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 그리고 발을 좋아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할리우드에서 제일가는 영화광을 꼽으라면 아마도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올 것이다. 영화 관련 학과를 입학했던 것도 아니었던 그가 할리우드에 입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의 영화 덕력 때문이었다. 타란티노는 22살이 되던 해에 캘리포니아 맨해튼 근처 비디오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며 1년에 평균 200편의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그의 영화를 향한 애정은 워낙 유명해서, 손님들에게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작품들을 추천해 주거나, 토론하는 등 ‘영화광 타란티노’의 명성은 할리우드에도 소문이 자자했다고. 이후 타란티노는 여러 작품의 각본을 쓰면서 영화인으로의 경력을 시작했고, (<그라인드 하우스>의 <데쓰 프루프> 포함해) 10편의 영화를 감독한 지금 은퇴작으로 공언한 열한 번째 영화 <더 무비 크리틱>을 준비 중이다.

타란티노의 살생부는 가차없다.

이런 할리우드에서 소문난 영화광 타란티노의 애정하는 영화 리스트는 수많은 기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다른 거장들의 영화 리스트 또한 쉽게 접해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유명한 감독들이 싫어하는 영화에 대한 리스트는 없는 것일까? 미국의 영화 전문 매체 '인디와이어'(Indiewire)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영화광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싫어했던 영화 리스트를 직접 모아보기로 한 것이다. 인디와이어는 1992년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이후로 방송, 신문, 잡지 등에서 함께한 인터뷰 내용부터 타란티노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채널 ‘Video Archives Podcast’까지 전부 살펴본 결과 총 28편의 영화와, 1편의 TV 시리즈에 대해, 별로라고 평가한 타란티노의 발언들을 찾아냈다. 샘 멘데스의 <1917>(2019)과 같은 최신 작품부터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처럼 범접하기 힘든 고전 명작까지 타란티노의 신랄한 혀가 어떤 작품들을 비판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자.


<시계태엽 오렌지> dir. 스탠리 큐브릭

첫 타자부터 어마어마하다. 미국의 전설적인 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명작으로 꼽히는 <시계태엽 오렌지>(1971)에 반기를 들었다. 타란티노는 2003년 인터뷰에서 <시계태엽 오렌지>의 초반 20분에 대해 ‘거의 완벽에 가깝다’는 칭찬을 남겼다. 바로 영화의 주인공 ‘알렉스’(말콤 맥도웰)가 온갖 악행과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말이다. 하지만 이 발언 뒤에는 반전이 숨어 있었으니, ‘나머지 부분은 전부 위선적’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특히 그는 큐브릭이 <시계태엽 오렌지>를 만들면서 폭력에 대해 견지한 태도에 불만을 품었다. 큐브릭이 마치 폭력을 반대하는 영화를 찍었음에도, 폭력에 지극히 도착적인 모습을 보이는 점을 지적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dir. 알프레드 히치콕

타란티노가 '웨이백 머신'(Wayback Machine)과 인터뷰를 했을 당시, 지면에 실리지 않은 무삭제 버전을 담당 에디터가 블로그에 게재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타란티노가 싫어하는 영화를 한 편 더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냈던 타란티노였기 때문에 인터뷰 중간, 인터뷰어와 타란티노는 히치콕에 관한 토론을 진행했었다. 그는 히치콕이 서스펜스에 몰두했을 시절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큰 흥미가 없다고 밝혔다. 특히 캐리 그랜트 주연으로 많은 영화 팬으로부터 오랜 사랑을 받아온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매우 평범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보통 사람들이 한 22살쯤에 이 영화를 발견하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극히 평작에 불과하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트루 디텍티브>

TV 시리즈도 예외는 없다. 타란티노의 무자비한 입에 걸리는 순간 가차 없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뛰어난 연출, 빠른 전개, 탄탄한 서사, 스타급 캐스팅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HBO의 시리즈 <트루 디텍티브> 또한 타란티노의 맘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뉴욕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시즌 1의 첫 화를 다 보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지루한 탓에 제대로 다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시즌 2에 나오는 배우들의 모습은 전부 “잘생긴 주제에 못생겨 보이려고 노력하고,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 어깨에 짊어진 것처럼 시종일관 진지한 척하고 불쌍한 척하는 것 같다”라는 악평을 퍼부었다(시즌 2는 레이첼 맥아담스, 콜린 파렐, 테일러 키취 주연). 타란티노가 TV 시리즈를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트루 디텍티브>에 등장하는 콧수염의 사내들은 타란티노의 맘을 사로잡지 못했다.


