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래들리 쿠퍼가 제작, 각본, 연출을 맡은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에는 몇 가지 놀라운 지점들이 있다. 우선 오프닝에서 그동안 할리우드에서 놀라운 솜씨의 분장을 보여온(게리 올드먼을 윈스턴 처칠로 변모시킨 <다키스트 아워>로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한) 카즈 히로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배우들이 한 번쯤은 자신의 외모를 망가뜨리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하고는 하는데, 브래들리 쿠퍼 역시 예외는 아니다.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유족들이 동의했다며 유태계 특유의 코를 뭉툭하게 만들어 붙였고, 특유의 목소리와 발성까지도 따라했다.

외모만 노력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배우가 지휘자를 연기한 모든 영화를 통틀어, 브래들리 쿠퍼의 지휘 동작이 가장 자연스럽다. 마치 번스타인에 잠시 빙의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6분쯤 되는 지휘 장면을 위해 무려 6년을 넘게 지휘를 배운 노력 덕분일 것이다. 영화의 음악 자문과 지휘를 맡은 지휘자인 야닉 네제-세갱(Yannick Nézet-Séguin)이 이끄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연습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진심으로 지휘자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어떤 끈질긴 노력은 재능 이상으로 빛을 발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인물이 되기 위해, 브래들리 쿠퍼는 할 수 있고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도안을 다 채워 넣은 것 같다. 번스타인이 그러했듯 가득 들어차 도통 여백이 없어 보일 정도다.

1943년 11월 14일 카네기홀 무대에 올라 어마어마한 박수갈채를 받고 그다음 날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나왔던 25살에서 서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리허설조차 없이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필을 이끌며 화려한 데뷔를 하고, 최초의 미국 출신 지휘자로 뉴욕필을 이끌며 대중의 주목과 사랑을 받았으나 실은 러시아 유대계 이민자 출신인 그가 겪어내야 했던 내적 갈등이 적지 않았다. 칠레 출신인 펠리시아를 처음 만난 순간 곧 음악이 아닌 출세가 보장된 전공을 택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던 사연과 내면의 갈등을 스스럼없이 꺼내 놓는 장면부터 이들이 운명적으로 맺어질 사이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온전히 이해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레니를 자식처럼 아끼는 스승 쿠세비츠키가 유태인으로서 겪은 지독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그 모든 걸 견뎠음을 이야기하며 번스타인에게 본명보다 미국적으로 들리는 번스로 활동명을 바꾸길, 그래서 제자만큼은 같은 차별을 피해 가기를 바라며 애정 어린 충고를 하는 장면 역시 짙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 곳곳에 숨은 이런 개인적 서사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20세기 미국의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다. 번스타인이 활동하던 20세기 전반까지도, 여전히 유럽인 지휘자들이 초청되어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것이 미국에서는 당연한 룰이었다. 미국 태생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경우는 없었다. 아직 신대륙이 구대륙 대비 문화적으로 수준이 뒤처진 느낌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고, 미국인들 내면에도 이민자들의 나라, 유럽에서 떠나온 자들이 세운 나라라는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혜성처럼 등장한 미국 태생, 젊고 웃는 얼굴에 매력적이며 호소력 있는 말투를 가진 번스타인이 등장했으니 스타가 되고 대중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브래들리 쿠퍼가 여백 없이 빼곡하게 채워 연기한 번스타인의 모습은 그저 경이롭다. 외적으로도 완벽하게 번스타인이 되고자 했던 브래들리 쿠퍼는 음악에 대한 깊고도 뜨거운 열정으로 영혼 깊숙한 곳부터 잔뜩 넘실거리는 욕망으로 반짝거리는 인물을 거의 완벽히 구현해 냈다. 걸출한 재능의 안무가 제롬 로빈스 등 타 장르의 예술가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며 멈출 줄 모르는 창작욕으로 장르를 넘나들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대표되는 뮤지컬 작품을 남긴 순간을 오마주하기 위해 제롬 로빈스의 춤을 뮤지컬적으로 차용해 속도감 있는 전개로 그의 삶을 따라간다. 모든 것이 과잉된 상태로 흘러넘친다. 음악이 주는 열락과 황홀감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에너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성적 정체성과 욕망과 씨름하며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싶은 한 인간의 이율배반에 가까울 정도로 과한 욕망과 내밀한 고뇌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곡을 쓰는 번스타인이 피아노 위에서 만들어 내는 선율처럼 속삭이는 듯한 불협화음은 펠리시아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불꽃처럼 산화한다. 노력이 지나쳐 셈여림 조절에 다소 실패한 듯한 브래들리 쿠퍼와 달리 펠리시아로 분해 섬세하고도 기막힌 완급조절이 빛나는 케리 멀리건의 연기는 이 모든 서사의 중심추가 되어준다. 영화는 곳곳에서 번스타인의 다면적인 삶을 담아내고자 노력한 덕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나가거나 점프하듯 훌쩍 시공간을 초월하기도 한다. 곳곳에서 숨은 보석처럼 흘러나오는 마디마디 감정이 흘러넘치는 말러의 교향곡 아다지에토(Adagietto)가 깊은 감정적 층위를 전달해 준다. 만약 번스타인에 대한 정보가 없는 관객이라면 한 사람의 인생에 이토록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많았다는 것에 놀랄 것이며, 번스타인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더 깊은 탐구를 필요로 하는 복잡성을 훑고 지나가기에 급급했다며 아쉬워할 것이다.

중간중간 다양한 화면 비율과 흑백 및 컬러 필름의 사용은 이전 시대의 영화적 유산을 떠올리게 하고, 레니(번스타인의 애칭)의 폭발적인 에너지, 그의 지휘 스타일이 갖는 특유의 강렬함, 열락의 경지에 다다른 그가 쏟아내는 땀의 폭포수처럼 내면에서 한껏 부풀어 올라 도달하는 절정의 순간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영화는 우뚝 솟은 최고점, 무너지며 바닥을 치는 지점을 모두 아우르며 예술가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20세기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 바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헌사를 바친다. 반짝이는 천재성과 광기, 사랑과 상실, 창조와 파괴, 신뢰와 배신의 양 극단 사이에서 끝없이 춤춘다.

브래들리 쿠퍼가 가장 공들인 장면인 에딘버러 페스티벌 실황에서 연주한 말러 2번 교향곡 <부활> 마지막 악장의 가사대로 ‘타는 듯한 사랑의 열망으로, 그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는 빛으로, 나는 날아가리’라고 외치는 장엄한 피날레에서 그는 음악 안에서 완전히 연소한 뒤 다른 무언가로 거듭나버린다. 마지막 음표가 사라진 후에도 마음속 흔적이 오래도록 남는 음악처럼, 이 영화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영속적인 유산과 함께 뻔하지 않은 전기 영화로 오래 남을 것이다.
김나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