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영화사 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2012년 8월에 설립된 미국의 독립영화 배급/제작사 A24가 아닐까? 아카데미 시즌만 되면 A24의 영화가 유력한 수상 후보작으로 거론되었으며, 지난해 파란을 일으킨 <더 웨일>(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등은 모두 A24의 손을 거쳐 나온 작품이기도 하다. 이들은 매번 기발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들고 오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하며 좋은 작품들을 연이어 만들고 있다. 배리 젠킨슨(<문라이트>), 데이빗 로워리(<그린 나이트>), 샤프디 형제(<굿타임>)처럼 2010년대 가장 주목받는 미국영화계 신성부터 아리 에스터(<유전>), 로버트 에거스(<라이트 하우스>), 데이빗 로버트 미첼(<언더 더 실버레이크>)처럼 신선한 문법으로 장르를 새롭게 재구성한 호러 영화의 젊은 거장들 역시 A24를 거쳐 발굴되거나 잠재력을 폭발시킨 케이스다. 국내에서는 한국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배우상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2020)의 제작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할리우드를 뒤흔들고 있는 2023년 미국작가조합(WGA) 파업 사태에서도 A24는 유일하게 작가 조합이 활동을 이어나간 제작사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5월부터 이어진 WGA의 파업은 7월 미국배우조합(SAG-AFTRA)의 파업으로 이어지며, MCU 영화의 제작부터 <아바타>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 시즌 5 등 할리우드 대작들의 제작과 개봉일이 대거 연기되는 사태로 번졌지만, A24만큼은 타격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이는 영화 제작자와 직원들에게 공정하고 적합한 수당을 지급하고, 창작 과정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A24의 경영방침 덕분이라고 한다. 지난 6월 영화<보 이즈 어프레이드>로 한국을 찾았던 감독 아리 애스터 역시 기자간담회에서 “A24는 아티스트가 가진 창작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한다”며 A24에 대한 강한 지지의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WGA의 파업으로 할리우드는 혼란에 빠져 있지만, A24만큼은 굳건하게 양질의 영화를 만드는 만큼, 올 하반기 미국에서 개봉 예정인 A24의 라인업은 건재하다. 한국 관객들의 맘도 설레게 할 2023 하반기의 A24 라인업은 무엇이 있을지 지금부터 한번 살펴보자!
<프리실라> dir. 소피아 코폴라
<처녀 자살 소동>(1999),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썸웨어>(2010), <매혹당한 사람들>(2017) 등으로 잘 알려진 소피아 코폴라가 이번에는 락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인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 이번 작품은 1985년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자서전 <엘비스와 나>를 기반으로 두 연인 사이의 관계에 집중할 예정이다. <바이스>(2018),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케일리 스패니가 프리실라 역을 맡았으며, 넷플릭스 시리즈 <키싱 부스>에서 남성미를 발휘한 노아 플린 역으로 화제를 모았던 제이콥 엘로디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기한다. 미국에서는 10월 개봉 예정이라고.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 dir. 조나단 글래이저
최고의 비주얼리스트가 10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왔다. 2013년 <언더 더 스킨>으로 A24 초창기 큰 화제를 몰고 온 조나단 글래이저가 10년 만의 장편<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통해 다시 한번 A24와 호흡을 맞췄다. 이미 제76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쥐며, 생애 첫 3대 영화제 경쟁 부문 수상의 쾌거를 이뤄낸 이번 작품은 유수의 영화 매체에서 경쟁부문 작품 중 가장 높은 별점을 부여하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부풀게 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배치된 나치 장교가 수용소 사령관의 아내에게 반한다’라는 강렬한 시놉시스는 조나단 글래이저만의 비주얼로 어떻게 홀로코스트와 멜로드라마를 엮어낼지 호기심을 유발한다. <토니 에드만>(2016), <인 디 아일>(2018)로 주목받은 산드라 휠러가 사령관의 아내 헤드비히 회스 역을 맡았다. (산드라 휠러는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학>(2023)에도 출연하며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심사위원대상 작품에 모두 주연을 맡은 배우가 되는 영예를 얻었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올해 12월 전미 개봉을 앞두고 있다.
