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병헌은 여태 잘 안 쓰던 연기 근육을 쓴다. 말과 말 사이,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그건 엄태화 감독의 주문에 따르면 ‘수리수리 마수리’ 같은 주문을 외워 달라는 요구에 응해 고안한 것들이다. 혹은 모두가 방심하는 사이, 동작과 동작 사이에 작은 웃음을 흘리듯 심어 놓는다. 마치 실수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은 미세하게 계산된 장치들이다. 작은 동작 하나까지 들키기 십상인 대형 스크린에서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요소가 되어, 발견의 기쁨을 준다. 그렇게 이 숨어있는 1mm의 연기가 그의 연기를 또 한 번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이병헌의 연기는 늘 치밀하다.

이병헌은 매 작품 자신의 연기 상한선을 갱신하는 배우다. 그는 ‘잘 하는 연기’를 더 잘 해내는 방식을 떠나, 관객에게 익숙함으로 기대려 하지 않는다. 매 작품 ‘이병헌’에 종속되길 거부하고 자신의 연기를 리셋하는, 그래서 패턴이 읽히지 않는 배우다. 치밀함을 넘어선 타고난 그의 연기 감각이 만드는 차별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병헌이 연기하는 ‘영탁’은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서울, 유일하게 붕괴되지 않은 황궁아파트에 사는 입주민 중 한 명이다. 뒷모습부터 등장한 그는 불이 난 아파트에 냅다 호스를 들고 뛰어가 불을 끄는 ‘착한 이웃’처럼 보이다가, 무언가 비밀을 숨긴 듯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경계 대상’으로 변모해 나간다. 아파트 주민들이 자기들 멋대로 영탁을 이렇게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으로 재고 판단하고 활용하는 동안, 영탁은 이곳에 기생해 자신의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어리숙했던 그는 ‘완장’을 찬 후로 정말 권력 놀이를 하고 아파트 주민을 통제하고 공포에 빠뜨리는 인물이자, 130분 동안 끊임없이 변모하는 이 영화의 서사이자 장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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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가 원작인데요(그 중 2부 <유쾌한 이웃>을 영화화했다). 출연을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원작은 안 봤어요. 시나리오만 봤는데, 큰 재난이 일어나서 세상이 다 무너졌는데 우리 아파트 하나만 남아있다는 얘기만 딱 듣고 ‘우와, 그거 되게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초반의 설정 자체가 되게 많은 가능성들이 열려있고 그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두근두근했죠. 그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다 드러나잖아요. 누구 하나가 절대 선도 아니고 절대 악도 아닌 상식적인 선에서 서로 규칙을 정하고 살지만, 갈등이 생기면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나잖아요. 상황은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나라도 저럴 것 같아’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이 영화를 ‘재난 영화’라는 장르로 규정하지만, 재난보다 더 무서운 게 결국 인간인 거죠.

기자시사 때 재난 장르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담은 휴먼 블랙 코미디라고 하셨는데요. 이 작품에서 블랙 코미디가 주는 재미를 먼저 느끼셨을 것 같아요.

블랙 코미디를 참 좋아해요. 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되게 오래간만에 느끼는 거 같아요. 어떤 장르가 되게 성공하다 보면, 그게 계속 유행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블랙코미디는 요즘은 많이 없죠. 그래서 이런 영화를 쉬이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는 ‘와, 이거 진짜 되게 새로운 정서의 영화다!’라고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 되면 좋겠죠.

<콘크리트 유토피아>

익히 알고 있는 모습과 또 달랐어요. M자 머리에 옆으로 뻗은 머리, 검댕을 한 얼굴까지, 처음엔 어리숙하고 웃기게 보이다가, 점점 기괴해지는 영탁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스타일링이에요.

분장팀하고 같이 대화하며 만들었어요. 굵고 뻣뻣한 머리가 옆으로 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분장팀이 이야기하는데 듣자마자 재밌겠다 싶었어요. 그러면서 양쪽에 M자가 약간 보일랑 말랑 살짝 있는 느낌이면 어떨까. 그렇게 해 보니까 새롭게 느껴지는 내 얼굴이 보여요. 영탁이가 이래야 된다는 정답은 없지만, 왠지 영탁이 같은 느낌이 드는 모습을 계속 찾아간 것 같아요. 후반부로 갈수록 양옆 헤어가 곤두서는데요. 권력에 취해가면서 스타일도 좀 수사자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평생 패배자로 살던 남자가 리더가 되고 완장을 차면서 변해가는 거죠. 눈빛도 보면 나중에는 핏발이 서 있어요. 그냥 미쳐가는 거예요. 나중에 그 소리치는 장면에선 ‘내가 저랬나’ 싶을 정도로 좀 이상하기도 했어요. 주변에서 다들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영탁은 부동산 사기를 당한 적도 있는데요. 그런 ‘내 집 마련의 꿈’이 영탁을 폭주하게 만들죠. 영탁이 변모하는 가장 큰 동력을 무엇이라고 봤나요.

