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영어로 Utopia라고 표기한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Ou (no)와 topos (where)의 합성어로 알려져 있다. 즉, 아무 데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같은 발음인 Eu (good) topos (place)와는 상반되는 느낌을 풍긴다. 덕분에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지만 누구나 꿈꾸는 곳이 된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의 배경이 되는 황궁아파트는 실은 서울의 기준에서 보면 '상류층'의 거주지는 아니다. 그러나 황궁아파트를 제외한 곳이 모두 무너지자, 과거엔 고급 단지였던 아랫마을의 드림팰리스 아파트 거주민들과 입장이 바뀐다. 그리고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집단이기주의는 무럭무럭 꽃 피어 황궁아파트를 유토피아로 새로이 탈바꿈한다. 오직 아파트만을 일종의 종교라 여기는 곳에서 상정할 수 있는 기막힌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실은 아파트라는 것이 그렇다, 미국 해안이나 유럽 대도시의 구시가지와 고급 거주지처럼 구역이 확실한 지역엔 아파트가 거의 없다. 부유층은 2층짜리 주택 단지에 살거나 소수 단지 내 대저택에서 생활한다. 그들에게 아파트란 닭장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홍콩, 도쿄, 뉴욕은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어마어마한 아파트값을 자랑한다. 서울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한국의 아파트란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인해 감가상각이 거의 되지 않는 기적의 현물 자산이다. 거기에 전세라는 기이한 제도와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가 (아파트 형태의) 집이 가지는 위용을 더욱 단단하게 해준다.
유토피아에 사는 주민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 여기며, 기꺼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재난 이후의 황궁아파트 주민들. 그러나 투표를 통해 외부인을 쫓아내는 결정을 할 때는 흑백의 바둑돌처럼 이분법적인 사고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쫓아낸 외부 사람들을 바퀴벌레라고 부르며 배척한다. 그러나 통조림을 주우려 구석에 손을 넣을 때 와르르 달려드는 바퀴벌레처럼, 아파트 주민들은 그들을 완전히 떼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집단이기주의의 탈을 쓴 개인의 이기심은 재난 이전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를 둥둥 떠다니게 된다.
관객은 황궁아파트의 주민 혹은 드림팰리스 주민이 되거나 그 경계선에서 이 사건들을 지켜보게 된다. 즉, 한정된 자원을 나눠주면 망한다고 믿는, 공동체의 배타적 행위에 가담할 것인가. 혹은 도균(김도윤)이나 명화(박보영)처럼 그러지 말고 모두가 공생하는 길을 찾는 것에 무게중심을 둘 것인가 하는 고민의 답을 선택해야 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그 간택을 종용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그저 바라보게만 만들지도 않는다. 명화와 그의 남편인 민성(박서준)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그림자다. 집이 전세나 월세냐고 공격적으로 묻는 아파트 주민에게 당당히 자가라고 주장할 수 있는 부부. 이로써 국토의 11%인 수도권에 인구 51%가 거주하며 전체 인구의 52%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보기엔 이미 빠져나갈 옵션이란 없는, 외면조차도 무책임이 되는 일종의 배틀로얄이 펼쳐지는 것이다.
실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기까지만 재난물이다. 보통 재난 장르에선 미증유의 재난을 동반한다. 영화는 첫 재난이 터진 이후, 곧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그다음 재난의 세계로 안내한다. 계층에 대한 열망으로 설명되는 그 두 번째 재난은 곧 스크린을 뚫고 나와 우리에게 투영되며, 계급을 나누지 않고는 도통 견딜 수 없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엉큼하며 은밀한 실생활을 들춘다. 황궁아파트의 집단이기주의는 공동의 비호라는 명목 아래 계속해서 커간다. 아파트의 잔칫날에는 윤수일의 명곡 '아파트'를 부르며 서로의 돈독한 유대감을 다진다. 그러나 욕망처럼 타오르는 장작불에 비쳐 아파트의 벽에 그려진 그들의 그림자는 이미 악마를 보는 것 같다.
또 다른 반영
큰 부자가 되려면 주식을 하라고 했다. 이에 반해 부동산은 어느 정도 선까지 올려주는 기능을 하다 보니, 중산층에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꿈의 경유지가 됐다. 그러나 그 중간점은 목표가 된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집은 그 퀄리티에 따른 소유가 직위나 격을 상징하게 됐고, 일단 가졌다 하면 자신의 순위를 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배격의 태도를 심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영탁(이병헌)에게 어렵지 않게 이입할 수 있고 그를 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그는 원래 황궁아파트에서 생활할 예정이었으나 사기를 당한다. 명화네 부부가 대부분의 관객이 거쳐가는 관문이라면, 영탁은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가장 잘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 단단한 마음은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만나 날개를 단다.
우리는 그가 바퀴벌레라 불리는 외부인을 내쫓고 식량을 갈취할 때, '나라도 저렇게 할 것 같다..'라는 엉큼한 자신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다는 유토피아의 모순을 잔뜩 짊어진 영탁은 내, 외부에서 근본적으로 터져 나오는 불만을 잠재우지 못하고 자신의 집(이라 믿는 장소)에서 잠자듯 최후를 맞이한다. 이런 캐릭터를 바라보는 연출자의 태도는 어떨까?
구원받는 사람
명화는 민성의 죽음을 맞이할 때 처음으로 햇빛을 본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은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따스하게 너울거린다. 이후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과는 달리 어떤 구분을 짓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다. 아무런 희생 없이 명화에게 음식을 주고 머무를 곳을 주는 사람들. 그들은 마치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서는 거취도 스스로 정하면 되고, 다른 외부인들에게도 식량을 배분한다.
진짜 유토피아 같은 그 거처는 아파트가 쓰러져서 생긴 곳이었다. 그곳은 밖에서 보면 마치 평등을 상징하는 듯한 수평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똑바로 서있는 아파트가 아닌, 180도의 시선 교체를 통해 바라보라는 연출자의 마지막 미장센이라 할 수 있다.
명화는 끝까지 대립이 아닌 화합을 요구했다. 적어도 그것이 재난을 이기는 진짜 방법이자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를 실존하게 하는 힘이 될는지도 모른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