<1917> dir. 샘 멘데스

지난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마지막까지 치열한 아카데미 레이스를 펼쳤던 <1917> 역시 타란티노의 독설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2019년은 타란티노 역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통해 아카데미 레이스에 참여했던 만큼, 그가 <1917>에 대해 남긴 논평은 수많은 미디어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는 팟캐스트에 출연한 다른 출연자가 <1917>를 향해 찬사를 보내자, <1917>의 상징적인 기법인 원테이크 연출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비판의 요지는 <1917> 속 ‘원테이크처럼 보이는 트릭 쇼트’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원테이크를 사용하려 했다면, 진짜 원테이크를 찍었어야 한다는 것이 타란티노의 주장. 물론 그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했지만, 비디오게임처럼 보이는 연출 역시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마틴 스콜세지가 그의 영화 <아이리시맨>(2019)을 개봉할 당시, MCU를 겨냥하여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영화(Cinema)가 아니라 테마파크 필름(Film)에 가깝다”는 발언을 남겼을 때 영화계가 떠들썩했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는 의외로 조용하게 넘어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작년 11월 그는 팟캐스트를 통해서 “MCU가 무비 스타라는 시스템을 파괴했다”는 말을 남겼다. 마치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버글스의 히트곡처럼 들리는 그의 말은 사실 대중들이 마블 히어로는 기억해도, 그 배우의 다른 작품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MCU 팬들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그는 마블 영화들을 향해 “그저 안 좋아할 뿐이다. 혐오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흥미가 없을 뿐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유년기 마블 코믹스를 달고 다닌 소년이었다며, MCU와 원작 마블 코믹스를 구분하려 하기도 했다.


<400번의 구타> dir. 프랑수와 트뤼포

전 세계 시네필들에게 프랑스의 영화감독 세 명을 말하라고 한다면, 고다르 다음으로 나올 감독이 바로 프랑수와 트뤼포다. <400번의 구타>(1959)는 게다가 트뤼포의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거장의 명작이라니. 그래도 상관없다. 타란티노의 혀는 거침없이 트뤼포의 최고작을 찢어놨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트뤼포를 최악의 감독 중 하나인 ‘에드 우드’에 빗대기까지 했다. 누벨바그 감독 중 클로드 샤브롤을 훨씬 더 사랑했던 그는 트뤼포를 두고 “<아델 H 이야기>(1975) 같은 작품은 나름 괜찮았지만, 히치콕을 베끼려 드는 트뤼포의 영화들은 별로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트뤼포는 에드 우드 같은 감독이다. 열정으로 넘치지만, 아마추어임이 틀림없다”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특히 그의 작품<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클리프 부스는 트뤼포의 이름만 두 번 읊조리면서 갸우뚱거린다. 타란티노는 이 장면을 두고 트뤼포의 첫 두 작품을 본 클리프는 트뤼포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400번의 구타>는 지루했었을 것이라고 밝힌다. 대놓고 영화에서 거장을 비난하다니, 역시 타란티노답지 않은가?


이외에도 타란티노는 <테넷>(2020), <몬티 파이튼 - 삶의 의미>(1983), <프렌지>(1972), <셀마>(2014), <아토믹 블론드>(2017),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8), 빌 머레이 3부작(<괴짜들의 병영 일지>, <스크루지>, <사랑의 블랙홀>) 등 다양한 영화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의 칼을 휘둘렀다. 영화를 사랑하게 되면, 그만큼 애정을 담아 내리는 비판일 것이다. 당신에게도 맘에 들지 않는 작품이 있다면 자신 있게 이야기해 보는 건 어떨까?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