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9월이다. ‘여름이었다’라는 말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진짜 여름이 지나갔다. 7월 말부터 8월까지 수많은 한국영화들이 개봉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시간이 일단락되는 듯 하니 이번 '빅 4'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생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8월 9일 개봉해 지금까지 345만 관객을 동원했다. 손익분기점(약 400만 명)에 못 미쳐서 아쉽지만, 그래도 한국영화계의 위기라고 일컫는 시기에 이런 흥행은 ‘공들인 영화는 관객이 호응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새삼 깨닫게 한다.
완벽한 영화는 아닌지라 관람을 마친 관객들의 후기를 보면 호불호가 어느 정도 갈린다. 그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요소는 명화라는 인물이다. 박보영이 연기한 명화는 재난으로 세상이 완전히 정지한 시점에서도 서로의 공존을 도모하고 끝내는 황궁아파트의 ‘유토피아’를 붕괴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절망적인 세계에서 유독 공존과 화합이란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당하고 있어서인지 ‘고구마’ ‘민폐’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고백하자면, 필자 또한 그중 한 명이다. 시사회 때, 그리고 이후 개봉 후 재관람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관을 나서고 작품을 곱씹으니 명화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 필자의 생각 변화를 글로 풀어보며 명화라는 캐릭터를 짚어보겠다.
1단계 : 명화는 고구마 민폐 캐릭터다
영화가 명화에 대해 설명해주는 정보를 종합하자. 명화는 민성(박서준)의 아내다. 명화는 간호사다. 명화는 유산 경험이 있다. 따져보면 영화에서 제시하는 명화의 '정보'는 이게 전부라서, 명화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극중 행동을 바탕으로 한다.
그럼 그의 행적을 살펴보자. 명화는 다 같이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꾸준히 피력한다. 코믹한 분위기로 넘어가지만, 남편에게조차 “무슨 색 돌을 넣었냐”고 추궁하기도 한다. 간호사인 그는 고급 인력으로 분류돼 아파트 내에서만 생활한다. 그는 방범대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민성에게 방범대에서 빠지면 안되냐고 묻기도, 도균(김도윤)이 몰래 보호하던 외지인들을 돕다가 민성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는 황궁아파트의 질서가 잘못됐다고 지적은 하지만, 별다른 방안을 찾지 못하다가 김영탁(이병헌)이 진짜 김영탁이 아닌 걸 폭로하며 황궁아파트의 붕괴를 일으킨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사실상 멸망한 시대에 살아남은 이들의 궤적을 따른다. 관객은 영화의 안내를 따라 아파트의 일상생활보다 압도적인 재해에 무너진 세상과 그 세상을 헤쳐나가는 김영탁 및 방범대를 주시하게 된다. 우리는 이 끔찍한 세상의 종말을 목도하며, (황궁아파트가 잘못됐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의 안전을 응원하게 된다.
이 입장에서 보면, 명화는 구태의연한 표현이겠지만 ‘온실 속 화초’다. 우리가 목격하는 그의 행적은 ‘어쨌든’ 실내에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 상대적으로 위험도 적고, 그럼에도 넉넉하게 먹을 것과 지원을 받고, 개인의 사무공간도 제공받았다. 이런 환경에서 타인을 포용해야 한다느니, 지금의 시스템은 잘못됐다느니 하는 말은 자기 것을 포기하지 않고 말만 늘어놓는 ‘위선’처럼 비치기 십상이다. 실제로 몇몇 관객들은 명화를 ‘위선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의 서술이 필자가 느낀 명화의 단상이다(다만 명화를 위선자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필자가 느끼기에 명화가 납득이 되기 위해선, 적어도 다른 집단이 있거나 그 존재라도 암시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깥에선 모두가 얼어 죽는 시대에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사람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본인도 그 시스템 덕분에 넉넉하게 살고 있으면서.
2단계 : 명화의 일상도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조금씩 생각을 거듭하다가 “내가 본 명화가 정말 명화의 모든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영화는 2시간 내외로 재해, 시스템의 구축, 시스템의 붕괴를 모두 다뤄야 했다. 그래서 그 시스템 설립과 유지에 관한 인물들이 더 많이 비칠 수밖에 없다. 명화는 시스템에 있지만 그 시스템을 이끄는 중추는 아니다. 그럼 우리는 명화를 어디까지 본 것일까.
