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영화계를 뒤흔든 두 편의 영화 <부당거래>(감독 류승완), <악마를 보았다>(감독 김지운)의 각본가로 일찌감치 주목받은 박훈정 감독이 여덟 번째 영화 <귀공자>로 돌아왔다. 수많은 명장면, 명대사를 탄생시킨 한국 범죄 누아르 대표작 <신세계>(2013)부터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소재와 감각적인 액션으로 극장가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마녀 유니버스’를 구축한 <마녀> 시리즈,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감성 누아르 <낙원의 밤>(2021)까지, 박훈정 감독은 매 작품 탁월한 스토리텔링과 매력적인 캐릭터, 압도적인 비주얼을 과시하며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해왔다.
<귀공자>는 필리핀 불법 경기장을 전전하는 복싱 선수 ‘마르코’(강태주) 앞에 정체불명의 남자 ‘귀공자’(김선호)를 비롯한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세력들이 나타나 광기의 추격을 펼치는 이야기. 사설 경기장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마르코는 어머니의 병환이 더 깊어지는 상황에서 수소문 끝에 마지막 희망인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귀공자’를 필두로 ‘마르코’를 향한 광기의 추격이 시작된다. ‘마르코’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재벌 2세 의뢰인 ‘한이사’(김강우)와 필리핀과 한국에서 우연한 만남이 반복되는 미스터리한 인물 ‘윤주’(고아라)까지.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 가늠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신선한 전개와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특유의 매력적인 캐릭터, 쫓고 쫓기는 리얼하고 속도감 있는 액션을 통해 짜릿한 쾌감과 동시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화려하게 충무로에 입성했지만, <대호>(2015), <브이아이피>(2017)의 저조한 흥행 성적표를 받아든 박훈정 감독은 2016년 직접 제작사를 차리기도 했다. 작품이 흥행하지 못할 경우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게 차린 제작사 이름은 ‘금월’. <신세계>의 ‘골드문’에서 따왔다. 다짐처럼 <브이아이피>부터는 연출, 각본은 물론 제작까지 해오고 있다. <귀공자> 개봉 열흘 즈음에 박훈정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말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한 4년쯤 된 것 같아요.
개봉한 지 2주가 되어 가는데, 반응은 좀 보세요?
아뇨. 반응은 묵혀 뒀다가 한 12월쯤 보면 괜찮을 거 같아요. 그때 보면 조금은 덤덤하게 볼 수 있을 거 같아서요(웃음). 원래 영화 나오면 한참 지나서 반응을 보는 편인데, 마음에 평온이 깃들 쯤에요.
<귀공자들> 아이디어는 어디서 착안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특히 마르코(강태주)가 코피노(한국 남성과 필리핀 현지 여성의 2세)인데요, 코피노라는 소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궁금하네요.
사실 되게 오래전에 묵혀뒀던 소재에요. 예전에 코피노 관련 다큐멘터리를 한 적이 있어요. 한국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뭐라 그럴까요, 열받기도 하고 그런 감정들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생각을 좀 했고, 시나리오도 그때 썼죠.
영화 제목 <귀공자>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녀>에서 최우식 배우의 배역이 ‘귀공자’였고요, 김선호 배우도 ‘귀공자’ 역으로 <귀공자>에 출연해요. 제목을 ‘귀공자’로 지은 이유가 있으신지, 또 감독님께 귀공자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만든 캐릭터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깝거든요. 좋은 캐릭터를 한 번 쓰고 끝내긴 좀 그러니까요. 물론 이번 영화는 아예 별개 작품에서 귀공자라는 이름을 쓰긴 했지만요. 이번 영화에서 나오는 귀공자는 킬러죠. 스스로를 프로페셔널이라고 외치면서 또 약간 허술하기도 하고, 속물적이기도 한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뭔가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는 느낌도 나는 걸 생각하다가 귀공자라는 캐릭터를 영화 제목으로 또 쓴 거죠.
추후 영화에서도 또 쓰실 건가요?
두 번 썼으니까요. 삼세번 쓰기는 좀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웃음).
