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사진 제공=춘천영화제

우리는 이준익 감독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의 이름을 들으면 <사도>(2015) 같은 사극 영화에 특화된 감독 또는 <라디오스타>(2006) 같은 음악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준익 감독은 2000년 이후 한국 영화계에서 최고의 다산성과 독특함을 보여준 감독 중 하나다.

1993년에 삼성에서 전액 투자 받은 <키드캅>으로 데뷔했지만 대중적 관심은 받지 못했다. 이후 10년 동안 외화 수입과 영화 제작에 전념했던 그는 2003년 <황산벌>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를 시작했다. 2021년 <자산어보>까지 그의 영화들은 우리 삶과 역사를 잔잔한 감동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담아냈다.

충무로 상업영화계 안에서 무려 30년 동안 14편의 영화를 만들어온 이준익 감독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볼 기회가 관객을 찾아온다. 올해 춘천영화제(이사장 박기복)가 신설한 클로즈업 섹션 ‘이준익, 영화 나이 서른’이 바로 그것. 클로즈업 섹션은 한 명의 영화인이나 테마를 선정해 집중 조명하는 프로그램으로, 춘천영화제는 첫 주인공으로 올해 감독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이준익 감독을 선정했다.

근본 없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난 자랑스러워. 근본이라는 것은 고인 물이야. 고인 물의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는 인간들이 근본 있는 인간들이라고. 난 고인 물이 싫고 근본 없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 어차피 인생은 감옥인데, 독방에서 오래 살래, 아니면 이 방 저 방 돌아다닐래, 그러면 난 후자라고. 잡범이니까(웃음). 난 그게 좋은 인생인 거 같아.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근본이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제도권의 함정인 거야. 난 그 함정에서 살고 싶지 않아.

‘이준익, 영화 나이 서른’ 소책자에서 발췌

왜 이준익 감독이었을까? 충무로에서 서른 번째 영화적 생일을 맞이한 이준익 감독에게서 무엇을 봐야 할 것인가? 김형석 춘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이준익 감독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우선 이준익 감독 자체가 일정 부분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긴 하지만, 철저히 메인스트림 안에서, 시스템 안에서 30년간 작업한 감독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든 감독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시스템 밖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홍상수 감독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 김형석 프로그래머는 “상업영화계에서 이준익 감독만큼 생산성을 보여준 감독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그를 기념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두 번째 이유로 김형석 프로그래머는 ‘이준익 감독이 충무로에 가져온 새로운 기운’을 꼽는다. 특히 사극 장르에서. 충무로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에 신상옥 감독의 사극 영화들도 있었고, 1980년대 에로티시즘 사극 영화들도 있었다. <영원한 제국>(감독 박종원, 1995)이 있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며 사극은 사실상 명맥이 끊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이준익 감독은 그런 사극 장르를 다시 충무로의 중심에서 부활시켰다. 단순히 사극을 대상화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팩션(fact+fiction의 합성어)이라는 개념을 설정해 더욱 풍성하게 확장했다. 김형석 프로그래머는 “<황산벌>(2003)은 언어적 표현 자체가 그야말로 ‘이단적’인 작품이고, 팩션 영화 개념에 중심을 둔 <왕의 남자>(2005), 최근의 <사도>(2015)까지 독특한 사극 장르를 개척해 풍성하게 했다”라고 분석한다.

마지막 키워드는 ‘아웃사이더’다. 김형석 프로그래머는 “<동주>(2016)나 <박열>(2017), <자산어보>(2021) 같은 현대 역사극에서는 역사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집중한다. 윤동주 이야기에서 송몽규를, 생소한 박열보다 더 숨겨져 있던 후미코라는 인물을,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는 주인공 자체가 서자이며 역성혁명을 꿈꿨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에서도 마찬가지다”라고 설명한다. 이준익 감독은 사극 장르도 풍부하게 만들었지만, 사극 안에서 아웃사이더를 적극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는 분석이다.

나는 세 개의 사자성어로 내 인생을 규정지으려고 하는데, 첫 번째가 ‘과유불급’(過猶不及), 두 번째가 ‘역지사지’(易地思之), 세 번째가 ‘새옹지마’(塞翁之馬)야. 과유불급이라는 건, 어쨌든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이 된 건 과한 거야. 뭔가 과대 평가되고, 과대 성과를 낸 거야. 그러면 모자라야 돼, 그 다음부터는.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니까. 그래서 좀 모자란 인간, 특히 모자란 이야기를 한 게 <라디오 스타>야. 얼마나 좋아. 내가 자질과 자격은 부족하지만 운이 좋아. 얼마나 다행이야. <라디오 스타> 같은 영화를 우연히 하게 된 게. 역시 … 새옹지마야.