명화를 옹호하는 관객들이 언급하는 중요한 지점. 명화는 '간호사'였기에 충분히 2인분의 식량을 확보했을 것이라는 점. 그러니까 민성에게 “방범대 관두면 안 돼?”라는 건 우리가 쫄쫄 굶어도 되니까 그만두라는 도덕적 선택은 아니고, 더 풍족하기 위해 그럴 필요는 없다는 권유였을 것이라는 점(자신이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대사도 있으니까). 이게 사실이라면 영화가 명화의 배급량을 제대로 시각화하지 못한 것이 명화에게 ‘위선’이란 누명을 씌운 꼴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언급되진 않지만, 생각해보라. 요즘 의사들이 토로하는 불만 중 이런 게 있다. “일부 환자들은 인터넷에서 본 지식 때문에 진료를 믿지 않는다”고. 명화가 아파트 내에 상주했다고 해도, 그의 일상이 정말 평안했을까? 의사도 아닌 간호사인 그의 진료와 처방에 모든 사람이 수긍했을까? 의료품도 모자란 상황에서, 위생과 청결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과연 입주민들은 현실의 사람들처럼 건강하긴 했을까? 하루 종일 쏟아지는 별별 진료를 혼자 감당하진 않았을까? 의료인이라고 하나 사람을 응대한다는 점에서 서비스직처럼 취급받는 간호사에게 멀쩡한 세상의 의사와 같은 존경이나 공경이 쏟아지긴 했을까?
만일 영화가 명화에게 주안점을 두었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무척 다른 영화가 됐을 것이다. 어쩌면 입주민들에게 시달리는 의료인의 '흑화'를 담은 사이코 스릴러가 됐다던가, 날로 상처와 부상이 늘어가는 방범대를 보며 희망을 잃는 드라마가 됐다던가, 아니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진료를 해야만 하는 일상 시트콤이 됐다던가. 아무튼 명화를 향한 앞선 평가들(고구마, 민폐 등등)은 영화에서 드러난 행적 때문이지, 그의 일상을 되짚듯 상상한다면 조금 섣부른 판단이었노라 인정하게 된다.
3단계 : 희망적인 사람이 아닌 희망 그 자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명화가 이렇게 그려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엄태화 감독은 명화가 민폐처럼 보인다는 질문에 “예상했다”고 답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뭐였을까. 영탁의 비밀은 혜원(박지후)이 폭로했어도 되는데.
영화에서 명화가 보여줬던 모습들을 찬찬히 돌아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의 일련의 행동들, 공존해야 하고 부조리한 시스템을 비판하는 행동들. 그것이 곧 명화의 존재 이유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명화가 없다면, 영화는 거기서 끝이다. (영화 속 표현을 빌려) 바퀴벌레들을 박멸하고 난 뒤, 모두가 시스템에 순응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점점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고 아마도 자멸했을 것이다. 명화는 비판과 지적으로 그런 비관적 결말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앞서 바깥세상을 모르는 명화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했으나, 사실은 모르는 그이기에만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지옥”을 목도한 혜원이 그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영화든, 문학이든, 실제로든 희망이나 믿음은 보통 논리적이지 않다. 합리적인 부분을 따지면 분명 납득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그것을 끝까지 관철한 사람이 성과를 얻었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논리나 이성으로 얻은 것보다 더 값지다. 명화를 향한 여러 평가들이야말로 그만큼 그가 희망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를 보여준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모두가 '합리적'으로 시스템을 굴러가게 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명화는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매김한다. 물론 그의 희망은 굉장히 다른 형태로 종착점에 다다르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자멸했을 결말에 비하면 확실히 나은 편이다. 무엇보다 이성이 우선시되면 벌어지는 일과 그에 따른 반동을 우리는 현실에서도 목격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명화가 그 이성적인 시스템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간직한 건 현실 고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까지 필자가 ‘고구마 같은 명화’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고 결론내리기까지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엄태화 감독의 인터뷰 발언을 덧붙인다. 필자의 글에는 동의하지 못해도 감독의 말을 들으면 명화의 존재 이유를 수긍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현실적인 희망이 무얼까를 많이 고민했어요. 그 문제를 명화란 인물이 상징하고 있고요. 명화 캐릭터가 중요한 이유는 질문을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에요.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누군가는 질문이나 방법을 찾을 시도 자체를 안 하잖아요. 이 영화가 가진 엔딩도 명화처럼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끝났으면 했어요. 그게 희망 아닐까요?"
(8월 29일 데일리안 기사 「엄태화 감독 "모든 걸 쏟아부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후회 없다" [D:인터뷰]」 발췌)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