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하는 사람은 동어 반복이라는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기존 작품에서 이미 성공을 거두었고, 찬사와 지지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안전한 길로만 가고 싶을 것이다. 이미 대중들의 취향은 뻔하다는 착시에 빠진 채, 대부분 타협을 택한다. 그 결과는 종종 대규모 예산으로 작심하고 천만을 노리고 나온 기획영화같이 안타깝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멜로와 신파와 스펙터클이 골고루 버무려졌으나 결국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무언가로 지나가 버린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소수의 탁월한 창작자만이 그 편안한 선택을, 검증된 성공의 경로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멀리까지 가닿고자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모두의 기억에 남아 불멸이 된다. 한껏 부풀어진 세계 속에서 더 높이 도약하며 기존의 공간에 균열을 일으킨다. 대체 여기에서 뭔가를 더 해내는 게 가능할까? 싶은 지점에서 더 나아가며 모두를 다시 한번 놀라게 만든다. 그들은 그렇게 창작자로서 한 뼘씩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자신의 예술을 한 차원 더 높고 귀한 것으로 격상시킨다. <시네마천국>(1988),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 등 엔니오 모리꼬네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다큐멘터리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이런 엔니오의 지나온 길을 차분히 되짚는다. 흘러나오는 멜로디들은 그의 음악이 그러하듯 순식간에 우리를,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과 만났던 순간으로 데려가 준다.


고백하건대 한때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음악을 거리를 두고 대하기도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영화가 끝난 뒤에도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를 연주해보다가 흠칫 놀라는 일이 잦았다. 겨우 한 두 마디 지나는 동안 음표들이 팔을 쭉 뻗어 내 심장을 사정없이 움켜쥐듯, 나를 뒤흔드는 감각이 두려웠다. 음악이 이토록 속절없이 찰나에 듣는 이를 포로로 만들어 버린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멜로디에 대해서는 합당한 이유를 부여하고자 했다. 연인이 귓가에 속삭이는 듯 나직한 음색의 솔로 파트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눈가가 젖어 들었고, 신선할 정도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소리를 활용한 테마를 듣다 보면 바로 영화 속 장면이 떠올랐다.

<헤이트풀8>

어떤 소리들은 너무나도 날카로운 모서리를 하고 있어 칼날처럼 나를 베고 지나갔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2015)을 생제르망의 극장에서 보다가 쓰러져 구급차가 극장까지 오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실황으로 들었을 때와 비슷하지만 더 강렬한 경험이었다. 한없이 펼쳐진 설원의 풍경에 매번 이다음 어떤 음악이 나올지 예상하지 못하면서 조우한,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활용한 음악에 온몸이 찔려 피 흘리는 것 같았다. 2시간 4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지나는 동안, 엔니오의 음악은 신비로운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꿈속에서 펼쳐지는 장면들과 조우하며, 찰나에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온 모든 영화적 순간으로 회귀한다. 미국 서부 황야의 한복판, 매캐한 모래바람, 눈이 시리도록 온 세상이 그저 희고 눈부신 설원, 평화로운 바닷가, 숲이 우거진 미지의 자연으로 남은 밀림, 나를 응시하며 다가오는 내 사랑하는 연인의 눈빛, 그 눈동자 안에서 스쳐가는 찰나의 영원, 흉악한 악령의 기괴한 웃음소리….


음악은 놀라운 추상의 언어로서 순식간에 우리를 전혀 다른 차원 -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한 번도 닿아보지 못했던 저 너머로 데려가 준다. 엔니오는 음악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운명의 속박이라는 사슬을 제 손으로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대로, 아버지가 살아온 것처럼 트럼펫 연주자의 인생을 살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작곡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손꼽히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두 번이나 들어가는 일부터 보기 드문 행보였다. 엘리트 음악계의 계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고프레도 페트라시의 문하에 들어가고, 체계적인 작곡 수업을 듣지 못해 기법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한 그가 몇 달간 춤곡만 쓰다가 결국 졸업 시험에서 9.5점을 맞았다고 감격에 겨워하는 장면에서는 그 너머가 헤아려져 코끝이 시큰해졌다. 남들보다 뒤처진 출발을 했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고야 말겠다는 태도로 온몸으로 돌파해 결국 성취와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이미 그의 인생에서 예견된 운명이었을 것이다.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참가해 현대 음악의 최전선에서 그 누구보다 아방가르드한 존 케이지의 시도에 못지않은 연주를 선보이고,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해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풍성한 편성의 악기를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의 뇌리에 영원히 남을 테마를 만들어 내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새삼스레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된다.

음악은 놀라운 추상의 언어로서 순식간에 우리를 전혀 다른 차원 -이 곳이 아닌 어딘가로, 한 번도 닿아보지 못했던 저 너머로 데려가 준다.

흔히 모차르트를 신동 혹은 천재로만 기억할 뿐, 그가 얼마나 매일매일 열심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음악을 써내고 고치며 세상에 꺼내놓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는 음악사 수업 시간에 들었던 내용 역시 스쳐 지나간다. 이미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게 완성했으나 안주하지 않고, 대체 여기에서 뭘 더 한다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며, 이토록 투명하고 눈부시게 찬란하다가, 심연보다도 더 깊고 묵직하게 침잠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고, 영화 속 인물의 내면을 스쳐 지나가는 섬광과도 같은 감정들을 음악으로 구현해 우리가 그 감정들을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 거장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다큐에 등장해 마치 사랑 고백을 하듯 엔니오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 또 다른 거장들의 목소리에 완벽히 빠져들게 된다.


어렸을 적 동창이었던 엔니오 모리꼬네와 세르지오 레오네의 오랜 우정

1960년대, 현대 음악계의 최정점에 있던 리게티의 음악('아트모스페르 Atmosphères')을 허락도 없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활용했던 스탠리 큐브릭과 엔니오 모리꼬네의 만남이 만약에 이뤄졌더라면, 영화사에 어떤 걸작이 남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대체불가능한 재능의 엔니오를 독점하고 싶었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평생 영화와 음악에 헌신하면서도 영화 음악이 아닌 순수 현대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거장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빛나는 눈빛을 마주하며, 온몸으로 돌파해온 창작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을 접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작곡가의 내면에 떠오르던 악상을 가장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다큐의 가치는 충분하다.

스탠리 큐브릭과 엔니오 모리꼬네의 만남이 만약에 이뤄졌더라면, 영화사에 어떤 걸작이 남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대체불가능한 재능의 엔니오를 독점하고 싶었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사랑하는 사람만이 대상에게 취할 수 있는 태도이다. 어쩌면 엔니오 모리꼬네는 온 생애에 걸쳐, 자신의 음악을 통해 영화를 더 온전히 이해하고, 더 높고 귀한 차원의 무언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던, 지극히 사랑하는 자세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용기 있는 거장이 아닐까. 다큐에 나온 모든 영화들을 다시 한번 찾아보며 찰나에 영화적 순간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다시 찾아 들어야겠다.


김나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