귀공자는 2번으로 끝낸다고 하셨지만, 전작들도 그렇고 배경에 제주도가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제주도 명예도민입니다(웃음). 제주도라는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그나마 이국적이면서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진 곳이 제주도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내륙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서와 느낌이 제주도에 있다고 보거든요. 여름도 겨울도 그렇고 제주도에는 늘 푸른 공간이 많은데, 거기서 오는 느낌들을 제가 되게 좋아해요. 그래서 제주도를 선호하는 편이죠. 맛있는 것도 물론 많고요, 공기도 좋고요(웃음).
귀공자 역을 맡은 김선호 배우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맑은 눈의 광인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대단한 능력치를 가진, 마치 <마녀>의 자윤(김다미)처럼 초능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거의 초능력급, 탈인간급 능력치를 가진 캐릭터니까요. 마스크로 봐도 전작들을 봐도 박훈정 감독님 영화에 출연할 거라 예상하기 어려웠는데, 어떻게 김선호 배우를 캐스팅하게 된 건지, 상세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요.
안 어울린다는 이야기 처음에 정말 많이 들었어요. ‘아닌데?’, ‘그림이 아예 안 그려지는데?’ 이런 이야기들요. 그런데 저는 김선호 배우에게 분명히 귀공자의 얼굴과 느낌이 있는데, 아무도 그걸 못 본 거로 생각했어요. 저라면 김선호 배우의 그런 얼굴, 느낌을 영화에 쓸 수 있을 거 같아서 다른 감독들이 쓰기 전에 빨리 먼저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캐스팅 초반에 안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역시 제가 잘 본 거 같아요(웃음).
김선호 배우의 어떤 작품에서 그런 이미지를 확인하신 건가요?
사실 <귀공자> 캐스팅 전까지는 김선호 배우를 전혀 몰랐어요. 이름만 들어봤죠. 귀공자 역에 여러 배우를 리스트업 해뒀는데 김선호 배우를 그때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 저는 그 배우의 전작을 다 봐요. 연기를 굉장히 편하게 잘하더라고요. 기본기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만, 그간 맡았던 캐릭터들이 비슷한 면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주변에서 김선호 배우가 누아르 장르나, 이른바 박훈정표 영화에 어울리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을 테고요. 그래도 저는 기본기가 확실히 잘 되어 있는 걸 확인했고, 김선호 배우에게서 여러 얼굴들을 봤어요. 김선호 배우가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서 저는 ‘귀공자’랑 잘 어울리겠는데 하는 생각을 한 거죠(웃음).
실제 작업을 해 보니 기대에 부응하던가요?
김선호 배우가 연극을 오래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이나 내공은 생각했던 것만큼 탄탄했습니다. 굉장한 장점이 뭐냐면, 그 캐릭터를 자기식으로 잘 소화해요. 그리고 연출을 하다 보면, 빈 공간들이 생기는데, 그 빈 공간들을 기가 막히기 잘 채우더라고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주신다면요?
마르코(강태주)를 쫓아가는 씬인데요. 터널에서 쫓아가다 갑자기 비가 내리면서 터널로 돌아가는 장면이죠. 원래 시나리오에는 ‘기침하다가 구두 닦고 거울 보고 머리 쓸어올린다’ 정도로 적혀 있거든요. 이게 그냥 쓰인 대로만 연기하면 되게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걸 넘어서는 게 배우들의 능력이자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김선호 배우가 그 장면을 되게 자연스럽게 연기했어요. 생각해보세요. 거의 다 잡았는데, 비가 온다고 다시 터널로 돌아간다? 물론 귀공자라는 캐릭터 자체가 그렇게 설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걸 그럴싸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배우의 능력인데, 정말 탁월했습니다. 이걸 배우가 표현해내지 못하면 연출자 입장에서는 방금 찍은 씬이 작위적인가를 판단해야 하고, 씬을 바꿔야 할까를 고민해야 하는데, 완벽하게 해냈으니까요. 관객들도 그 장면을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으로 느끼지 않는 거 같고요.
김선호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지금은 엄청 친하시다고요. 후속작 <폭군>도 함께 하기로 했고요. 김선호 배우의 인간적인 매력은 뭔가요?
일단 재밌어요. 상대에 대해 배려도 잘하고요. 어떤 자리가 됐든 잘 어울려요. 사람이 기본적으로 착해요. 선하고 그래서 순하기도 하고요. 같이 연기했던 강태주 배우나 고아라 배우랑도 현장에서는 남매처럼 붙어 다녔어요. 철없는 형이 김선호 배우, 철없는 누나가 고아라 배우, 똘똘한 막내가 강태주 배우, 이렇게요(웃음). 김선호 배우가 철없는 형 역할인데, 어린 동생에게도 잘하고 스태프들에게도 잘했어요.
