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원작 코믹스에서 헐크는 원년 멤버 이상의 위상을 갖고 있는 캐릭터였다.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넘어오면서 (아래 서술할) 소위 어른의 사정 때문에 현재의 애매한 위치까지 흘러오기는 했지만, 코믹스 세계에선 굵직한 이슈 다수의 주역을 맡아 왔으며 어벤저스의 멤버로서도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지녀 그 일루미나티조차 헐크를 막지 못해 우주로 추방시킨 전적이 있질 않았나.

가장 주요한 것은 역시나, 스파이더맨과 마찬가지로 판권 및 영상화 권리 때문이었다. 헐크의 판권은 아직 마블 스튜디오로 온전히 귀속된 상태가 아니며, 판권 보유사 유니버설이 헐크 영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협조해 주지 않았던 덕에 이제까지 솔로무비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MCU의 진짜 시작인 2008년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 때문에 디즈니 산하의 마블 스튜디오가 아닌 유니버설의 제작으로 만들어졌고, MCU의 방점을 찍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배우 교체 및 상기의 이슈들 때문에 후속 시리즈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인크레더블 헐크> 영화 초반, 베티와 브루스의 재회 장면

로스 대령과 어보미네이션만은 살아남아 여전히 MCU 곳곳에 등장했고 최근 헐크도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웹 드라마 <쉬헐크>에서 꽤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해 활약했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능동적인 히로인으로 등장해 헐크에게 도움을 주었던 베티 로스는 여전히 찾아볼 수 없게 된 것도 이런 상황 탓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난해, 원작 코믹스의 굵직한 이슈 중 하나인 「월드 워 헐크」를 영화로 제작할 계획이 있다는 루머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지난 10여년 간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헐크의 솔로무비가 조금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날 MCU에서의 헐크와 원작의 헐크 그리고 앞으로의 헐크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작금의 MCU에 기회가 될 가능성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최초의 MCU, <인크레더블 헐크>의 아쉬운 성적

<인크레더블 헐크>(2008)

2008년의 <인크레더블 헐크>는 성공적인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하차를 선택한 주연 배우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는 좋았지만, 중후반부터 등장하는 빌런 어보미네이션과 관련된 서사가 애매하다는 평을 받으며 손익분기점 달성에는 실패했다. 이에 따라 후속편 제작은 비즈니스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덕분에 MCU의 시작이었던 이 영화는 실패작이라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첨언하자면 <아이언맨>이 개봉은 먼저이나, 쿠키 영상의 닉 퓨리 등장뿐이고 MCU 복선은 이 작품이 더 많아 'MCU의 시작'이라는 표현을 쓴다)

덕분에 헐크를 주인공으로 한 솔로무비의 제작은 물론이고, MCU의 미래 향방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작 <아이언맨> 1편과 다음 영화 <아이언맨 2>의 대성공을 기반으로 이 덕분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시작될 수 있었다.

헐크 입장에서는 조금 안타까운 일일 수 있는데, 헐크라는 캐릭터로서는 꽤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작의 헐크와 흡사한 비주얼로 보여준 '브루스 배너' 박사의 깊은 고뇌, 그리고 히어로로서 거듭나기 위한 자기희생과 영웅적 선택이 있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성공했다면, 이후의 MCU에서도 헐크가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로서 좀 더 많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영화긴 하지만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만은 일품이었다


헐크 수난사, 본격적인 MCU의 시작

영화가 실패했던 게 큰 이유가 되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에드워드 노튼은 더 이상 헐크를 연기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배우 교체가 이루어졌다. 연기파 배우로 알려져 있던 마크 러팔로가 연기하는 헐크는, 노튼이 연기했던 날카롭고 예민한 헐크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배너 박사일 때는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이었고, 헐크일 때는 좀 더 귀엽고 포동한 느낌.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프로페서 헐크

배우 교체 때문이었는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진행된 이야기나 설정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베티 로스와의 관계나 '썬더볼트' 로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오긴 하지만 대사 한 줄 정도였고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MCU라는 프랜차이즈가 크지 않았고, 거대한 세계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원 서사와의 헐거운 연결점 때문에 헐크 캐릭터의 내면 역시 심도 있게 다루어질 틈이 없었다. 이래저래 헐크 입장에서 보면 원작의 명성도 이어가지 못했고 마크 러팔로 입장에서는 새롭게 캐스팅되어 MCU 곳곳에서 활약했지만 자신만의 솔로무비는 제작되지 못한 비극을 겪어야 했다.


