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미국에선 <엑소시스트>(1973)의 50주년을 맞아 호러물 전문 제작사인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에서 원작을 리부트한 <엑소시스트: 믿는 자>을 개봉할 예정이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가 개봉하고 원작이 리부트되기까지 50년의 시간 동안 <엑소시스트>는 총 5편의 속편으로 제작되었지만, 원작의 아성을 재현한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윌리엄 프리드킨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원작을 망친 속편에 대해 대차게 욕을 했을 정도였다. 마지막 5편이 2005년에 제작된 <도미니언: 프리퀄 투 엑소시스트>였으니 리부트 작품이 나오기까지도 어언 18년이 걸린 셈이다. 50년 만에 부활하는 시리즈에 대해 윌리엄 프리드킨의 반응이 너무 궁금하지만, 이제 더는 그에게 물어볼 방법이 없다. 지난 8월 7일 윌리엄 프리드킨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70년대를 풍미한 거장의 이야기를 더는 들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 마음을 저리게 만든다.
수많은 호러 팬은 윌리엄 프리드킨을 <엑소시스트>로부터 시작된 엑소시즘 장르의 아버지로 생각할 것이다. <엑소시스트>의 등장 이후 지난 50년이 지난 지금도 <컨저링>(2013), <더 넌>(2018), <프레이 포 더 데블>(2022) 등 다양한 엑소시즘물이 나왔으며 국내외에서도 <검은 사제들>(2015), <랑종>(2021), <변신>(2019) 등 엑소시즘은 호러 장르의 주된 갈래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윌리엄 프리드킨을 추모하는 이 글에서 우리는 그를 단순히 엑소시즘의 아버지로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찬란했던 70년대로부터 부침을 겪기 시작한 80년대를 거쳐 2000년대까지도 프리드킨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영화의 운명과 맞서 싸우고자 했던 이야기꾼이었기 때문이다. 평론가 제임스 모나코는 그를 가리키어 ‘빌리 더 키드’라 칭했다. 그가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백발백중 명사수처럼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평이었다. 우리는 이 평을 조금 더 밀어붙여 보자. 그는 인간의 심연의 공포라는 욕망이 운명과 모든 것을 건 내기를 즐긴 감독이었다. 그러니 프리드킨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모한 빌리 더 키드’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윌리엄 프리드킨을 추모하며 몇 가지 그의 영화세계의 궤적에 관해 이야기를 얹어보려 한다.
1970년대 할리우드는 본격적으로 누벨바그 운동의 작가주의적 경향이 젊은 미국의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이클 치미노와 피터 보그다노비치 등은 기존의 장르 문법을 넘어서려는 영화적 시도를 끊임없이 꾀했었다. 일찍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방송국에서 TV쇼와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던 윌리엄 프리드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촬영 기법을 체득하면서 경력을 쌓아나갔고, 1967년 <굿 타임스>를 통해 첫 장편 영화 데뷔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약 네 편의 장편을 더 만들었지만,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알리기 시작한 작품은 <프렌치 커넥션>(1971)이었다. 그는 32세의 나이로 <프렌치 커넥션>을 통해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쥐게 된다.
같은 시기에 개봉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돈 시겔의 <더티 해리>와 자주 비교되는 <프렌치 커넥션>은 하드보일드 수사물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었다. 기차를 쫓는 자동차 추격신은 하워드 혹스의 조언을 받아 제작된 장면으로 <프렌치 커넥션>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마치 자동차 번호판에 카메라를 단 것처럼 지면에 닿을 것 같은 높이에서 속도감을 배가시키는 연출은 후에 80~90년대 카체이스 씬과 MTV로 대변되는 90년대 팝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그의 박진감 넘치는 카체이스 신뿐만 아니라 뉴욕의 혼란스러운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그의 시선과 수사 대상이라는 목표에 경도되어 불가능한 운명과 아등바등 싸우는 처량한 인물들은 이후 윌리엄 프리드킨의 세계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수사로 자리매김한다.
<엑소시스트>는 윌리엄 프리드킨이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발돋움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엑소시스트>의 연출 방식은 단순히 엑소시즘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기존 호러 장르가 서스펜스와 형상에 집중하여 공포를 그려냈다면, <엑소시스트>의 카메라가 지닌 거리감은 보다 더 현장에 가깝게 위치하며 현실의 감각 안에서 공포가 생성되고 전이되는 과정을 포착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엑소시스트>는 90년대 이후 등장하는 호러 영화의 문법들의 아버지인 셈이다. (심지어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파라노말 액티비티>(2007)마저 <엑소시스트>의 자장 아래 존재한다) <곡성>(2016)의 나홍진 감독은 그에게 가장 영향을 깊게 끼친 감독으로 기타노 다케시와 함께 윌리엄 프리드킨을 꼽기도 했다.