감독님의 매 작품은 오디션으로 화제죠.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신인배우들과 함께 작업을 하시고요. 마르코 역에는 강태주 배우가 낙점되었는데, 어떤 매력에 끌리신 건가요?
일단 외모가 좋고요(웃음). 강태주 배우가 해외에서 공부한 적이 없대요. 여행은 가봤겠지만요. 그런데 영어를 엄청 잘해요. 일본어도요. 독학으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똘똘한 친구예요. 그 똘똘함이 연기할 때도 필요하잖아요? 감독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빠르더라고요.
오디션장에서 처음 봤을 때, 눈빛이나 에너지가 좋았어요. 연기에 대한 절실함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강태주 배우가 거의 마지막 오디션이라고 생각하고 왔던 거더라고요. 잘 안 풀리니까, <귀공자> 오디션까지 떨어지면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그래서인지 에너지가 느껴졌어요. 물론 연기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거기서 오는 신인배우로서의 부족함은 분명 있죠.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사용하는 기술적인 측면은 서툰데, 기본적으로 그런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배우로서 장점이죠.
신인배우를 주연으로 발탁하는 건 어찌 보면 도전인데요. 계속해서 신인배우와의 작업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기본적으로 저는 기성 배우, 신인 배우에 상관없이 캐릭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를 찾고 싶은 게 첫 번째고요. 사실 그다음은 질문하신 그런 면이 좀 있기도 하죠. 이건 연출적인 장점 중 하나인데요. 신인 배우를 썼을 때는 관객들이 그 캐릭터로 봐줘요. 유명한 스타 배우를 쓰면 캐릭터보다는 배우로 보거든요. 신인 배우에게 캐릭터를 입히면, 관객들이 그 캐릭터로 봐준다는 장점이 있어요. 어찌 되었든 다 떠나서 연출하는 사람으로서 판단했을 때, 이 캐릭터에 저 배우가 적합하다는 판단이 서면 저는 신인 배우를 선택합니다.
그렇게 선발된 신인 배우들이 이제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녀>의 김다미 배우처럼요. 배우들 성장하는 거 보면서 어떤 기분이세요?
일단, 다음 작품에는 또 어떻게 캐스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 배우 풀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나이대에 괜찮은 배우들이 또 늘어나는 거니까 거기에 제가 일조를 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도 느끼고요(웃음). 그런데 제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도 그 정도 역량이 되는 친구들이라면 누군가에게라도 발견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좀 일찍 발견한 것뿐이고요.
늘 코미디를 추구하시잖아요. 영화에도 적절하게 넣으시려고 하지만 타율은 낮은 편이고요. 그런데 <귀공자>에서는 잘 버무려진 것 같습니다.
항상 코미디를 추구했는데 사실 잘 안되었거든요. 제 유머 코드가 일반적이지 않고 극소수만 공감할 수 있는 유머여서 그렇죠. 저는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되게 웃겼고, 찍으면서도 너무너무 웃긴데, 대중적이지 않아서 고민이었죠. 그래도 다행히 <귀공자>는 좀 웃기다고 하더라고요. 전체적으로 영화 톤이 가벼워진 거 같아서 타율이 다른 거 같기도 해요.
말씀하신 대로 <귀공자>에는 코미디적인 요소가 많이 녹아 있어요. 그런데 원제가 원래 <슬픈 열대>였다고 들었습니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씁쓸함이 느껴지겠구나 하는. 마르코 입장은 물론이고, 제3자 시각에서 봐도 굉장히 아픈 이야기잖아요. 잔인하고요. 그래서 제목도 <슬픈 열대>였죠. 시나리오는 제목에 딱 맞았어요. 그런데 촬영하면서 현장에서 편집본들을 보는데, ‘아, 영화가 슬픈데 밝네?’에서 ‘어 재밌네?’로, 그리고 ‘어, 안 슬픈데?’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래도 사실 고민이 많아요. 스태프들도 ‘감독님, 코미디 이쯤 하셨는데도 안 먹히면 그만하시는 게 어떻겠느냐’라든가 ‘코미디적 요소를 넣지 말든가, 아니면 그냥 코미디를 하시라’는 말을 하니까요(웃음).