어벤져스부터 쉬헐크까지, MCU 속 헐크의 행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MCU에서의 헐크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파워풀함을 보여준다. 브루스 배너로서는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와 함께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 다양한 기여를 했고(물론 생각대로 되지 않은 적도 많았다), <어벤져스> 뉴욕 사태에서도 아스가르드인이자 신인 로키를 패대기치는 등 그야말로 '스매쉬'한 헐크의 모습이었다. 이후 '인피니티 워'를 거치며 브루스 배너 박사는 '헐크와의 공존'에 성공했고, 헐크의 모습으로 브루스 배너의 지능을 이용할 수 있는 문무겸비의 히어로로서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등장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히 길이 남을 명장면

하지만 여전히 솔로무비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사촌인 쉬헐크에게 선점당한다. <쉬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는 초반 쉬헐크가 헐크로서의 힘을 조절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해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지만, 쉬헐크는 헐크가 우려했던 문제들은 크게 겪지 않았다. 뭐 알다시피 오랫동안 어벤져스와 MCU를 지켜 온 헐크에게 그리 다정한 방식은 아니었다. 헐크의 10년치 노력이 쉬헐크에게는 별 거 아닌 혹은 일상적인 일로 치부된다는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하여간 <쉬헐크>를 통해 우리는 헐크의 가장 최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이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헐크는 <토르: 라그나로크> 당시 검투사로 활약했던 외계 행성인 사카아르로부터 무엇인지 모를 교신 요청을 받고 있었고, 이에 응해 우주선을 타고 가면서 '쉬헐크' 제니퍼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후 마지막화인 9화에서 헐크와 비슷하게 생긴 어린 소년을 아들 '스카'라고 소개하는 모습까지 등장했다. 이렇다 할 만한 로맨스 노선이 없었던(베티와는 진작에 헤어졌고, 블랙 위도우와는 뭔가 되려는 시점에 연락이 끊어졌으니...) 헐크에게 아들이라니?


솔로무비로의 키포인트, ‘월드 워 헐크’

현재의 헐크 배우인 마크 러팔로는 몇 년 전 인터뷰에서 '헐크' 솔로무비에 대한 질문에 굉장히 비관적으로 대답한 적이 있었다. 판권 보유사인 유니버설에서 헐크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굉장히 자조적인 답변을 했었는데,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라 팬들은 그대로 기대를 접어야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반년쯤 전, 미국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레딧에 관련 루머가 하나 올라온다.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헐크의 솔로무비가 기획 단계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원작 코믹스에서 헐크 이슈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월드 워 헐크」를 토대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었는데, 원작과는 영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의 MCU에 있어서도, 헐크에게도 좋은 소식일지 모른다.

코믹스 「월드 워 헐크」

「월드 워 헐크」는 헐크의 위험성이 지구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일루미나티가 헐크를 우주로 보내면서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헐크가 불시착한 행성이 바로 <토르: 라그나로크>에 등장했던 사카아르였다. MCU에서는 사카아르에 도착한 헐크가 그곳의 검투사가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나오지만, 원작 이슈에서는 헐크가 사카아르의 지도자가 되어 결혼까지 하고 정착할 맘을 굳힌다. 하지만 헐크가 타고 왔던 우주선이 폭발하면서 헐크가 지배하고 있던 행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고, 헐크의 아내 역시 죽음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한다. (이건 「월드 워 헐크」의 전작 「플래닛 헐크」)

가족을 잃은 헐크는 격노하고 마는데, 우주선에 행성 하나를 괴멸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폭발물을 실었다는 것은 즉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나 다름없기에 일루미나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지구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폭발물은 일루미나티의 것이 아니었고, 사카아르에서 헐크의 부하가 되었던 미에크의 행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분노의 화살은 미에크에게로 가 꽂힌다. 모든 걸 잃고 신의마저 저버린 부하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까지 분노하고 만 헐크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내뿜게 되고 결국 헐크는 브루스 배너로 돌아가 감금당하고 만다.

