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까우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마치 자동차의 사이드미러에 적힌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문구처럼 공동체 안에서는 거리 감각을 상실한 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가령 가족과 연인의 품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타자의 시선에서는 낯설게 느껴진다. 한 나라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방인이 보는 시선과 자국민이 보는 시선은 엄청난 격차가 있다. 오해는 언어와 규범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손짓과 발짓, 보편적인 인간이 공유하는 감정들은 이런 격차들을 메운다. 따라서 타지로 향한 이방인의 여행은 오해와 연대가 이어지는 기묘한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
이 기묘한 거리 감각은 특히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두 국가 사이에는 시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행기로 1~2시간이면 오갈 수 있고, 반나절이면 배로도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근접성을 지닌 만큼, 두 국가 사이의 인적/문화적 교류는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활발하다. 일본정부관광국에 따르면 이번 상반기 일본에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 총 31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이는 단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강동원, 이지은, 송강호와 함께 <브로커>(2022)를 연출했고, 미이케 다카시가 OTT 플랫폼을 통해 정해인, 고경표 주연의 드라마 시리즈 <커넥트>(2022)를 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영화에서는 자국과 타국을 오가는, 혹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작품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가깝고도 먼 서로의 나라를 바라보는 낯선 이방인들의 시선에는 미묘하면서도 정교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 이 기사에는 영화 <러브 라이프> 등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른 죽음이 도사린 타지의 풍광
지난 7월 19일 개봉한 후쿠다 코지 감독의 <러브 라이프>(2023)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 사이에는 이른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러브 라이프>의 타에코(키무라 후미노)는 지로(나가야마 켄토)와 재혼에 성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려 한다. 다만 시아버지는 그녀가 전남편 박신지(스나다 아톰) 사이에서 가진 6살 아들 케이타(시미다 텟타)의 존재가 못마땅하기에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케이타의 오셀로 대회 우승과 시아버지가 65세 생일을 기념하여 조촐한 파티를 열었던 날, 케이타는 선물로 받은 비행기를 갖고 욕실에서 놀다가 그만 미끄러져 그대로 익사하게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유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와 행복한 부부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어느 날 오토가 젊은 남배우 고지(오카다 마사키)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가후쿠는 아내에게 이유라도 듣고 싶었지만, 오토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런 이른 죽음은 장률 감독의 <후쿠오카>(2019)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헌책방 주인 제문(윤제문)은 귀신같이 등장한 21살 소녀 소담(박소담)의 손에 이끌려 후쿠오카에 여행을 간다. 우연히 방문한 술집 ‘들국화’에서 28년 전 과 후배 ‘순이’를 두고 사랑 다툼을 했던 선배이자 술집 주인인 해효(권해효)를 만나게 된다. <후쿠오카>에는 직접적인 죽음의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여행을 떠난 세 인물에게서 죽음의 향기를 짙게 느낄 수 있다. 제문과 해효는 서로에게 귀신같이 살지 말라고 핏대를 세우고, 소담은 이따금 어디론가 사라졌다 금세 등장하기를 반복한다. 28년 전 두 남자를 좋아했던 후배 ‘순이’는 자퇴를 한 이후로 그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후쿠오카>의 등장인물들이 반쯤은 죽은 자들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러브 라이프>로부터 <후쿠오카>까지 영화 속 인물들은 일본에서 죽음을 경험하거나, 이미 죽어있거나, 죽음의 죄책감을 이고 살아가고 있다.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실패나 고착의 정서는 한국과 일본을 관통하는 영화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소재다. 이시이 유아의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2021)의 토오루(오다기리 조)는 한국에서 성공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고 친한 동생 츠요시(이케마츠 소스케)를 속이지만, 사실 망하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고 그들은 강릉으로 쫓기듯 떠난다.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의 영화감독 태훈(임형국)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쇠락해가는 도시인 일본의 고조시에 도착한다. 태훈은 영화를 찍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고조시를 돌아다니지만, 좀처럼 진도가 잘 나지 않는다. 마치 그가 방문한 고조시처럼 그가 찍으려는 영화는 어딘가 교착 상태에 놓여있는 모양이다.
