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킬러>

신작 착수하면 참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작품 깎는 노인' 같은 한 감독이 마침내 개봉일을 공개했다. 바로 데이비드 핀처의 <더 킬러>다. 2020년 미국 아카데미 다수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촬영상과 미술상을 수상한 <맹크> 이후 3년 만의 신작이다. 이번에 공개한 <더 킬러> 포스터에선 11월 10일로 공개일을 밝혔다. 그동안 <세븐> <파이트 클럽> <조디악>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소셜 네트워크> <나를 찾아줘> 등 다양한 장르를 자신만의 선예도로 표현한 데이비드 핀처와 <더 킬러>의 기대 포인트를 짚어본다.


핀처의 장기, 범죄자의 심리

<맹크> 현장의 데이비드 핀처(오른쪽)

데이비드 핀처만큼 데뷔 초기와 근래의 평가가 굉장히 이질적인 감독도 몇 없다. 그가 감독으로 보낸 전반기, 1990년대에 그에게 붙은 수식어는 언제나 '스타일리시'였다. 영화의 무드를 극대화하는 영상미와 CGI를 활용한 화려한 화면 전환은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러다 2007년 <조디악>을 기점으로, 핀처는 묵직한 연출로 드라마를 이끌어내는 데 두각을 드러냈다. 여전히 CG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영화를 만들어갔지만, 화려함보다는 영화의 시대를 구현하거나 캐릭터의 특징을 살리는 데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조디악>의 1960년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벤자민 버튼이었다.

<마인드헌터>

그런 그가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한 작품을 뽑으면 드라마 <마인드헌터>가 아닐까. 범죄 현장에 남은 흔적이나 일련적인 패턴을 분석해 범죄자의 심리를 예측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의 창시자 홀든 포드과 파트너 빌 텐치의 이야기를 다룬 <마인트헌터>는 핀처의 주특기 '긴장감'을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의 심리로부터 끄집어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더 킬러>가 유독 기대되는 건 <더 킬러> 역시 한 킬러의 심리적 공황과 그가 마주한 위기가 맞물리며 전개되는 영화이기 때문. 즉 <마인드헌터>에서 절정에 달했던 범죄자의 심리 묘사, 그리고 그것과 대비를 이루는 묵직한 연출이 이번 <더 킬러>에서도 돋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명작 그래픽노블의 영화화+믿고 쓰는 각본가

<더 킬러>는 원작이 있다. 알렉시스 놀렌트(Alexis Nolent, 필명 Matz)와 뤽 자카몽(Luc Jacamon)의 코믹북 「더 킬러」를 원작으로 한다. 1998년부터 2013년까지 총 12개의 이슈로 이뤄진 「더 킬러」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암살자의 성패의 궤도를 따라가며 그의 내면을 묘사한다.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주인공의 캐릭터와 과거 저지른 암살 때문에 역으로 추적당하는 일련의 과정이 원작의 핵심.

<세븐>

영화 <더 킬러>는 원작을 어느 정도 반영할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죄의식에 흔들리는 킬러라는 컨셉은 유지한다고 알려졌다. 이런 이중적인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해선 각본의 힘이 중요한데, <더 킬러>는 <세븐>으로 데이비드 핀처와 합을 맞췄던 앤드류 케빈 워커가 각색을 맡았다. <세븐>에서 범죄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존 도’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남긴 그이기에 <더 킬러>의 주인공 또한 강렬한 캐릭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다. <나를 찾아줘>로 한 인간의 초상을 다양하게 표현한 데이비드 핀처의 장기도 분명 <더 킬러>를 풍부하게 할 것이고.


핀처 최애 멤버들의 합작

<더 킬러>로 핀처와 다시 조우하는 건 앤드류 케빈 워커만이 아니다. 촬영감독, 음악감독 등 주요 스태프 또한 다시 한 번 핀처와 힘을 합친 멤버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최근 핀처가 가장 '애정'하고 있는 스태프들이긴 하지만.

에릭 메세츠미트

<더 킬러> 촬영은 에릭 메세츠미트(Erik Messerschmidt)가 맡았다. 메세츠미트는 <나를 찾아줘>의 개퍼(조명)로 참여한 후 <마인드헌터>에서 촬영감독으로 핀처와 호흡을 맞춰췄다. 이후 핀처의 영화 <맹크>는 물론이고 드라마 <파고>, 영화 <디보션> 등을 촬영했다. 빛과 그림자를 탁월하게 활용해 1930년대 할리우드의 명암을 표현하며 촬영상을 거머쥔 <맹크>처럼, 에릭 메세츠미트의 촬영이 <더 킬러>의 세계를 차갑고도 선명하게 전할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로 영화음악에 데뷔와 동시에 수상자가 된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는 <맹크>까지 핀처 영화의 음악을 도맡았다.

이제는 '나인 인치 네일스'라는 이름만큼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 듀오'라는 수식어가 유명한 트렌트 레즈너, 애티커스 로스도 <더 킬러>에 합류했다. 트렌트 레즈너, 애티커스 로스는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로 처음 영화음악 작곡에 도전했는데, 곧바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다. 이후에도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나를 찾아줘>, <맹크>까지 핀처의 신작에서 언제나 색다른 영화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넷플릭스X데이비드 핀처의 시작 <하우스 오브 카드>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깝지만, 그래도 최근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은 넷플릭스일 것이다. DVD 대여 서비스 업체였던 넷플릭스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실시하기 위해 '킬러 콘텐츠'를 제작해야 했는데, 그때 마운드에 올라온 것이 데이비드 핀처와 <하우스 오브 카드>였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1~2화를 핀처가 연출했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물론 재밌는 게 가장 크지만) 시청자 유입에 성공했다. 이 성공을 맛본 넷플릭스는 데이비드 핀처가 하고 싶다는 프로젝트 <러브, 데스 + 로봇>, <마인드헌터>, <맹크> 모두 투자하며 핀처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이번에도 <더 킬러>와 기존 배급사(파라마운트 픽처스)의 관계가 요원해지자 넷플릭스가 배급권을 따내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가 됐다.


킬러의 얼굴로 마주할 마이클 파스벤더&틸다 스윈튼

마이클 패스벤더는 재기에 성공할 것인가.

이런 <더 킬러>에도 불안 요소가 있다. 영화의 '얼굴'인 출연진이 다소 빈약하다는 것. 현재까지 공개한 <더 킬러>의 출연진을 보면 주인공 킬러 역의 마이클 패스벤더, 그리고 틸다 스윈튼을 제외하면 확 눈에 띄는 이름이 없다. 그마저도 틸다 스윈튼의 분량은 생각보다 적다고 하니, 사실상 마이클 패스벤더 원톱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연기력이야 여러 차례 검증한 바 있지만, 과거 여자친구 폭행 사건이 거듭 언급되고 있어서 마음이 떠난 팬이 적지 않다는 것이 현재 그의 한계. 일단락 된 일이라곤 하나 과연 그가 <더 킬러>로 다시금 정상에 올라설 수 있을지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마이클 패스벤더의 촬영장 모습


11월 10일 공개 예정인 <더 킬러>는 9월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프리미어 상영한다. 데이비드 핀처가 2007년부터 꿈꿨다는 이번 프로젝트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궁금해진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