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

일본 홋카이도의 소도시 '오타루'하면 아직도 '오겡끼데스까'가 떠오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윤희에게>를 보기 전일지도 모른다. 최근 15년 만에 다시 찾은 오타루는 더 이상 <러브레터> '나카야마 미호'의 도시가 아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영화 <윤희에게>의 윤희(김희애)와 준(나카무라 유코)였다. 오타루 운하를 굽어보자 영화 속 두 친구의 해후 장면이 둥실 떠오른다. 긴 세월, 사랑을 유예한 사람들의 호흡과 발걸음에서 묻어나오는 그 애틋함이. 대체 불가라고 여겨졌던, 특정 장소에 고착된 영화적 이미지를 바꾼다는 것은 가히 혁명이다. 게다가 지금껏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한국 중년 여성의 퀴어 서사를 통해서라니. 더 놀라운 것은 배우 김희애는 그런 혁명적 연기를 몇 번이고 거듭했다는 것이다.


김희애의 90년대

#아들과딸 #후남이 #폭풍의계절

<아들과 딸>

고등학생 시절 영화 <스무해 첫째 날>(1983)로 데뷔했지만, 김희애의 초기 커리어는 드라마에 집중된다. 특히 MBC 드라마 <아들과 딸>(1992~1993)에서의 열연은 아직도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귀남'(최수종)의 이란성쌍둥이로 태어난 '후남'으로 분한 김희애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시대에 차별을 딛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의 삶을 눈물과 감동으로 그려냈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6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이 작품으로 김희애는 제29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받기도. 뒤이어 방영한 <폭풍의 계절>(1993)에서도 연기 호평을 받은 그는 故 최진실, 채시라와 함께 90년대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김희애의 2000년대

#내남자의여자 #밀회 #부부의세계 #이게내교양이다 #특급칭찬이야 #놓치지않을거예요

결혼 후 7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김희애는 김수현의 페르소나로 복귀한다. <완전한 사랑>(2003) <부모님 전상서>(2005) <눈꽃>(김수현 작가 원작 소설을 드라마화, 2006) <내 남자의 여자>(2007)까지 연달아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 참여한 것. 특히 “임자 있는 남자 나눠 갖는 여자가 원하는 게 뭘 거 같니? 나누지 않고 혼자 갖고 싶은 거 아니겠니?”라고 쏘아붙이며 희대의 불륜녀로 돌아온 <내 남자의 여자>는 파격 그 자체였다. 김수현 작가 특유의 밀도 있는 대사를 김희애가 맛깔나게 소화하며 11%로 시작된 시청률은 마지막 회에서 38%까지 치솟기도.

그 후 스무 살 어린 제자와의 위험한 사랑을 통해 상류층의 권력 비리와 음악계의 이중성을 풍자한 <밀회>(2014)의 오혜원, 우아함을 사수하며 자신의 능력과 치밀한 계획으로 바람난 남편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리는 <부부의 세계>(2020)의 지선우, 타협을 모르는 인권 변호사와 재벌가의 방패막이로 살아온 전략가의 정치게임을 다룬 <퀸메이커>(2023)의 황도희까지. 김희애는 캐릭터별로 엄청난 낙차를 오가며 예민하게 감정의 본질을 꿰뚫는 동시에 폭발적인 광기를 발산해 참여하는 작품 족족 연기와 화제성 둘 다를 잡는다.

화제성을 증명하는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유행어. 유아인의 볼을 꼬집으며 내뱉은 대사 “이건 특급 칭찬이야”, 13년간 이어진 한 화장품 브랜드의 광고 카피 “놓치지 않을 거예요”에서부터 직접 한 대사는 아니지만 “교양, 내 교양은 이거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와 같은 주옥같은 대사도 상대 배우가 건네는 감정을 훌륭하게 받아내어 명대사 반열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줬다.


김희애의 영화들

#우아한거짓말 #허스토리 #윤희에게

<윤희에게>

드라마를 위주로 연기 활동을 하던 김희애는 <우아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영화계로 눈을 돌려 2017년 <사라진 밤>, 2018년 <허스토리>, 2019년 <윤희에게>로 연달아 관객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1992년부터 98년까지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재판부에 맞선 할머니들과,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실화를 그린 <허스토리>에서 김희애는 관객을 위안부 피해 여성의 이야기로 안내하는 사업가 문정숙을 연기한다. 베테랑에게도 걸쭉한 사투리와 다혈질 캐릭터로 무장한 사업가 연기가 쉽진 않았다. 특히 일본어와 부산어, 2개국어(?)를 연습해야 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부산 사투리가 복병이었다. 그야말로 “입에서 단내 나도록” 사투리 연습을 했고, 영화를 관람한 팬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뒤늦은 '입소문 바람'을 맞기도 했다.

<윤희에게>도 팬덤을 형성한 영화 중 하나다. 오타루 설원과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담담한 편지 내레이션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중년 여성의 퀴어 멜로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10대의 끝 무렵, 사랑을 인정받지 못했던 두 소녀가 20여 년이 훌쩍 지나 재회한다. 특히 윤희(김희애)는 10대 시절에 준(나카무라 유코)을 떠나보내고 가족으로부터 크게 상처받은 이후 쭉 잘못된 단추를 끼우며 살아온 사람이다. 준을 만나기 위해 오타루로 가는 여정은 과거의 상처를 제대로 마주한 뒤 인생의 새로운 단추를 채우기 위함이다. 중년 여성, 퀴어, 혼혈, 담배 피우는 여자들, SF 소설 애호가 할머니, 필름 카메라를 든 고등학생, 천재적인 귀여움을 자랑하는 고양이까지. 섬세하게 나열된 영화 속 취향과 지향은 공동의 관심사를 보유한 관객들을 환호하게 만들었고, 팬덤 '#만월단'이 결성되기도 했다.


다가올 김희애의 새 얼굴

#더문 #8월개봉영화

<더 문>

8월 2일, 김희애의 새로운 얼굴이 공개될 예정이다. 미션 수행으로 달을 향하던 중 고립된 우주 대원과 그를 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더 문>을 통해서다. <신과함께> 시리즈를 통해 기술력과 이야기를 동시에 잡은 김용화 감독의 디렉팅과 설경구, 도경수 등 마치 ‘올스타전’과 같은 출연진으로도 화제를 모은 영화에서 김희애는 NASA 유인 달 궤도선 메인 디렉터 '윤문영'을 연기한다.

빼어난 엘리트임은 물론이고, NASA에서 일하는 인물이기에 영어 대사 또한 챙겨야 해서 걱정이 많았다는 후문. 하지만 매일 아침 6시 전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며 EBS 영어 라디오를 챙겨 듣는, 강남역 영어 학원 목격담이 쏟아지는 그의 성실함은 영화 속 영어 연기를 더 기대하게 만든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