역대 작품 중에서 가장 밝은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녀> 때만 해도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믿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귀공자>는 아닌 거 같아서요. 혹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그렇다면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심경의 변화는 아직 없어요. 저는 성악설이 아직도 우세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가끔 그런 건 있죠. 전체적으로 성악설이 우세한데,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약간의 가능성이 열린 거라고 할까요. 근데 이게 ‘성악설은 아닌 거 같아’라는 생각은 아니고요. 아무래도 제가 인간관계가 굉장히 협소하긴 한데, 어쨌든 저도 사람들을 한 번씩 만나기도 하고 기존의 친구들과 지내는 걸 보면서 ‘케바케’인가 싶기도 해서요. 약간, 그 정도의 변화가 생긴 건 맞습니다.
<브이아이피>(2017) 인터뷰 때 “폭력을 폭력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신지요?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폭력을 폭력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든 저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잖아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도 관객이 너무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영화를 안 본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폭력의 수위를 낮춘다고 해서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게 되죠. 아무래도 관객이 영화를 보게 해야 하니까요(웃음).
<귀공자>에서 폭력의 수위를 조절하려고도 고민하셨겠어요.
아무래도 안 할 수가 없죠. 후반작업에서 CG팀이 피를 더 넣으라고 했는데, 많이 지웠어요(웃음). 꼭 등급 때문이 아니라도, 청소년 관람불가라고 하더라도 수위에 대한,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은 계속할 것 같습니다.
누아르 장르에 특화된 감독님이라 그런지 피와 복수로 얽힌 남자들의 세계를 많이 그리셨어요. 물론 <마녀>는 여자 배우가 주연이지만요. 이번에 <귀공자>에서 홍일점으로 고아라 배우가 윤주 역으로 나옵니다. 참 의외의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었는데, 찰떡같이 캐릭터를 소화했더라고요. 고아라 배우의 어떤 매력에 끌리신 건지, 또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었나요?
고아라 배우를 캐스팅했을 때도 김선호 배우 때와 마찬가지 반응이 많았어요. ‘윤주에 고아라가 어울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저는 윤주라는 배역은 이미지에 중점을 뒀습니다. 그런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 많은 배우들의 프로필과 작품을 봅니다. 화보도요. 고아라 배우가 찍은 예전 패션지 화보를 보다가, 어떤 사진 한 장에서 제가 생각한 윤주의 이미지를 발견했어요. 딱 맞아떨어지더라고요. 고아라 배우를 만나서 그 사진을 건넸어요. 묻고 따지지도 않고, 딱 이게 제가 윤주에게 원하는 이미지라고,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오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고아라 배우가 인터뷰에서 액션 준비를 정말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고요. 현장에서 어떤 디렉션을 주셨는지, 또 고아라 배우가 연기한 윤주 역에는 만족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잘 만들어 왔더라고요. 액션을 배웠다고 하던데 왜 그랬는지…. 운동 삼아?(웃음) 그냥 운전하고 총 쏘면 되는 건데, 굉장히 열심히 준비해줬어요. 사실 저는 홍콩영화를 많이 보고 자란 세대여서요. 액션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총 쏘는 자세가 어색하면 영화에 몰입감이 깨지더라고요. 그래서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총을 다뤄야 하는 배우들에게는 대본과 함께 실제 총 무게와 유사한 가짜 총을 줍니다. 항상 가지고 다니라고, 잘 때도 머리맡에 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들라고요. 고아라 배우에게도 일부러 능숙하게 다루는 게 아니라, 되게 편하게 사용하는 도구처럼 총을 다루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정말 총을 잘 쏘더라고요.
김선호 배우도 조교 출신이라 총을 잘 쐈을 거 같아요.
조교 출신인 걸 몰랐어요. 총을 잘 못 쏘더라고요. 조교 하면서는 소총만 들어서 그런가?(웃음) 그래도 역시 조교 출신이라 그런지 권총에도 금방 적응하더라고요.
정찬일 평론가도 극찬했죠. 후반부 액션신이 대단하다고요.
