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배우 특별전 '최민식을 보았다' 포스터

그래. 드디어 그 고귀한 세 글자. 최민식이다. 해외에서 몇 차례의 회고전이 이루어졌음에도 국내 특별전은 외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배우 최민식은 너무나도 겸손하고 겸허하게 국내에서 이루어진 특별한 “조명”에 대해 감사해하고 기뻐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해맑은 표정을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인데다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단연코 한국 영화의 얼굴이 틀림없다.


이미 해외에서는 이루어졌던 회고전(2008년 리옹 영화제, 2012년 뉴욕아시안 영화제), 혹은 특별전인데 국내에서는 오히려 좀 늦은감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기쁜 일인데 소감이 어떤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늦으면 어떻고 일찍이면 어떤가. 그저 한길을 꾸준히 걸어왔다는 것을 인정해주시고 격려해주신다는 기분이 들어서 한없이 기쁘기만 하다. 더군다나 외국에서 특별전을 했을 때와 국내에서 했을 때는 심정이 또 다른데 왠지 더욱 감격스러운 느낌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최민식이 직접 선정한 장편 10편과 최초 상영하는 단편 2편 (사진 출처=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단편 포함 총 12편이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특별전에서 상영이 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쉬리>(1999), <해피엔드>(1999), <파이란>(2001), <올드보이>(2003), <꽃피는 봄이 오면>(2004), <악마를 보았다>(2010),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2022)). 이 작품들을 직접 선정했다고 들었는데 선정 기준은 어떤 것이었나.

모두 애정하는 작품들 속에 일단은 고르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하나같이 최선을 다해서 찍은 작품들이라 매우 심사숙고했다. 다만 관객들에게 나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나이대도 모두 다르고(예컨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30대, 배우 생활 초기에 찍은 작품이다), 장르도 다르고, 캐릭터도 모두 다르게 말이다.

사실 단편 작품(<수증기>(1988), <겨울의 길목>(1989))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태까지 공개가 안되었을뿐더러 지금처럼 단편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영화제 측에서 선정한 것인가?

그렇다. 나 역시 내가 찍은 단편영화가 존재한다는 것도 잊고 살았었다. 이번에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알게 되었다. 너무 초기라서 망신은 아닐지 걱정이다(웃음). 아마 내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시절) 4학년 때였는지 혹은 졸업 직후 정도에 찍은 단편들인 것 같다. 사실 동국대에는 당시 영화 전공보다 연극전공이 더 많아서 이웃 학교였던 서울예대의 영화과 친구들, 다른 학교 영화과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었다.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 그 당시 알게 된 친구들의 작품에 같이 참여를 했던 것 같다.

이번에 필모그래피를 보니 몇 명의 감독들(박종원, 박찬욱, 정지우, 김지운, 박훈정) 정도를 제외하고는 신인감독들을 포함해 한 감독님과 한 번씩 작업을 했다. 계속 새로운 감독들과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딱히 누굴 더 좋아해서 두 번을 하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때그때 작품을 보고 고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다만, 무언가 특별한 것이 통하는 감독이 있는 건 사실이다. 작품을 하다보면 디렉션이 없어도, 줄줄이 설명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같은 부분에서 같은 느낌을 갖는 그런 감독이 있긴 하다.

사실 2002년 <취화선>(임권택)의 칸 수상, 2003년의 <올드 보이>(박찬욱) 수상 이후로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국내, 해외 위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이름이 더욱더 많이 알려졌고, 들어오는 작품의 스케일이나 전반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그럼에도 그다음에 선택한 작품이 의외다. <꽃피는 봄이 오면>이라는 작고 소소하지만 아기자기한,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아하는 작품인데, 더 큰 작품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나?

