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부터 이어져온 불신과 충돌이 우크라이나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재, 우리는 무엇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꿈꿀 수 있을까? 여기, '영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DMZ영화제)가 오는 14일 개막한다. 경기도를 기반으로 해 DMZ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상영되는 다큐들이 비단 분단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 생명, 소통의 가치를 다룬 다큐멘터리라면 모두 환영이다. 전통 다큐뿐만 아니다. 허구를 기록의 한 차원으로 제시하면서 다큐 형식을 확장하는 실험적 작품, 무빙 이미지·아티스트 비디오·애니메이션·실험 영화 작업을 망라한 작품들도 상영 리스트에 포함된다.
지난 1년 사이 세계에서 화제를 모은 54개국의 147편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DMZ영화제. 150편에 달하는 영화 중 무얼 볼지 고민인 당신을 위해 추천작 8개를 추려봤다. 모든 이들의 추천작일 개막작 <이터널 메모리>는 리스트에 넣지 않았다. 참고로 <이터널 메모리>는 9월 20일 전국 개봉 예정이니, 개막식을 놓쳤다면 극장을 찾자.
<카메라를 든 남자들: 관동대지진을 기록하다>
미노루 이노우에 | 일본 | 2023 | 81분 | 코리안 프리미어 | 베리테
1923년 9월 1일, 진도 7.9의 대지진이 도쿄 일대를 강타한다. 도시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10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시점에 공개된 <카메라를 든 남자들: 관동대지진을 기록하다>는 역사상 유례없는 재난의 현장에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영화 카메라를 들고 기록한 세 사람의 궤적을 되살린다.
당시 대지진을 기록한 세 명의 카메라맨이 남긴 푸티지를 활용한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이자 재난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역사 다큐멘터리인 <카메라를 든 남자들: 관동대지진을 기록하다>는 100년 전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조선인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의식도 빼놓지 않는다. 진실을 발굴하고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보이는 '베리테' 섹션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품.
<블루 아이디>
부즐랏 카란, 부르주 멜렉올루 | 튀르키예 | 2022 | 84분 | 아시안 프리미어 | 베리테
지난 2012년 10월, 튀르키예의 유명 여성 배우 '루즈'가 성전환 과정을 시작했다. 유명 배우의 성전환 과정은 보수적인 튀르키예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동성애 및 트랜스젠더 혐오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루즈에게 필요한건 핑크색이 아니라 ‘블루 아이디’이기에. 이 파란색 신분증이 성적 자율권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표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할까. DMZ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은 “지정성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또 하나의 투쟁에 소수자를 향한 우리 사회의 연대의식과 과제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라고 추천의 변을 남기기도.
<망명자>
김현경 | 한국, 미국 | 2023 | 84분 | 아시안 프리미어 | 국제경쟁
상실의 아픔은 과거를 소환한다. 김현경 감독의 언니가 이른 나이에 죽은 후, 그녀의 엄마는 한국전쟁 피난민 시절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버린 의자, 그릇, 인형 등을 끊임없이 가져오고 집은 잡동사니로 가득 찬다. 감독은 어머니의 저장강박증의 근원을 추적하며, 한국전쟁 시기 사라진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대면한다.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솔직하게 드러내어 보여준 용기와 통찰은 분단의 상처를 진정으로 대면하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오류시장>
최종호 | 한국 | 2023 | 65분 | 월드 프리미어 | 한국경쟁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터전이고, 누군가에게는 문화기지이며, 누군가에게는 개발을 위한 사냥터인 전통시장의 10년을 기록한 <오류시장>은 지역 라디오방송 구로 FM의 마을 미디어 활동가이자 다큐멘터리스트인 최종호 감독의 오랜 인내의 결실이다. 하나의 이슈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그 진화 경로를 추적해가는 관찰 다큐멘터리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
장 뤽 고다르 | 프랑스, 스위스 | 2023 | 20분 | 코리안 프리미어 | 에세이
장 뤽 고다르의 팬이라면 놓쳐선 안될 영화다. 그의 마지막 영화로 공인된 작품이기에. 고다르는 경력의 전부를 이미지를 잘라내고 이어 붙이는 몽타주의 방식으로 작업해왔는데,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예고편>이 바로 그런 영화이다. 이 영화는 자신이 죽음으로 인해 결코 실현되지 않을 영화에 대하여 고다르가 상상한 아이디어, 레퍼런스, 비주얼을 제시한다. 모든 영화의, 모든 쇼트에 대해 치밀한 콘티를 그렸던 고다르의 전통을 증명하는 작품이자 ‘시네마’에 관한 완벽한 작별 인사.
<철로 만들어진 나비>
로만 류비 | 우크라이나, 독일 | 2023 | 84분 | 코리안 프리미어 | 정착할 수 없거나 떠날 수 없는: 너무 많이 본 전쟁의 긴급성
영화제는 테마전 ‘정착할 수 없거나 떠날 수 없는: 너무 많이 본 전쟁의 긴급성’을 통해 다양한 위치와 장소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목소리를 담는다.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프리고진 때문일까, 테마전에 소개된 12개의 영화 중 <철로 만들어진 나비>에 먼저 눈길이 간다.
지난 2014년 7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던 비행편이 동부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요격된다. 이 사고로 29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감독은 최근 세계사의 전환점에 대한 예술적이면서 증거에 기반한 조사를 통해 희생된 인류의 손실을 각성케하고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
<비보이>
장의진 | 한국 | 2023 | 81분 | 월드 프리미어 | 베리테
<스트릿 우먼 파이터 2>, 일명 '스우파2' 과몰입러로서 고른 영화다. 영화는 비보이 세계 챔피언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뒤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비보이 '피직스'의 10여 년의 삶을 다룬다. 감독은 십 대 시절의 옛 자료와 후일담을 교차시키며 피직스가 파죽지세로 세계에 진출하던 시기 그에게 단순한 기교가 아닌 자유로운 표현을 충고한 미국의 한 댄서의 말을 회고한다. 행복으로의 길을 찾기 위해 다음 행보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작품.
<월성>
남태제, 김성환 | 한국 | 2019 | 83분 | 뉴스타파: 카메라를 든 목격자들
아카이빙전 ‘뉴스타파: 카메라를 든 목격자들’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독립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활동을 보여온 뉴스타파의 역사를 정리한다. 해당 섹션에서 상영되는 9개의 영화 중 특히 눈에 띄는 영화는 <월성>.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로 많은 이들이 국내외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요즘 꼭 봐야 할 영화다.
월성 지역에는 원자력과 관련된 거의 모든 종류의 시설들이 밀집해 있다. 정부와 원전 사업자인 한수원은 끊임없이 원전의 안전성을 역설하지만, 정작 그곳의 주민들은 공포에 시달리며 나날을 보낸다. 원전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암을 비롯한 갖가지 질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원전 폐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황분희를 따라간다. 그 역시 갑상샘암에 걸린 황분희 씨는 암에 걸린 618명의 주민들과 함께 한수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이주 대책을 요구하는 싸움을 이어 나간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원전에서 1km 이내에 살던 주민들이 싸움의 주축이었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그 거리가 점차 늘어난다. 결국, 원전 문제의 당사자는 그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