대역을 아예 안 쓴 건 아닌데, 최소화했습니다. 원래부터 저는 액션을 찍을 때, 어지간하면 배우가 직접 해야 한다고 말해요. <귀공자>는 특히나 배우가 직접 한 비율이 높고요. 배우들이 거의 대부분 액션을 소화해서 그런 반응이 나온 거 같아요. 배우가 직접 액션을 하면 카메라가 자유롭습니다.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역을 쓰면 카메라가 제약적이고, 컷을 쪼갤 수밖에 없거든요. 김선호 배우를 비롯해 모든 배우들이 직접 뛰어주니, 카메라가 쫓아가면서 화면에 담을 수 있는 거죠. 배우들이 안 받쳐주면 대역을 쓰고 풀샷으로 찍어야 하는데, <귀공자>는 그런 면에서 자연스러웠던 거죠. 그래도 어렵게 찍긴 했어요.
어떤 면에서요?
하루에 8시간, 12시간을 찍으면 영화 1분 분량이 나와요. 오전에 찍고 지치면 쉬고, 찍다가 부상을 입으면 치료하고 다시 찍고요. 그래도 체력적으로도 금방 지치죠. 오전에는 팔팔하다가도, 오후만 되면 액션팀들이 하나둘씩 쓰러지는 거죠. 다음날 되었는데, 어제 나온 액션팀 배우가 안 보여서 어디 갔느냐고 물으면 ‘오늘 못 나왔습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오는 현장이었죠.
<신세계>나 <브이아이피>의 등장인물들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등바등하죠. 그런데 <마녀>의 자윤은 초능력을 가졌어요. 분명 감독님의 영화상의 큰 변곡점이 되었다고 보고요. 이번 <귀공자>에서는 김선호 배우가 그런 역할을 수행합니다. ‘맑은 눈의 광인’처럼요. 현실을 점점 벗어나는 만화처럼 능력치를 가진 캐릭터들이 점점 등장하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초능력자가 없긴 하지만 귀공자가 일단 이 영화상에서는 최강자로 나오죠. 그래도 완벽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킬러 일을 하고 있지만, 윤주에게 의뢰를 받기도 하잖아요. 그럼 분명 어디 에이전트 소속일 테고, 그 안에는 더 강한 킬러가 있을 수도 있거든요. 저는 이 영화에서 귀공자는 그냥 마르코에게 무섭고 섬찟한 인물로 구축하려고 했어요. 사실 제 영화들 중에 능력자가 나오는 건 <마녀> 1, 2편뿐입니다. 능력자들에게 리미트를 주는 것도 재미있고요, 뭔가 상호보완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아서요. <마녀>는 마녀대로 <귀공자>는 이 이야기대로 한 거죠.
그래도 귀공자 역의 김선호 배우가 점프하는 장면을 보면 능력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웃음).
귀공자가 뛰어내리는 고가도로를 섭외하고, 촬영하는데 김선호 배우가 물어보더라고요. 여기밖에 없냐고요(웃음). 너무 높으니까요. 고가도로는 우회도로가 있어서 섭외할 수 있었고, 뛰어내리는 아래 도로는 폐쇄되어서 두 도로를 모두 쓸 수 있었어요. 사실 그리 높지 않은 고가도로도 있었는데, 쓸만하다 싶은 곳은 통행량이 너무 많아서 허가가 안 나더라고요. 후반작업에서 어떻게 편집할 수 있을까도 고민했는데, 안 될 거 같아서 그냥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와이어 달고요.
감독님 지금 말씀하시는 걸 보면 참 차분하신데, 영화에서는 좀 반대인 거 같아요. 뛰어내리라고 하시는 걸 보면요. 배우들 말로는 ‘상남자’시라고. 영화 작업하면서 혹시 그런 데서 희열 같은 걸 느끼는 건가요?(웃음)
희열까지는 아니고요(웃음). 취향인 거 같아요. 어릴 때부터 누아르, 일본 애니메이션도 많이 좋아했고요. 그런 것들이 작품에 반영이 많이 되는 거 같아요. 제 영화를 보시고 예전 홍콩영화 보는 것 같다는 분들도 많아요. 맞아요. 저는 그 영향에서 아마 못 벗어날 거 같아요.