70년대를 주름잡던 윌리엄 프리드킨이 부침을 겪기 시작한 작품은 다름 아닌 <소서러>(1977)였다. 지금은 쿠엔틴 타란티노, PTA 등 수많은 감독과 평론가의 지지를 받으며 정전의 자리에 오른 영화지만, <소서러>는 2100만 달러의 제작비 중 900만 달러만이 회수되는 처참한 흥행 성적으로 그를 곤혹스럽게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불세출의 명작 <공포의 보수>(1953)를 리메이크하겠다는 야심으로 출발했던 <소서러>는 원작보다 훨씬 더 처절한 지옥도를 보여준다. <공포의 보수>가 이름 모를 지방에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며 금전적 압박을 겪는 네 명의 이방인이 폭탄의 원료가 되는 질소를 운반하는 서스펜스로 작동한다면, <소서러>는 그보다 훨씬 더 절망적인 인물들의 아수라장을 그려낸다. 절벽 끝에 간신히 매달린 네 명의 도피자는 반쯤 죽어 있는 상태로 폭약을 운반하는 죽음의 레이스를 이어간다. 원작의 질주가 어딘가 홀려있는 존재들의 지리한 싸움이라면, <소서러>의 레이스는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유령들의 사투다. 따라서 원작의 작열하는 태양과 아찔한 낭떠러지는 <소서러>에 들어서는 비와 습기로 가득 찬 늪지대로 변화한다. <공포의 보수>가 높이의 아찔함이라면, <소서러>는 주어진 운명에 짓눌린 저지대의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소서러>의 흥행 참패 이후에도 윌리엄 프리드킨은 꾸준히 자신의 자리에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상대적으로 관심은 적어졌지만, 그만큼 그는 새로운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프렌치 커넥션>에 이어 1980년대 그가 주로 만든 작품들은 하드보일드 스릴러가 많았다. 그 중 알 파치노 주연의 <광란자>(1980)와 <리브 앤 다이>(1985)는 주목해 볼 작품이다. <프렌치 커넥션>에서 뉴욕의 뒷거리를 현실적으로 담은 카메라가 돌연 <광란자>에 들어서는 뉴욕의 게이 컬쳐로 시선을 돌렸다. <광란자>에서 알 파치노는 동성애자를 연쇄 살인하는 살인마를 쫓기 위해 스스로 동성애자로 위장하여 잠복근무한다. 그의 카메라가 비추는 게이 커뮤니티가 비록 많이 왜곡되었음에도, 이상하리만큼 <광란자>는 21세기의 혐오에 대한 혐오를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리브 앤 다이>에서 그려내는 LA 역시 뉴욕과 다르지 않다. 지옥도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검거라는 목적에 경도된 인물들이 폭력과 운명에 대한 반기를 자행할 뿐이다. 80년대 프리드킨의 시선은 조금 무디게 보일지라도 여전히 수렁 안에서 운명을 겨눈 인물들의 자욱한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후 1997년 프리드킨은 시드니 루멧의 법정물인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의 TV 드라마 버전을 성공적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2000), <헌티드>(2003), <킬러 조> (2011) 등을 제작했다. 흥행의 측면에서는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여전히 몇 평론가들로부터 호평받은 작품은 존재했다. 프리드킨은 끊임없이 영화와 TV 드라마 연출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CSI 라스베가스> 시즌 8,9를 연출하기도 했고, 매튜 매커니히와 우디 해럴슨 주연의 명작으로 꼽혔던 <트루 디텍티브>의 시즌 2 연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마지막 유작은 올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비경쟁으로 초청된 <케인호의 반란 군사재판>(2023)이 될 예정이다. 허먼 워크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는 법정 드라마로 구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영화 매체 인디와이어는 윌리엄 프리드킨의 사후 추모 기사 시리즈 중 ‘프리드킨의 미완성 프로젝트들’이라는 기사를 발행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엑소시스트>의 속편이 처참한 결과물로 남겨진 이후 3편에서 다시 메가폰을 잡고 시리즈를 소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엑소시스트 3>은 원작자인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연출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그가 만약 3편을 제작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시리즈가 전개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해본다. <엑소시스트 3>의 제작 불발 이후에도 그는 블래티의 다른 단편 소설인 「Elsewhere」을 연출하려고 시도했다. 이후 2010년에도 또 다른 소설 「Dimiter」를 각색하려 했지만, 불발되었고 블래티는 2017년 세상을 떠나며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영화를 만드는 광경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이외에도 프리드킨은 제이슨 밀러의 연극 대본 중 하나인 「That Championship Season」의 각색, 실버스터 스탤론과의 협업, 권투선수 소니 리스톤의 실화 각색, <킬러 조>의 TV 드라마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현실적인 상황에 부딪히며 좌절되었다. 그의 미완성 프로젝트 중 몇 개만이라도 실현되었다면, 그의 상업적 재기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2020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비대면 마스터 클래스에도 참여한 바가 있는 윌리엄 프리드킨은 70년대의 전성기로만 기억될 감독이 전혀 아니다. 그의 영화 세계 전반에 드리운 수렁 속 인물들의 운명과의 무모한 배팅은 기존의 이분법적인 세계 밖으로 영화를 끌어냈다. 또한 그의 연출을 향한 열정은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그의 인물들이 무모한 운명과의 싸움에서 설령 질지언정, 끝까지 사투하며 함께 휘말렸던 것처럼. 프리드킨의 영화는 비평과 흥행의 등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발걸음을 옮겼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