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전미 최고의 드라마, TV 시리즈 작품이 한데 모이는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의 메인 시상식이 현지 시각 9월 18일에 개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현재 미국작가조합(WGA) 파업 사태가 미국 배우조합(SAG-AFTRA) 파업으로 이어지면서, 영화 및 TV 드라마 제작 현장은 전면 중지 상태이다. 5월 2일 시작된 파업은 이미 100일을 넘긴 후 장기화 조짐이 보임에 따라, MCU 멀티버스 사가부터 <듄 2>, <기묘한 이야기 시즌 5>, <아바타 시리즈>, 심지어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패밀리 가이>와 <아메리칸 대드>까지 개봉 및 제작 일정이 무기한 연기 중이다. 이에 따라 드라마 작가와 배우 그리고 연출자들에게 가장 큰 축제인 프라임타임 에미상 역시 일정을 연기했다. 에미상이 연기된 건 2001년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이번 에미상은 해를 넘긴 1월 15일에 개최될 예정이다.
물론 에미상의 후보작들은 이미 지난 7월 12일 발표가 되었으며, 수상 대상은 2022년 6월부터 2023년 5월까지 방영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광적인 드라마 시리즈 팬이 아니라면, 후보에 오른 작품들을 더 많이 정주행할 시간이 남았다는 점은 관객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지난해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는 <오징어 게임>이 비영어권 최초로 연출상(황동혁 감독), 남우주연상(배우 이정재) 등 본상 2관왕을 비롯하여 총 6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국내에서도 에미상을 향한 폭발적인 관심이 이어졌던 만큼, 이번 에미상 역시 국내 드라마 팬들의 관심이 뜨겁다. 특히 한국계 배우와 연출진들이 주축이 되어 제작한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이 13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큰 화제를 모았다. 에미상의 수상 부문은 세세하게 나뉘어 있고 후보작도 워낙 많기에, 이번 기사에서는 각 수상 부문을 살펴보기보다는 최다 노미네이트 작품들과 화제작 위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4개월 반 정도 남은 만큼, 추천작을 정주행할 여유는 충분할 것이다.
<석세션 시즌 4>
글로벌 미디어 그룹으로 성공한, 그야말로 거대한 미디어 제국 웨이스타 로이코(Waystar Royco)를 둘러싼 가족들 간의 권력 다툼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석세션>은 거대하게 군림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녀들 간의 세밀한 감정과 팽팽한 관계들의 긴장감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뉴스 코프와 폭스 코퍼레이션을 지닌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많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2018년 첫 시즌이 공개된 이후로 2019년 시즌 2부터 올해 3월에 공개된 시즌 4까지, <석세션> 시리즈는 에미상의 단골이 되었다. 지난 2021년에는 BBC 선정 100대 21세기 TV 시리즈의 10위에 오르는 영예를 안기도 했으며, 지난 74회 에미상 드라마 시리즈 작품상을 거머쥐며 명실상부 최고의 시리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무려 27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그야말로 기염을 토하는 중. 시즌 4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는 공식 보도가 있었기에, 유종의 미를 거두는 <석세션 시즌 4>에게 많은 상이 돌아갈 것이라는 예측도 존재한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 1>
이 정도면 HBO는 드라마 대가가 맞다. 정체불명의 팬데믹으로 인류의 60% 이상이 죽거나 괴생명체로 변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배경으로 남은 생존자들의 지옥도와 같은 탈출 및 액션을 보여주었던 2013년 발매된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게임 원작의 미디어믹스는 쉽사리 좋은 평을 듣기가 어렵다는 편견을 극복하고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올해의 드라마로 거론될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드라마 시청자와 평단보다 훨씬 까다로운 게임 팬들의 인정까지 받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는 <석세션>에 이어 24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본상에서는 <석세션> vs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2파전 구도를 점치는 기자들도 꽤 있는 편. 게임 원작자 닐 드럭만과 <체르노빌> 시리즈의 극본가 크레이그 메이진이 제작에 합류한 점이 작품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으며, 벨라 램지가 주연을 맡은 엘리 역에 대한 찬사도 이어지고 있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시즌 2 제작 소식이 발표된 가운데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과연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석세션>을 막을 대항마로 부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테드 래소 시즌 3>
앞서 언급한 작품들이 ‘권력과 가족의 암투’, ‘팬데믹 이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시대에 살아남기’처럼 우울하고 무거운 작품들이 많았다면, <테드 래소 시즌 3>는 어떨까? 미국의 미식축구 코치 테드 래소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국 축구팀 AFC 리치먼드의 감독으로 선임된다는 황당한 설정에서 시작하는 스포츠 코미디 시리즈 <테드 래소>는 다른 드라마 시리즈들에 비해 순하고 착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테드 래소(제이슨 서데이키스)는 ‘선한 사람의 열정과 호의는 결국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라는 오랜 교훈의 의인화와 같은 캐릭터다. 비록 공황과 이혼 등 혼란스러운 내면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AFC 리치먼드를 프리미어 리그 승격까지 일궈내며 초짜 감독의 신화를 새로 쓴다. <석세션>처럼 이번으로 막을 내리는 <테드 래소>는 21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며 화려한 마지막 인사를 팬들에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따스한 마음이 따스한 세상을 만든다는 <테드 래소>의 이야기는 험난한 작금의 시대에서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가져다준다.
<성난 사람들>
국내 드라마 팬들의 모든 관심은 <성난 사람들>의 수상 여부에 쏠려 있다. 이성진 쇼러너를 주축으로 스티븐 연, 저스틴 민, 애슐리 박, 영 마지노 등 해외 시리즈에서 맹활약 중인 한국계 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성난 사람들>은 미국에서 아시안 2세로 사는 현실에 대해 세밀하게 그려냈다. 안은 사기를 당하고, 동생은 무능력하며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대니(스티븐 연)와 중산층의 부유한 가정이지만 소원한 남편과의 관계와 외가의 간섭으로 우울한 에이미(앨리 웡)가 보복 운전으로 엮이며 시작한 드라마 <성난 사람들>은 결국 현실에 만연한 억압과 불행에 분노를 내비치며 연대하는 두 남녀를 다루고 있다. 분노라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순간에 연대가 일어난다는 말이 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성난 사람들>은 그 명제가 성립 가능하다는 것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준다. 13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다크호스로 부상한 <성난 사람들>은 미니시리즈 부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직은 속편 제작 가능성에 대한 소식은 전해진 바가 없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