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마다, 인간이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겸허한 마음이 든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의 트리니티 실험 씬에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수 초의 침묵이 지속되는 와중에 광활한 아이맥스 화면 가득 들어찬 폭발의 순간이 그랬다.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만의 탁월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인류는 어디에 가닿았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되었을까. J.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각자의 영역이 전혀 달랐으나, 그들의 삶은 매혹적이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얽혔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1882.6.17 ~ 1971.4.6): 러시아 출신의 미국 작곡가. 발레곡 《불새》, 《페트루슈카》 로 성공을 거두고 그의 대표작《봄의 제전》으로 당시의 전위파 기수로 주목 받았다. 제1차 대전 후에는 신고전주의 작풍으로 전환하였으며 종교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물리학 뿐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남다른 깊이와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화 곳곳 그의 놀라운 언어 습득력과 폭넓은 지적 호기심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일어로 읽어 영어로는 다르게 번역되었던 기본 개념 용어(소유권)를, 후에 그의 연인이 된 공산주의자 진 태트록 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연구자로서 네덜란드에 머무른 지 6주 만에 네덜란드어로 (네덜란드어는 독일어와 비슷하다고 하지만 발음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언어다) 양자역학에 대한 렉처를 진행할 수 있었으며, 산스크리트어 경전도 원어로 읽을 만큼 언어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다.

네덜란드어로 강의하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중

오펜하이머가 케임브리지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다가 독일 괴팅엔으로 옮겨가 막스 보른과 함께 박사 과정을 밟던 도중 만난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과 피카소의 걸작들, T.S.엘리엇의 「황무지」와 같은 시대의 걸작들이었다. 그가 1927년 괴팅엔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므로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초연한 1913년, 피카소가 큐비즘을 종합적으로 완성한 시기(1911-1914)에서 막 10년을 지났을 때였다. 대중들은 새롭고 낯설다 못해 파격적인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의 작품에 놀라움을 넘어선 충격을 받았고, 1913년 5월 29일 '봄의 제전'을 초연했던 샹젤리제 극장에서 벌어진 폭동에 가까운 소요사태가 보여주듯, 명확한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류의 유구한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걸까. 오펜하이머는 일찌감치 그 새로움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는 초연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진혼찬가'를 듣자마자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의 영역을 넘어 음악의 세계에서 위안과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1966년에 직접 세계 초연으로 선보이는 노거장의 마지막 대작을 직접 찾아가 들었다는 지점에서, 클래식 음악계의 혁명적인 인물이자 위대한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를 향해 그가 품은 깊은 존경심이 엿보인다.

스트라빈스키(왼쪽)와 피카소가 그린 스트라빈스키(오른쪽)

복잡한 리듬, 대담한 화음, 파격적인 구조가 특징인 스트라빈스키의 혁신적인 음악 접근 방식은 오펜하이머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짐작한다. 두 천재의 영역은 달랐지만 오펜하이머는 스트라빈스키의 창의적인 대담함에서 동질성을 발견했을 것이고, 우주의 생성과 소멸 그 너머를 탐구하는 물리학자의 성향은 음악적 표현의 미지의 영역, 아무도 가닿지 않은 영토를 향해 나아가는 에너지로 가득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서 비밀스러운 동지적 감수성을 느꼈을 것이다. 잊히지 않는 멜로디, 원시적 에너지, 복잡한 화성, 날 것의 다듬어지지 않은 펄떡임으로 가득한 리듬은 오펜하이머의 심연을 건드리고 영혼을 울렸다고 믿는다. 원자폭탄의 폭발처럼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경지를 선사하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불새' '아곤'등은 청중의 오감을 온통 뒤흔드는 걸작이다.

오펜하이머가 남들보다 한 발짝 앞서 원자의 비밀을 들여다보았던 것처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창의성의 깊이를 파고들었다. 오펜하이머가 주어진 안락함과 유명세, 권력에 취하지 않고, 과학자로서 양심을 지키며 시시각각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걸맞은 새로운 주장을 윤리적으로 펼친 것처럼 작곡가로서 스트라빈스키 역시 단 한 번도 제자리에 머물며 동어반복을 하지 않았고 늘 새로운 작품을 내놓았다.

스트라빈스키가 쓴 「음악의 시학」(왼쪽)과 루돌프 켐페가 지휘한 '진혼찬가>'(오른쪽)

스트라빈스키의 마지막 대작 '진혼찬가'(레퀴엠 칸티클스, Requiem Canticles)는1966년 10월에 완성되었다. 초연 장소였던 뉴저지 주 프린스턴의 맥카터 극장에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이 곡을 초연으로 접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장례식에 이 곡을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의 바람대로 4개월 후, 오펜하이머의 장례식에서 스트라빈스키의 '진혼찬가'가 울려 퍼졌다. 4년 반 후, 베니스에서 열린 스트라빈스키의 장례식에서도 역시 이 곡이 연주되었다.

이 특별한 천재들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선율 속에서, 음악 안에서 잠시 서로 마주하고 위무하는 순간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도 다 이해받지 못했던 그들이 잠시나마 삶을 넘어선 지속적이고도 강렬한 유대감을 나눠 가졌을 것이고, 그만큼 깊고 온전하게 통했을 것이다. 인간의 열정과 창의성, 위대함에 대한 유산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를 보는 내내 3시간이 짧다고 느꼈던 것은 그래서였다. 무한한 아이맥스라는 포맷을 빌어 제7의 예술인 영화로 이 복잡하고도 불가해한 한 인간의 내면을 오롯이 담아낸 <오펜하이머>를 다시 보러 가야겠다.


김나희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