<딕스 더 뮤지컬> dir. 래리 찰스
A24의 파격은 초창기부터 유명했다. 창립 첫해 극한의 호불호를 자랑하는 ‘퍽-큐 시네마’의 대표주자 하모니 코린과 함께 <스프링 브레이커스>(2012)를 제작했고, 해리포터로 유명한 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방귀쟁이 시체로 만들어버린 <스위스 아미 맨>(2015) 역시 A24만이 시도할 수 있는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올해 A24의 문제작은 아마 래리 찰스의 <딕스 더 뮤지컬>이 아닐까? <앙투라지>, <커브 유어 엔수지애즘>등 2000년대 미국 드라마의 촌철살인 유머를 담당한 래리 찰스가 7년 만에 장편 영화를 제작한다. 이미 <독재자>(2012), <브루노>(2009), <보랏>(2006) 등 사샤 바론 코헨을 앞세워 미국 사회에 대한 풍자의 정점을 찍은 그의 블랙 코미디가 <딕스 더 뮤지컬>에서는 한계를 뚫고 폭발했다는 코멘트가 들린다. 심의에서 R 등급을 받은 만큼 고수위의 유머들로 가득 찰 예정인 <딕스 더 뮤지컬>은 빌보드의 스타 메간 더 스틸리온의 조연으로 합류하며 화제를 모았다. 9월 29일 문제작의 실체가 미국에서 먼저 공개될 예정이다.
<디 아이언 클로> dir. 션 더킨
혹시 폰 에릭 패밀리라고 알고 있는가? 혹은 프리츠 폰 에릭이나 케리 폰 에릭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만약 당신이 WWE를 즐겨보는 레슬링 매니아라면 이 이름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칭 200kg의 악력으로 상대의 머리를 쥐어 짜내는 극악무도한 기술 ‘아이언 클로’는 프로레슬링 역사에 오랫동안 회자되는 상징적인 기술 중 하나다. 이 기술의 창시자 프리츠 폰 에릭은 나치 기믹을 활용해서 악역을 맡았고, 1982년까지 오랜 기간 레슬러의 커리어를 이어 나갔다. 그의 기술 아이언 클로만큼 회자되는 것이 바로 그의 가족 ‘폰 에릭 패밀리’인데, 션 더킨 감독의 <디 아이언 클로>는 바로 이 ‘폰 에릭 패밀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요절한 장남을 제외한 5명의 아들과 프리츠 폰 에릭은 ‘폰 에릭 패밀리’라는 가족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며 2009년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가족에게는 연이어 비극이 찾아왔고, WWE 스타 중 하나였던 사남 케리 폰 에릭은 33살의 이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로맨틱 코미디 스타인 잭 에프론이 케리 폰 에릭 역을 맡은 <디 아이언 클로>는 올해 12월 와이드 릴리스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레슬링의 추억이 담긴 8, 90년대생 레슬링 팬들에게는 이들의 이야기가 꽤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전생> dir. 셀린 송
올해 국내에 개봉할 기대작 중 하나로 꼽히는 셀린 송 감독의 <전생>은 이미 지난 6월 미국 뉴욕과 LA에서 리미티드 개봉한 작품이다. 유태오와 그레타 리가 주연을 맡았으며, <퍼스트 카우>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존 마가로와 <비밀의 언덕>의 주연인 문승아 배우도 출연한다. 유년 시절 한국에서 알게 된 노라와 해성이 노라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며 헤어졌다가, 20여 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전생>은 CJ ENM과 A24 공동 제작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국내 개봉은 하반기에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높은 만큼, A24가 <미나리>, <애프터 양>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계 미국인 감독들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