꿈과 환상이 교차하거나 연극으로 재현하거나
영화 속 인물이 당도한 죽음 내지는 실패와 고착의 문제 앞에서 인물들은 두 가지 선지로 활로를 모색한다. 꿈과 환상의 세계로 이 문제를 피해 가거나, 연극과 영화를 통해 그 문제를 재현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에서 터무니없이 추하게 생긴 천사의 얼굴이 등장하는 결말은 완벽히 환상의 영역으로 문제를 해소하려는 방식이다. 반대로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유스케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연극을 다른 언어로 풀어내어 각색한 장면은 그가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동경 대지진까지 - 개인으로부터 국가까지 이어지는 - 상흔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수단이기도 하다.
한국의 두 작품인 <후쿠오카>와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중간 지대에 머무르며 연극/영화가 환상의 영역을 관통하는 방법을 택한다. <후쿠오카>에는 정전이 된 술집 ‘들국화’에서 해효와 제문이 촛불을 켜고 술을 마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홀연히 등장한 소담은 두 아저씨에게 자신이 28년 전 ‘순이’를 연기할 테니, 함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가상의 연극을 연기해 보자고 제안한다. 소담은 두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며 서로 행복하게 지낼 방법을 모색해 보지만, 해효와 제문은 서로 누가 더 많이 순이를 만날지를 두고 다투기에 급급하다. 서로의 죄책감을 경감시키는 연극이 끝나자마자, 술집 ‘들국화’에는 다시 전기가 들어온다. 세 사람은 이제는 쓸모 없어진 촛불을 끄려 노력하지만, 촛불은 세 사람의 입김에도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연극으로 ‘순이’를 향한 죄책감을 덜은 두 남자지만, 여전히 이들을 괴롭힘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맺어버린 것이다.
반면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극이 전환점을 도는 장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색이 바뀌는 불꽃놀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의 교착 상태는 해소되고 혜정과 유스케(이와세 료)의 관계가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영화적 재현이 발현되기 전, 태훈은 촬영차 방문한 폐교에서 과거의 죽은 줄만 알았던 어린아이의 환상을 바라본다. 태훈의 영화적 활로는 반대로 환상을 직면한 이후에 개척되기 시작한 셈이다.
언어의 간극과 언어를 뛰어넘는 보편의 수화.
<러브 라이프>는 환상/꿈 혹은 연극/영화의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따금 케이타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마치 한 공간에 케이타가 존재한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있지만, 타에코는 죄책감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환상이 아닌 언어라는 방법을 택한다. 음식을 하는 지로의 뒤편으로 타에코는 케이타와 몰래 수화로 지로를 잘 따라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는 전남편인 박신지가 청각장애를 지녔기 때문이다. 한국인 박신지와 일본인 타에코의 언어적 간극은 수화를 통해 극복된다. 반대로 지로는 수화를 모르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 관계의 이면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언어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오해와 의심을 유발한다. 타에코가 지로를 떠나 신지를 택했지만, 신지 역시 수화로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채 그녀를 속이고 말았다. <러브 라이프>에 환상과 연극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언어를 둘러싼 일시적인 합일(신지-타에코, 타에코-지로)의 순간에도 끝내 인간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시각과 인지의 사각지대를 통해 서로를 온전하게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부부 사이에 지닌 케이타에 대한 죄책감은 해소되었지만, 결국 지로는 타에코의 눈을 마주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반대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장면은 단연 ‘바냐 아저씨’의 무대에서 이유나(박유림)가 수어로 바냐 아저씨에게 생의 의지를 다지는 대사를 표현할 때다. 오로지 정적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모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는 먹먹한 손짓은 유스케와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설원에서 상흔을 인정하는 힘을 부여한다. <러브 라이프>의 언어가 자아내는 단절과 반대로<드라이브 마이 카>의 언어는 전혀 교차하지 않더라도 이 간극을 뛰어넘는 동력을 자아낸다. 이는 <후쿠오카> 속 인물들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로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환상’과는 다르다.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서툰 각자의 언어가 아니라 보편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교차하는 앞선 다섯 작품이 전부 언어와 소통의 문제에 직면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만이 환상과 기적에 기대지 않은 채 묵묵히 허물을 품어낼 수 있던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다. 미사키는 대지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브 900을 끌고 인천에 도착했다.
분명 한국과 일본, 한국인과 일본인, 한국어와 일본어. 이 두 순서쌍은 문화, 역사, 언어, 정서 등에서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서로가 타국을 향해 견지하는 시선은 자국의 것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미묘한 거리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보편의 수화가 아닐까? 이방인의 낯선 관점은 우리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사이드미러의 왜곡된 거리감에 균형을 더할 수 있게 만든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