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2000)의 주인공 패트릭(크리스찬 베일)은 뉴욕의 전형적인 여피족이다. 거대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그는 유능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80년대 미국에 넘쳐났던 여피족의 근원을 따라가보자.
80년대 뉴욕 여피족의 삶
여피(Yuppie)는 young urban professional을 줄인 말로써, 도시의 젊은 전문직 계층을 가리키는 당시의 신조어였다. 20, 30대에 이미 억대 연봉을 받는 부유한 직장인들은 주로 금융 혹은 법조계에 종사했다. 그들만의 말투, 소비, 실내 디자인, 문화 등으로 집단화되면서 여피족이 되었다.
이전만 하더라도 제조업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부자는 조직의 관리 계층을 지나 창업을 하거나 경영에 뛰어들어 자산이 늘어난, 주로 노년층이었다. 2차 대전 직후에 일본·프랑스·독일 등의 제조업 강국은 전후 재건으로 폐허가 되어있는 상태라서 미국은 1강으로 어마어마한 성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통념적 부자는 전통적 제조 계열에서 주로 탄생했고 성실이 사회적으로 가장 큰 가치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자본의 유입이 강화되며 젊은 층의 라이프 스타일 자체가 달라졌다. 이런 배경이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적 부는 어떻게 쌓이게 된 것일까? 우선 미국이라는 사회를 떠받치는 현대적 민주주의부터 생각해보자.
자유와 평등
미국의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으로 크게 양분된다. 이 두 가치는 당연한 가치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이것들이 탁구를 치듯 핑퐁거리며 상호 보완 혹은 악영향을 끼치며 전진해왔다.
60년대 같은 경우에는 2차대전 후, 그리고 베트남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으로 대표되는 인종 차별 반대, 히피들의 득세, 여성들의 인권 신장 운동,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 등이 사회를 대표했다. 구성원들이 평등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부자들의 세율은 90%에 육박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회 인프라에 투자되면 빈자들이 중산층이 되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 부자의 회사에 일하러 오고 또 소비도 진작 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의 선순환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이는 고도의 성장이 든든한 배경이 됐다.
상황의 반전
그러나 74년의 오일쇼크와 독일과 일본의 급성장으로 제조업 기반의 산업이 위협받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구성원들은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밀턴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자는 정부의 개입이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했고, 일부는 노동자들에게 기업의 역할을 강하게 탄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회의 분위기가 평등에서 자유로 넘어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많이 가졌던 베이비 붐 세대들은 경제적인 자유를 주장한 대선후보인 레이건을 지지했고, 결국 그가 미 4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는 부자 감세로 이어졌으며, 잉여 자금은 금융업과 그에 관련한 법률을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돈이 곧 돈을 낳는 본격적인 시대로 들어간 것이다.
주로 펀드를 판매하는 금융권의 젊은 층은 능력에 따라 천문학적인 인센티브를 받았으며 이는 자유를 지지하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초년생 앳된 이들을 부자로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여피 문화는 히피들이 주장했던 공동체주의나 이상주의와는 반대로 양극단의 개인주의와 냉소적 면모를 띄기 시작했다. 기업을 적대적으로 합병하거나 악감정으로 기업을 인수하는 행위를 선망했다. 약자를 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능력이 출중한 '나'만이 오직 소중한 가치가 됐다. 요즘에도 유행하는 명품들은 당시의 여피들이 플렉스(Flex,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풍토)를 내세우며 뜬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이 명함을 보면서 분노 게이지가 끝까지 올라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르겠다. 이미 왕성한 나이의 성공으로 자신이 더 올라갈 곳은 더 큰돈을 버는 것 밖에 없다. 이런 극단적 경제적 능률에 대한 신념은 자신의 커리어로 보여주는 것은 이미 끝난 것 같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자신을 대변할 만한 것이란 이름있는 식당을 쉽게 예약하거나, 재력으로 여자를 쉽게 부리거나, 금박으로 둘러싼 명함으로 더 빛나는 자신을 증명하는 정도인 것이다.
인격장애
지나친 자기애가 발현되면 질투의 대상은 참지 못해 제거하고, 약자는 경멸하며 거세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그러한 상태로 더 이상 위가 보이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위치에 오르면 어떤 문제든 생기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 인격 장애(나르시시즘 등)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살인을 하는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별 이유도 드러나지 않지만 일단 살인부터 행하고 보는 패트릭은 마냥 가해자이기만 한 걸까? 단지 그렇게 흘러가는 법을 배웠을 뿐 멈추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그를 가해자로서만 바라보면 이 영화적 시선을 이해한 것이 될까? 엔딩에서 흐르는 그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떠올려 보자.
“더는 넘을 장벽이 없다. 내가 지닌 통제불능과 광기, 잔인함과 사악함. 내가 저지른 모든 파괴와 그에 대한 나의 완전한 무관심을 이제 나는 뛰어넘었다. 나의 고통은 지속적이며 극심하며 누구도 더 좋은 세상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나의 고통이 타인에게도 가해졌으면 한다. 아무도 피할 수 없었으면 한다. 하지만 이걸 인정해도 카타르시스는 없다. 난 계속해서 형벌을 피해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갈수록 모르겠다. 내가 하는 말만 가지고 더는 진짜 내가 누군지 알 길이 없다. 고백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최상위에 있다고 생각한 패트릭과 동료들은 그 안에서도 장막을 치고 보다 위에 있는 상대를 끌어내리려 하거나 어디선가 열등감을 폭발시킨다. 그들 사이에선 사소한 것도 단지 비교의 대상이다. 신사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실상은 서로에 무관심이다. 약혼자가 요구사항을 이야기하든 말든 음악에 심취하고, 불륜녀가 마약을 빨아도 건강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구 반대편의 기아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투자 수익을 위한 정보일 뿐이며 되려 얄미운 태도로 비친다. 그러면서 빌딩 꼭대기에 앉아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여피들이 나르시시즘을 필두로 기업을 사냥하거나 다른 계층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것은 흡사 사이코 킬러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선천적 그리고 후천적 요소들
신경과학자인 제임스 팰런 교수는 사이코패스들의 뇌 스캔을 연구하며 대조군으로 일반인의 뇌스캔도 모아서 두 무리는 어떻게 다른지 연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뇌가 사이코패스의 그것과 매우 흡사함을 발견한다. 그런데 자신은 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그는 저서 「괴물의 심연」에서 결함을 발견했을 때의 대처에 대해 다룬다. 그는 스스로를 실험에 대한 대담함을 품은 사이코패스의 기질이 있어서 성공했지만, 사회에 대해 기여해야 한다는 후천적 힘에 훨씬 많은 관심과 무게를 둠으로써 공감의 힘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면 패트릭 베이트먼은 사회가 빚은 피해자인 것일까? 오늘의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부디 그런 괴물이 더 많아지지 않았기를 기원할 뿐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