억울함이라고 봤어요. 영탁이라는 인물 자체가 사기꾼한테 모든 걸 다 잃은 사람으로 시작하잖아요. 가족들은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빚쟁이들한테 시달리고 있고, 그런 우울한 상황 속에서 돈을 받으러 왔다가 재난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사람의 인생 자체는 분노와 억울함이 베이스에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그 모습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영탁이 마을 주민대표로 선출된 후, 점점 권력의 자리에서 자경대 노릇을 하며 변해가는 과정에서 감정 변화의 폭이 커지는데요. 재난 후 ‘보통 사람’의 변화라고 보기에, 영탁의 감정과 행동은 정도를 벗어난 것처럼 보여요. 이 부분을 어떻게 설득하며 연기해 나갔나요.

이렇게까지 과해도 될까, 이렇게까지 이 상황에서 꼭 화를 냈어야 되나, 하는 그런 의문이 있죠. 영탁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극단적인 감정을 토해내는 상황이 몇 번 있잖아요. 특히나 사건을 저지르고 구역질을 하면서 대사로 표현을 하고 그걸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 되는 데까지 저 역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요. 그 부분에서 어떻게 나를 설득시켰냐면, 영탁의 억울함과 분노와 화가 나의 이성의 끈을 다 놔버릴 만큼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서는 자아가 자아를 잃을 만큼 이성을 놔 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과 표현이 나올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던 거죠.

<콘크리트 유토피아>

그만큼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낯선 이병헌의 얼굴과 표정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라는 현실의 인간과 캐릭터 사이에서 연기할 때, 캐릭터가 나랑 이런 면은 되게 비슷한 것 같다, 혹은 어떤 말이나 선택을 보면, 이건 나라도 이렇게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공통분모가 분명히 조금씩 있어요. 그런데 영탁은 정말 나랑 완전히 다른 인간이에요. 그래서 영탁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좀 힘들었어요. 물론 상황을 보면서 이해되는 부분은 있죠.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영탁을 고려하면서 조금씩 이해해 나간 거죠. 지금은 영탁이 낯설거나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이 아니에요. 진짜 힘들었죠. (웃음)

그 변화를 담아낸 배우의 스펙트럼이 결국 이 영화의 장르와 서사, 그리고 긴장감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완장’을 찬 영탁의 살벌한 이미지가 나오기까지, 초반부의 영탁은 친근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죠. 이병헌의 연기 변화로 영화의 정서마저 달라지는데요. 영화의 초반, 아파트에 불이 나자, 솔선수범하듯 불구덩이로 달려드는 모습에서는 ‘선하고 이타적인’ 모습이 강조되는데요. 이후 ‘영탁의 가면’ 연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설정한 건지, 그 지점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컸을 것 같아요.

첫 등장이 가장 고민스러웠어요. 아파트에 불이 났을 때 남의 집이지만 불을 끄러 가는 영탁의 뒷모습을 보는 것부터 시작할 때, 저는 영탁이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아닌 상태라고 생각했어요. 일련의 사건들로 영탁은 절망의 끝에서 무기력하게 숨만 쉬고 있는 상태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영탁의 시선에서 본 불난 집은 큰 의미를 가지는 거죠. 그 장면은 영탁에게 아파트 한 채에 대한 의미가 어떤 건지 보여주는 무의식적인, 조건반사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순간적으로 여긴 내가 살아야 될 내 집이니까 일단 끄고 보자는 생각인 거죠. 그렇게 불을 끄고 난 후에 멍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영탁이 되게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사람 같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때의 영탁은 사실 자기 정신이 아니었던 거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얼떨결에 주민 대표가 돼요. 그리고 아파트 부녀회장(김선영)이 회의하면서 우리 모두 ‘리셋됐다’면서 ‘이제 살인범이나 목사나 똑같은 세상’이니 ‘이제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순간 카메라가 저한테 잠깐 포커스가 와요. 그 장면에서 영탁이 아무것도 안 하지만, 응? 뭐? 이런 표정만으로도 그가 가진 상황을 전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거죠.