마치 사망플래그처럼 나오던 귀공자의 기침에 대한 쿠키 영상을 보면서 속편에 대한 기대가 생겼습니다. 처음부터 속편은 계획하셨는지 궁금해요. 강태주 배우는 인터뷰에서 귀공자에게 트레이닝을 받아서 킬러가 되는 이야기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아니, 그 친구들은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좀 물어보든가요(웃음). 사실 이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는 속편 생각은 전혀 안 하고 한 편의 영화만 생각했어요. 캐릭터가 좀 아깝다는 생각은 했고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 이후에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아참, 김선호 배우가 촬영하면서 귀공자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이 굉장히 많았어요. 찔끔찔끔 스토리를 이야기해줬죠. 영화가 잘 되면 다음 편에서 풀어야지, 왜 자꾸 영업 비밀을 물어보냐고 한 소리 하기도 했고요(웃음). 영화를 시리즈화 한다는 게 사실 감독 혼자만의 의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일단은 제가 밀린 숙제가 많지 않습니까?
<신세계> 프리퀄요?
아유, 그렇게 콕 집어 말씀하지 마시고요, 그냥 밀린 숙제 정도로만 표현하겠습니다(웃음).
전작 <마녀>에서 귀공자 역의 최우식 배우도 그렇고요, <갯마을 차차차>(연출 유제원‧권영일, tvN, 2021)의 김선호 배우도 그런데, 배우들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입히는 걸 특히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다른 감독이 그 배우에 대해 아직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씩 틀어 보는 것에 대한 재미가 분명 있어요. 그 배우들이 그걸 해낼 능력이 분명 있는 배우들이거든요. 남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걸 쓰고 싶은 거죠. 다만, 그만한 역량이 있는 배우여야죠. 상반된 이미지가 있다고 아무 배우나 다 할 수는 없어요. 역량이 안 되면 어색하고 안 어울리는 것처럼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만화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마녀>에 이어 <귀공자> 역시 그런 면에서 일견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만화 같은 영화라고 하면 스타일을 극한처럼 밀어붙인 <씬 시티>(공동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프랭크 밀러, 2005)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혹시 후속작을 <씬 시티>처럼 찍어볼 계획도 있으신지 궁금해요. 아니라면 레퍼런스까지는 아니라도 감독님 머릿속에 남아있는 홍콩영화는 무엇인지도요.
음(고민). <씬 시티> 같은 영화를 만들기에는 한국에서 투자사 설득은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웃음). 만들고 싶죠. 기회가 되면 정말 하고 싶어요. 홍콩영화는 사실 예전이 전성기였죠. 요즘은 거의 안 나오기도 하지만, 검열이 많아지면서 예전 같은 홍콩영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쉽기도 하고 슬퍼요. 예전 홍콩영화는 거의 다 봐서 볼 게 없기도 하고요.
<열혈남아>(감독 왕가위, 1988) 같은 영화 좋아하시는 거죠?
아, 좋죠. 끝내주는 영화죠.
후속작 <폭군>에서 김선호, 김강우 배우와 함께 하세요. 신뢰라고 할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좋은 배우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상황만 된다면 계속 같이 하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두기봉 감독님은 항상 같은 배우가 역할만 바꿔가면서 영화를 합니다. 저는 그것도 재밌더라고요. 좋은 배우와 캐릭터를 전작과 붙이거나 바꿔도? 그게 안 되면 두 작품 정도 쉬었다가 만나자고 하는데, 본인들이 그게 되고, 또 저랑 작업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난 뭐 하면 되죠? 그거 할까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폭군>에 코미디적 요소를 넣을 계획이신가요?(웃음)
물론 시도는 할 텐데, 스태프들이 빼면 안 되겠냐고 자꾸 해서 고민이 많습니다(웃음). 이 정도 했는데도 안 먹히면 뭐 안 하는 게 맞겠죠?
여러 작품을 찍으셨지만, 대중에게 박훈정 감독은 누아르 장르에 특화된 감독으로 통합니다. 고정 팬이 많으세요.
제가 팬이 많은 줄 몰랐어요(웃음). 그래도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제 작품을 좋아해 준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걸 넘어서 든든하죠. 사실 든든합니다(웃음), 작품에 대한 팬이 많다는 건요, 그렇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지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망을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항상 하나씩 하나씩 하면서, 다음 편은 좀 더 잘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