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에게 고집은 필요충분조건일까? 봉준호는 ‘봉테일’이라고 불릴 만큼 한 프레임 안에 담길 모든 요소를 빠짐없이 점검한다. 이런 봉준호도 혀를 내두른 감독은 바로 데이비드 핀처다. 핀처의 책상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질서 정연했다는 봉준호의 인터뷰는 핀처가 구성하는 화면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디악>(2007) 당시 17번 테이크에서 핀처가 대뜸 컷을 외치더니 책장의 책 한 권을 1인치 정도 옮기고는 다시 촬영을 재개했다는 마크 러팔로의 목격담은 유명하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어떠한가? 그는 <싸이코>의 가장 유명한 욕실 시퀀스를 가장 정교하게 찍기 위해 1주일 동안 동일한 장면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77번이나 촬영했다고 전해진다. 모든 거장이 강박과 고집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고집과 강박이 작품의 완성도와 미학적 가치를 배가시키는 데에는 분명히 기여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현재 상업 영화계에서 가장 강박적이고 급진적인 연출적 고집을 고수하는 감독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름이 모든 이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놀란의 고집 혹은 강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IMAX 카메라를 상업 영화계에 처음으로 도입한 이후 70mm IMAX 필름 촬영을 고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과 컴퓨터 그래픽을 지양하며 최대한 실제 촬영으로 폭파와 화재 등의 장면을 담으려는 점이다. 특히 <다크 나이트>에서 등장하는 조커의 병원 폭파 장면, <인터스텔라>의 옥수수밭을 불태우는 장면, <테넷>에서 보잉 747기가 그대로 공항의 격납고를 들이박는 장면은 단 하나의 컴퓨터 그래픽 없이 그대로 폐건물과 옥수수밭 그리고 비행기를 구입하여 찍은 장면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너무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8월 15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펜하이머> 역시 놀란 특유의 연출상의 고집과 강박이 여러 독특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지금부터 놀란의 <오펜하이머> 속 그가 원칙처럼 고집했던 세 가지 지점을 알아보자!
후시녹음을 거부하다
통상적으로 영화 촬영 현장에는 무수히 많은 잡음이 존재한다. 단순히 스태프 한 명이 내는 기침 같은 통제 가능한 소리부터,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특수효과 장비들이 돌아가는 소리까지, 민감한 붐마이크라면 어느 정도 잡음이 섞이기 마련이다. 이런 영화 촬영 현장의 고충을 상쇄시키는 방법이 바로 후시녹음이다. 배우들은 촬영이 끝난 이후 추가적으로 미비하게 전달되는 대사나, 잡음에 묻혀 지워진 음성의 부분을 재녹음하여 현장의 아쉬운 음향을 보충한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지난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후시녹음을 통한 배우들의 대화 장면 보충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미 지난 2020년 공개한 <테넷>에서 유달리 닐(로버트 패틴슨)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자주 제기되었다. 이번 <오펜하이머>는 특히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방대한 대사량으로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시녹음 없이 오로지 IMAX 카메라와 마이크에 담긴 촬영본을 그대로 영화에 사용했다고 한다. 놀란이 자주 사용하는 70mm IMAX 필름 카메라는 무게만 35kg가 넘고, 촬영 당시 소음 문제가 크게 대두됨에도, 놀란은 온라인 매체 ‘Insider’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후시녹음을 거부하는 원칙을 세운 이유를 밝혔다. 그는 ‘후시녹음 대신 촬영본은 최종본으로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예술적 결정’이며, “IMAX의 발전된 카메라 기술이 지난 15년간 소음 문제를 꾸준히 해결해 오며 잡음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있다”라며 IMAX 카메라의 기술 발전의 손을 들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장면 배제
<오펜하이머>의 핵심적인 사건은 결국 오펜하이머가 리처드 파인먼, 에드워드 텔러, 버니바 부시 등 다양한 과학자들을 한데 모아 실행한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과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이다. 영화를 보거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잘 알고 있겠지만,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한 발, 3일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한 발 투하되었다.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건을 오펜하이머는 16시간이 지난 뒤에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듣게 된다. 평생 오펜하이머의 삶을 따라다닐 윤리적 고뇌와 죄책감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표한 의문은 오펜하이머와 원자폭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는 단 한순간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와 관련된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미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아카이브 푸티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놀란 정도 되는 감독이었다면 직접 로케이션 촬영 또한 가능했음에도 놀란은 해당 장면을 촬영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놀란은 지난 7월 오펜하이머 프리미어 시사회에서 밝히기를 해당 장면을 촬영하지 않은 이유는 “영화가 특정 인물(오펜하이머)의 주관적인 관점만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오펜하이머는 폭발 16시간 후에야 원자폭탄의 투하 소식을 접한 만큼, 그의 시점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공간은 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펜하이머>에서 컬러 장면은 오펜하이머의 시점을, 흑백 장면은 오펜하이머와 대비되는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시점을 드러내는 방식을 빌리기도 했다.
CG의 힘 없이 연출한 폭발 장면과 아원자 세계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은 컴퓨터 그래픽은 최대한 지양한 채로 현장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구현하기를 선호하는 감독이다. <인셉션>(2010)에서 무중력 상태의 호텔 방을 구현한 장면이나, <테넷>에서 드러나는 서로 다른 시간의 공존 등은 놀란의 손을 거치면서 CGI를 최소한으로 사용한 채 실제 카메라에 담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다룰 세계는 단순히 거대한 원자폭탄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영역인 아원자의 형상을 담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오펜하이머>의 초기 각본 단계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가장 먼저 영화의 VFX를 담당하는 앤드류 잭슨에게 각본을 보여주며 촬영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잭슨은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애를 먹은 장면 중 하나가 오펜하이머의 정신적 세계에서 가시화되는 원자들의 형태와 운동을 카메라로 담는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오펜하이머>의 첫 30분간 자주 등장하는 원자의 순환 궤도 모형은 잭슨을 비롯한 VFX 팀이 사전 제작 기간 탁구공을 함께 부수는 것부터 벽에 페인트를 던지는 것, 그리고 발광 마그네슘 용액과 다른 액체들을 뒤섞는 등의 실험을 통해 미세 입자 요소들의 광범위한 운동을 아이폰과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했다고 한다. 또한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는 트리니티 실험의 원자폭탄 폭발 장면은 휘발유, 프로판, 마그네슘과 알루미늄 분말로 크고 작은 폭발을 만들어 섬광과 압도적인 밝기를 구현하려 했다. 또한 이런 작은 폭발을 최대한 경이로운 스펙터클로 전환하기 위해 셔터 속도와 프레임 속도를 조정하면서 작은 폭발을 거대한 원자폭탄의 폭발처럼 보이는 데 성공했다. 폭발 한 장면을 위해 400개가 넘는 단일 장면을 150명 이상의 DNEG 소속 아티스트와 함께 촬영하여 최종 100장의 VFX 장면을 선정했다고 하니, 경이로운 수준의 집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광적인 집착에 힘입어 <오펜하이머>의 국내 박스오피스 성적은 8월 22일 기준 175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고 있다. 여전히 용산을 비롯한 IMAX 관에서는 <오펜하이머> 예매 전쟁으로 연일 매진은 물론 중고거래 장터에서 프리미어가 붙을 정도로 치열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모든 거장에게 강박과 고집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놀란의 강박과 고집이 <오펜하이머>의 단 한 시퀀스를 완벽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