이병헌의 캐릭터 설계에 관해 엄태화 감독이 “이병헌을 만나고 영탁이 입체적으로 됐다"라는 말을 했는데요. 영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살을 붙여 나간 부분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감독님과 나눈 대화들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한 가지 분명하게 염두에 둔 건, 영탁이 극단적이고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우리가 상식선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보통 사람’처럼 그리자. 다만 영탁은 굉장히 루저이고 인생 자체가 되게 우울한 사람이죠.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집 하나 마련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것마저도 사기를 당해서 절망적인 상황 속에 처하죠. 그런 절망감을 안고 축 처진 소시민으로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신분 상승이 이 사람을 자꾸 변하게 만들고, 나중에는 권력의 맛을 조금씩 보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재미있을 거라 봤어요. 그처럼 기본적으로 영탁은 보통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다,라고 계속 상기하며 연기했죠.

<콘크리트 유토피아>

마을 주민들 앞에서 윤수일의 노래 ‘아파트’를 부르는 장면이 가진 힘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영탁의 변화를 보여주며,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한데요. 연출, 연기, 촬영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진 명장면이었어요.

시나리오에서도 가장 궁금한 장면이었어요. 완성 버전을 보니 역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죠. 당연히 콘티에 다 있었어요. 마을 잔치 때 사람들이 어느 정도 흥건하게 취한 상태에서 다들 기분 좋게 놀고, 노래 하나 부르라고 해서 부르다가 노래방 화면이 플래시백 장면으로 들어가고, 다시 카메라가 들어가면서 영탁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갔다가, 다시 쫙 천천히 빠져나오면서 분위기가 굉장히 급격히 전환돼요. 콘티에 충실하게 연기했고, 저도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영탁이 음악에 맞춰 추는 막춤이 압권이죠. (웃음)

제 후배 중에 그런 아재 춤을 잘 추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한테 좀 배웠어요. 내 앞에서 몇 번 좀 춰보라고 부탁을 해서, 그걸 따라 한 거예요. (웃음)

그 신 자체는 몇 테이크나 촬영했나요.

세 번 정도? 별로 안 찍었어요. 노래를 부르면서 촬영해야 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맞춰야 하는 장면이었어요. 근데 정작 상영 버전에서는 테스트 컷을 사용하셨더라고요. (웃음) 리허설 장면에서 그게 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거였어요. 엄태화 감독님의 디렉팅 스타일을 보면 불필요한 말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되게 불친절한 디렉팅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촬영이 계속되면서 그게 그분 나름의 확고한 룰이라는 걸 알게 되죠.

<콘크리트 유토피아>

다양한 영화를 경험해 보셨는데요. 그런 장면을 해냈을 때, 현장에서의 만족도가 클 것 같은데요.

그렇죠. 하지만 완성된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 전까진, 그게 다 짐작일 뿐이죠. 내가 촬영하며 느꼈던 감정을 관객도 느꼈으면 좋겠다, 하는 확신을 가지려고 무진장 애를 써요. 그래서 그러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도 있죠. 나는 이런 의도로 연기했고, 감독님은 거기에 또 어떤 의도를 담으려 했는데, 그것이 결국 만족스럽게 하나로 완성된 순간에도 과연 우리의 의도가 100퍼센트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늘 있죠. ‘그래, 관객에게 잘 전달됐을 거야!’라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맞는 거야’ 하는 확신 말이에요.

기자시사회 후 호평이 많은데요. 그만큼 관객과의 만남에 기대가 클 것 같아요.

처음 시나리오 읽을 때도 되게 신났었고 촬영하면서도 너무 재미있었어요. 결과물도 굉장히 마음에 들고요. 코로나 때문에 관객과 만나기까지 시간이 좀 오래 걸렸는데, 오히려 그 기다리는 시간이 우리한테 득이 된 것 같아요. 감독님이 후반작업에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나더라고요. 전 네 번 봤는데, 볼 때마다 편집과 음향이 계속 진화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우리 영화의 정서가 진짜 긴장감 넘치는 가운데 계속 피식피식 웃게 되는 정서로, 어느 영화보다 서늘하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웃음)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런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 사람 입장도 이해되고 저 사람 입장도 이해돼서 다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영화요.


이화정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