일단 스케일이 큰 영화는 고생스럽다(웃음). 농담이고, 스케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올드보이> 이후 정서적으로 완전히 상반된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정말 추운 겨울에 산을 등산하다가 한 산장에 들어갔더니 너무나도 따뜻해서 배낭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잠이 스르륵 드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지금은 고인이 된 유장하 감독의 <꽃피는 봄이 오면>은 이런 따스함을 주는 영화였다. 내 선택에 다들 의아해했지만 난 내 느낌이 더 중요했고, 이 영화의 감성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예산이나 여러 가지 조건보다 내가 작품에 대해서 느끼는 첫 느낌이 제일 우선이다.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스크린 쿼터 투쟁을 거의 5년 동안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칸 영화제에까지 가서 투쟁을 했고 수많은 세계 영화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실로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모두의 ‘밥줄’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고 문화적인 유산을 보호하는 일이기도 했다. 시위하는 현장에서 동료영화인들과 함께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만나고,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다. 사실 상처를 받기도 했고, 불이익을 당한 점도 있지만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배움이었고,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경험이기도 하다.

해외감독과 배우들과 협업한 첫 작품, <루시>(뤽 베송)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하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해외에서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다(제작비의 12배가량).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

사실 호기심으로 해본 작품이었다. <그랑 블루>나 <레옹> 같은 대작들을 만든 뤽 베송이라니 당연히 끌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더욱이 뤽 베송 측에서 캐스팅 관련해서 먼저 연락을 해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명량>(김한민) 촬영 중이라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더니 뤽 베송과 영화의 프로듀서가 나를 만나러 한국으로 왔다. 당시 내가 맡을 캐릭터의 포트폴리오와 의상 컨셉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가지고 온 것이 매우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영어로 대사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뤽 베송 측에서는 모든 대사를 한국어로 하게끔 배려를 해주었다. 극 중 스칼렛 요한슨의 캐릭터가 언어적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긴장감을 형성하는데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이런 성의에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엔 출연을 승낙했다.

프랑스 현장은 어떻게 달랐나? 영화는 만족스러웠나?

사실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다 비슷했다. 도착하자마자 스태프들의 각 역할이 뭔지 (사운드 스태프인지, 조명 스태프인지) 내가 다 알아 맞출 정도였다. 척 보니 알겠더라(웃음). 100% 만족스러운 영화가 어디 있겠냐만 <루시>는 나에게 멋진 추억을 선물해준 작품이다. 작품을 하면서 모건 프리먼과 함께 마주할 수 있었던 것도, 깜짝 놀랄 정도로 당찬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과 호흡을 맞춘 것도 모두 즐거웠다.

연기 초기에 드라마 작업을 많이 했었다가 영화에 몰두했다. 그리고는 정말 몇 십 년 만에 <카지노>라는 드라마로 귀환했는데, 오랜만에 드라마를 소화하는 것은 어땠나?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플랫폼이 다르다고 해서 연기 스타일이 달라진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16부작에서 내가 맡은 캐릭터의 양도 많고, 시리즈 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어마무시한 양을 한정된 시간 안에, 그리고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거의 완성을 해야 하는 것이 매우 큰 부담이었다. 일례를 말하면, 하루에 12씬까지도 찍어봤다. 영화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 소속사 없이 혼자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이유로 이런 결정을 했으며 살짝 불안하진 않으신지(웃음).

원래 있던 회사의 계약이 끝났던 것뿐이고 그러고는 그냥 혼자 설렁 설렁 다닌다. 시나리오는 모두 내게 직접 오고 있는데, 사실 신인 감독이라 해도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라 작품이 오는 것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다. 개봉 예정인 장재현 감독의 <파묘> 이후로 잠시 쉬고 있는데 별로 바쁘지 않은 지금 이 시기가 너무 좋다 (웃음).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민식 배우는 “연기가 본인의 인생에서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한 번도 식어 본 적이 없는 사랑”이라고 말했다. 과연 한 평생을 스크린에서 숨 쉰 배우에 걸맞은 시적이고도 심오한 답이 아닐 수 없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사를 스냅샷으로 찍으면 배우 최민식의 열굴로 현상되지 않을까. 그에게 연기가 “한 번도 식어 본 적이 없는 사랑”이었던 것처럼 배우 최민식 역시 우리에게 “한 번도 식어본 적 없는” 배우다. 앞으로도 그를 향한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글=김효정 영화평론가

사진=보름달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