 “꿈이 없으면 우리가 멸치와 다를 바가 뭐냐”라고 묻지만, 큰사형 아비(황일비)는 씽씽의 맨발을 가리키며 “신발도 없이 돌아다니는 지금도 멸치와 마찬가지”라고 일갈한다. 한때는 무림의 고수였던 다른 소림사 동료들도 과거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와중에 명봉은 다시 만난 씽씽에게 축구팀을 결성해 대회에 나가자고 제안하고, 축구를 통해 쿵푸를 홍보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씽씽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며 당장 동료들을 모은다. 집합한 것은 축구 룰조차 알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지만, 각자 소림사에서 연마했던 무공을 축구에 접목시키며 눈부시게 '소림축구단'으로 성장한다. 우승 상금만을 노렸던 명봉도 축구팀을 팔라는 강웅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만큼, 소림축구단은 이미 축구에 진심이었다.
이어질 <소림축구>의 결말을 맞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다. 소림축구단은 수많은 축구 강호들과 비겁한 술수에도 결국 축구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진짜 축구 룰은 어디로 갔는지 복근에 공을 끼운 채 골을 넣고, 브레이크 댄스로 드리블을 하는 광경만큼이나 이들의 우승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승리가, 낭만적 성취가 절실한 순간은 무던하게 일상을 버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극중 씽씽은 펀드 매니저가 된 '철갑 복부 틴', 전계(전계문)에게 축구팀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하지만 사형은 그의 눈도 쳐다보지 않은 채 “현실을 받아들이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나 뒷면이 나오지만 우리가 축구팀을 만들어 우승할 확률은 동전이 똑바로 설 확률과 같다고 덧붙인다. 씽씽은 바로 동전을 던져 보겠다고 하지만, 전계는 화를 내며 그를 쫓아 버린다. 씽씽이 돌아간 자리, 그가 던진 동전은 보도블록의 틈에 끼어 똑바로 서 있었다.
그래서 더 나빠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뻔하디 뻔한 낭만을 충전하려는 이들에게 <소림축구>를 권한다. 단, 정신없이 웃다가도 시대에 맞지 않는 폭력성에 움찔하게 만드는 슬랩스틱을 견딜 수 있다면.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