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황궁아파트

영화관에서 우리는 ‘소리’를 경험한다. 표준 5.1 채널이든 사운드 특화관이든 상영관에서 듣는 소리는 왜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되어준다. (보통 가정집에서 상영관만큼 최적화된 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소리’ 때문에 꼭 극장에서 만나야 할 여름 블록버스터이다. 영화 전반부를 압도하는 것은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른 ‘봄의 소리 왈츠’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다 같이 출연해 찍은 아파트 광고의 배경 음악처럼 사용되어 긴 여운을 남긴다.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가 남긴 만년의 걸작인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 아파트 광고 같은 영상을 떠올리며 음미해 보기 바란다.


종달새가 높고 푸른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훈풍은 나직하게 다가옵니다.

행복하고 온화한 바람이 깨어나

들판과 초원에 키스합니다.

봄이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아, 모든 고통이 끝날 수 있습니다.

슬픔은 전부 멀리 도망쳤으니까요.

고통은 부드럽고 즐거운 무언가로 화하고

행복에 대한 믿음을 다시 가져봅니다.

빛나는 햇빛이 이제 틈새로 들이닥칩니다.

아, 모두 웃음으로 깨어납니다.

노래가 샘물처럼 흘러갑니다.

너무 오래 침묵하는가 싶었으나

다시 순수하고 밝은 소리가 들립니다.

나뭇가지의 달콤한 속삭임!

이미 나이팅게일이 부드럽게 부르는

첫 음표가 들려옵니다.

여왕을 방해하지 않도록

모든 가수 여러분! 쉿! 조용히 합시다.

곧 그녀의 달콤한 음색이 더 풍성하게 들릴 것입니다.

나이팅게일의 노래, 달콤한 소리

사랑이 타오릅니다.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한없이 다정하고 황홀한 듯

애도하는 듯한 노랫소리가

달콤한 꿈 속 무거운 마음을 달래 줍니다.

한없이 부드럽게!

그리움과 열띤 갈망이

내 가슴에 있습니다.

그녀의 노래가 손짓할 때,

별처럼 먼 곳에서 반짝이는 당신

달빛이 마법처럼 빛을 발하다

계곡으로 쏟아집니다.

밤이 거의 사라지지 않을 그 순간

종달새가 갓 깨어나 노래하고

빛이 말해줍니다.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질 것이라고.

봄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립니다.

아, 달콤한 소리!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 곡을 부르는 소프라노 조수미의 최고 전성기 시절 목소리는 그저 찬란하게 빛난다. 눈부시게 빛을 뿜어내는 보석의 찬란함에 잠시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처럼, 경쾌한 왈츠 선율에 실린 30대 조수미의 콜로라투라(coloratura) 기교는 무용수의 춤처럼 듣는 사람을 단숨에 홀리고 완전히 압도한다. 콜로라투라란 18-19세기 오페라의 아리아 등에 즐겨 쓰인 선율 또는 그 양식으로, 화려한 음형과 복잡한 장식음, 혹은 그러한 선율 양식의 악곡을 노래한다. 복잡하고 장식이 많을뿐더러 화려한 소리를 내기에, 정확한 음정을 짚을 수 있는 능력과 안정적인 호흡이 요구되며 소프라노 중에서 가장 높은 성역의 소리를 낸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가 대표적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곡이다.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절대 권능이 깃들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듯 성스럽기까지 하다. 춤에 걸맞은 3박자의 왈츠 선율에 만년의 원숙한 작곡가가 얼핏 듣기 좋은 멜로디로 숨겨놓은 초절정의 기교는 소프라노들에게는 난제와도 같지만 조수미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어려운 곡을 수월하고 편안하게 소화해낸다. 인간이 아닌 마치 신화 속에나 등장하는 초월적인 존재, 혹은 신으로부터 유일하게 선택받은 누군가만이 낼 수 있는 소리로 찬란한 빛이 이 곡에 깃들게 한다. 청각을 통해 조수미의 찬란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초월적인 기교로 펼쳐지는 봄을 향한 설렘과 기대를 듣는 와중에 시각적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혹한의 추위 속에서 부족한 물자 앞에, 처참함을 견디며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먹고 배설하는 욕구를 가장 바람직하게 해결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영상이다.

‘봄의 소리 왈츠’를 노래하는 조수미


※ 이하 내용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캐릭터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찬란하고 눈부신 조수미의 목소리에 대응하는 것은 후반부에서 정점에 도달하는 이병헌의 연기다. 선악은 ‘가 혹은 불가’를 투표할 수 있는 도구인 흑백의 바둑돌처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서사라면 더욱 그러하다. 억울한 사기극의 피해자에서 순식간에 잔인한 가해자가 되는 것이나, 인간성을 잃어버린 듯 가차없다가 다음 순간 너그러운 포용력을 지닌 리더가 되어 모두를 이끌 수 있는 것 모두 한 사람일 수 있다. 얼핏 불가능한 듯한 지점을 이병헌의 경지에 오른 연기 덕에 우리는 납득하게 된다. 이토록 다층적이며 양면성을 지닌 존재라는 인간에 대해 우리는 한 차원 더 이해할 수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영탁(이병헌)

지금까지 그가 등장했던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과 얼굴 근육의 움직임으로, 다양한 결의 목소리로, 한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연기력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장악력으로, 이병헌은 스크린을 온전한 자신의 영토로 정복해버린다. 영탁이라는 인물을 지지하고 그의 편이 되어 절규와도 같은 선언(내가 김영탁이라는)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놀라운 설득력은 전성기의 조수미 목소리처럼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는 듯한, 우리를 사로잡는 이병헌의 연기 덕분이다. 그가 한계 없는 기교를 뽐내는 소프라노처럼 스크린을 장악하는 동안, 나머지 배우들과 섬세하고 아름다운 미장센이 오케스트라 반주처럼 정교하고도 풍성하게 그가 가장 빛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준다.

‘A.P.T (아파트)’가 실린 윤수일밴드 2집(왼쪽), KBS <가요톱텐>에서 ‘아파트’를 부르는 윤수일

모두에게 익숙한 ‘아파트’를 부르는 영탁은 노래와 함께 눈을 감고 순식간에 지진으로 아파트가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간다. ‘봄의 소리 왈츠’ 가사를 뒤늦게 구현하는 듯 펼쳐진 잔치판에서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애정과 자부심이 장작불처럼 불타오르는 와중에 노래가 울려 퍼진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를 노래하던 이병헌의 이후는 가사 없이 멜로디로만 들려오는 ‘즐거운 나의 집’이 함께한다.

온통 잿빛이던 세상에 ‘빛나는 햇빛이 틈새로 들이닥쳤’고, 명화는 홀로 깨어났다. 노래 가사대로 ‘행복에 대한 믿음을 다시 가지고, 모두가 웃음으로 깨어날’ 수 있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선물처럼 담긴 황홀한 조수미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를, 극장에서 꼭 만나시기를 바란다.


김나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