번외지만 이 이슈에서 헐크의 아들인 스카아르도 등장했는데, 행성이 괴멸당할 때 헐크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기에 헐크의 자식 역시 같이 죽음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일련의 과정을 거쳐 모태가 아닌 고치에서 깨어난 존재가 바로 스카아르다. 아버지가 ‘헐크’ 브루스 배너인 것만은 명확하지만 탄생 과정이 독특한 셈. 헐크와 비견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코믹스 작중에서는 사카아르뿐만 아니라 지구와 어벤져스를 위해서도 활약했던 캐릭터다.

「월드 워 헐크」 코믹스, 익숙한 캐릭터가 여럿 보인다

헐크 개인에게 있어서 「월드 워 헐크」는 비극적인 스토리지만, 헐크가 지난날 보여주지 못했던 강력한 모습과 더불어 헐크라는 캐릭터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성과 그의 오랜 고뇌, 그리고 분노의 표출에 대해 다룰 수 있는 매력적인 이슈다. 헐크는 어벤져스에서 직접 말했듯 “늘 화가 나 있”는 캐릭터지만 인피니티 워 사가는 물론이고 <쉬헐크>에서 역시 많이 둥글둥글해진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나. 때문에 헐크가 MCU 세계관 내에서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원작과는 상황이 다르다. 「월드 워 헐크」의 앞선 이야기 「플래닛 헐크」에서 다룬 사카아르 불시착 소재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다루어진 바 있기에 원작 이슈를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MCU가 월드 워 헐크까지의 그림을 미리 그려두었다고 한다면, 좀 더 MCU스럽게 각색된 독특한 헐크의 이야기가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MCU는, 지난번에도 길게 설명한 바 있으나 명백히 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관 전체의 이야기를 보더라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성적을 보더라도 상당히 위험한 시기다. 지난날의 영광은 정말 과거의 것일 뿐이다. 심지어 늘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던 가족영화 시리즈였던 <앤트맨>의 신작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MCU 작품 중 두 번째로(첫 번째는 <인크레더블 헐크>다)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남은 건 기도 메타 뿐인가

사실은 이러면 안 됐다. 엑스맨 프랜차이즈가 명실공히 MCU로 넘어오면서 더 다양하고 즐거운 문제들이 다루어져야 했다. 드디어 등장한 뮤턴트, 그리고 코믹스에서 인기를 얻었던 비교적 새로운 캐릭터들로의 세대 교체, 우리가 인피니티 사가 초반에 보았던 것처럼 매력적인 새 히어로들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져야 했다. 멀티버스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가능성은 더 커졌지만, 이상하게도 재미는 반감되어 버렸다. 그게 과연, 장르가 오래되어 진입장벽이 높아졌다는 이유 딱 하나뿐이었을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년 멤버들의 복귀를 원한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토르와 블랙 위도우가 있었던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기점으로 MCU을 이끈 쌍두마차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없고, 블랙 위도우가 숭고한 희생이었을지언정 진짜 전투에는 참여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진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얼마나 과도기를 견뎌내야 할까?

아들 스카(원작의 스카아르로 추정된다)

이 상황에서 헐크는 MCU가 가진, 인피니티 사가의 영광을 다시금 재현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일지도 모른다. 근래 개봉한 영화들 중 유일하게 호평을 받은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은 더 이상의 이야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건은 시리즈의 종결을 이미 명확히 했을뿐더러 경쟁사인 DC 스튜디오의 대표가 되었으니 이제 케빈 파이기와는 라이벌 관계가 되어야 하니까. 아이언맨은 복귀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으며 캡틴 아메리카의 이름은 그의 사이드킥이었던 팔콘이 이었다. 호크아이에겐 더 나올 만한 이야기가 없고(애초에 은퇴하고 싶어 했던 캐릭터가 아닌가) 이제 아스가르드의 군주조차 아닌 토르에게는 더 기대할 게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제 헐크뿐이다.

헐크는 MCU에서 보여준 게 가장 없는 원년 멤버다. 전투에서 강력한 액션을 선보였고,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매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은 그가 아닌 다른 멤버들이었다. 그렇기에 헐크에게 이제는, 키 카드로 사용될 기회가 주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고, 영화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내부 고발에 배우 리스크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블의 '재미있는' 히어로무비를 기대하는 팬들이 있기에, 우리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영화가 나오길 바란다. 그게 오랫동안 기다려 온 헐크의 진짜 이야기면, 더 좋고.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