'이준익, 영화 나이 서른' 소책자에서 발췌

이번 춘천영화제에서 이준익 감독 데뷔 30주년 상영전을 기획하며 김형석 프로그래머는 이준익 감독에 대한 레퍼런스가 거의 없다는 점에 놀랐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을 단독으로 다룬 책은 없었고, 여러 감독을 묶어 펴낸 책에서도 이준익 감독을 찾기 쉽지 않았다는 것. 만든 작품 수에 비해 이론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감독이라는 방증이다. 저평가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평가 자체가 없는 감독이라는 느낌을 받은 김형석 프로그래머가 이준익 감독을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나 30주년 상영전을 제안했다. 그리고 올해 그 결실을 춘천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아마 이번 춘천영화제에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지도 모른다.

이준익 감독 뱃지

이번 춘천영화제 이준익 상영전에서는 그의 대표적 영화 중 3편을 상영한다. 김형석 프로그래머는 “적어도 5편은 틀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대신할 이준익 감독 뱃지 등 굿즈를 제작했다. 이준익 감독과의 대화를 기록한 소책자도 무료로 드린다. 여기에 상영작에 출연한 안성기, 박중훈, 이준기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춘천을 찾아 이준익 감독의 서른 번째 생일을 축하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이준익 감독과 직접 상의해 고른 세 편의 영화는 <왕의 남자>(2005), <라디오 스타>(2006), <동주>(2015)다. <왕의 남자>는 한국영화계에서 이준익 감독의 이름을 확고히 했던 작품이고. <라디오 스타>는 강원도(영월)에서 촬영된 영화로, 박중훈이 불렀던 노래 ‘비와 당신’과 함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동주>는 윤동주와 송몽규라는 한국 현대사의 두 청년을 저예산 흑백 영화에 담아낸, 이준익 감독의 새로운 면모를 만날 수 있었던 작품이다. 이준익 감독은 전 상영에 모더레이터와 함께 할 예정이다.

<왕의 남자> 모더레이터 봉만대 감독과 게스트 이준기 배우. 사진 제공=춘천영화제

이번 춘천영화제에서 상영할 영화와 모더레이터를 살펴보자. 먼저 9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30분에 상영되는 <왕의 남자> GV는 봉만대 감독이 모더레이터로 참여하며, 이준기 배우가 게스트로 나선다. <왕의 남자>를 통해 신드롬을 일으키며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20년 가까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굳건히 스타덤을 지키고 있는 이준기는 현재 1인 2역을 맡은 드라마 <아라문의 검>(넷플릭스) 방영을 앞두고 있다. 이번 상영전을 통해 오랜만에 이준익 감독과 함께 관객 앞에 선다. 모더레이터를 맡은 봉만대 감독은 이준익 감독과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해온 후배 감독으로, 과거 올레스마트폰영화제를 함께 이끌기도 했다.

9월 9일 토요일 오후 4시 50분의 <동주> 상영엔 배우 최희서가 모더레이터로 함께 한다. 최희서 역시 이준익 감독 작품을 통해 잠재력을 인정받고,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유망주로 인정받은 배우다. 2009년에 <킹콩을 들다>로 데뷔한 그는 <동주>에서 쿠미 역을 맡으며 인상적인 모습을 선보였고 이어지는 이준익 감독의 작품 <박열>(2017)에서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선보이며 그 해 10개가 넘는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이준익 감독의 시리즈 드라마 <욘더>(2022)엔 목소리 연기로 특별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최근엔 연극 <나무 위의 군대>로 무대에 도전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라디오 스타> 게스트 박중훈 안성기 안미나 배우. 사진 제공=춘천영화제

9월 10일 일요일 오후 2시의 <라디오 스타> 상영엔 한국영화의 레전드인 안성기 박중훈과, 이 영화로 데뷔한 ‘청록다방 김 양’ 캐릭터의 안미나(개봉 당시 한여운)가 함께 한다. 안성기와 박중훈은 <칠수와 만수>(감독 박광수, 1988), <투캅스>(감독 강우석, 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감독 이명세, 1999)에 이어 <라디오 스타>에서 네 번째로 호흡을 맞추었는데, 배우로서 완숙미를 갖춘 두 중년 배우의 가슴 뭉클한 연기가 펼쳐진다.

안미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눈물샘을 자극했던 배우로, 라디오 사연을 전하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대목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활동했고 최근엔 ‘지삼’이라는 이름으로 호러 단편 <엑소시즘, 넷>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은 8월 30일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신체모음.zip>의 한 에피소드다.

춘천영화제 포스터. 사진 제공=춘천영화제

한국영화가 지금 위기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관객들이 검증된 소수의 감독군에만 집중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친다.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같은 감독들은 물론 훌륭하지만, 소수의 감독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자산인 감독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조금만 눈을 돌리면 많은 영화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는 이준익 감독을 춘천영화제에서 만나봐야 할 이유다.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