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연인에게〉(2021)은 이름이 많은 영화다. 오리지널 제목은 “Die Frau des Piloten”, 번역하자면 “파일럿의 아내”다. 그런가 하면 독일 개봉 제목은 “Die Welt wird eine andere sein”, 번역하자면 “세계는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다” 쯤 될 것이다. 영문 제목은 “Copilot”, “부조종사”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 네 개의 제목들은 다 저마다의 진실을 품고 있다.
1995년, 독일에서 만난 치대생 사이드(로저 아자르)와 의대생 아슬리(카난 키르)는 공통점이 많았다. 사이드는 레바논에서 왔고, 아슬리는 튀르키예에서 왔다. 두 사람은 같은 무슬림이고, 백인들의 대륙으로 유학을 온 중동인이었으며, 하고 싶은 게 많은 청춘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이윽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쉽지 않다. 일단 사이드부터 번뇌가 많았다. 그는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꾸지만, 자식이 내전 중인 레바논을 떠나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치과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집안의 기대에 짓눌린다. 사이드는 이 길이 ‘안락하고 비겁한 삶의 길’이라고 말하며 부끄러워 한다. 아슬리 쪽도 쉽지 않다. 아슬리의 어머니는 사이드가 튀르크인이 아니라 아랍인이란 사실을 못마땅해 한다. 사이드는 “저도 같은 신에게 같은 방향으로 절을 바치며 기도한다”고 항변하지만, 아슬리의 어머니는 사이드의 말을 못 들은 체 한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다. 그런데 사이드는 언제부터인가 제멋대로가 되었다. 자주 집을 비우고,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처음엔 아슬리도 사이드를 이해해보려 했다. 갑갑했겠지. 독일인 친구들은 은연 중에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고, 집에서는 치과의사의 길을 강요하며, 아슬리의 부모에게는 결혼했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
하지만 아슬리가 보기엔 사이드도 자꾸 스스로 고립되는 길을 걸었다. 마음이 편안하다는 이유로 모스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독일인 친구들에게 “너희는 이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화를 냈다. 사이드에겐 아슬리가 못 알아듣는 아랍어로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늘어났으며, 슬쩍 잠자리를 벗어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중전화까지 걸어가서 전화 통화를 하고 오는 밤도 늘어났다.
아슬리는 점점 사이드가 낯설어졌다. 사이드는 이자 놀이를 금하는 쿠란의 가르침을 비무슬림 친구에게 강요했고, 술을 끊는가 하면 늘 담배를 달고 살던 아슬리에게서 담배를 빼앗아갔다. 절친했던 친구와도 친구가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절연했다. 말끔하게 면도를 한 얼굴로 “독일인들은 다들 이러잖아?”라며 알몸으로 바다 수영을 즐기려던 세속적인 사이드, 독일인 친구들과 어울려서 진실게임을 하던 사이드는 어디로 간 걸까. 지금의 사이드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채 아슬리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
2.
오리지널 제목 “파일럿의 아내”와 영문 제목 “부조종사”가 가리키는 건 아슬리다. 조종사가 되고 싶었던 사이드는 아슬리에게 “나의 부조종사가 되어줘”라 말한다. 얼핏 들으면 로맨틱한 사랑의 고백이지만, 곱씹으면 아슬리의 삶이 사이드에게 종속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영화 내내 아슬리는 영문도 모른 채 사이드가 시키는 대로 함부르크로, 베이루트로, 플로리다로 향한다. 사이드의 당부대로 그의 행방에 대해 함구한다. 이 쉽지 않은 사랑은 아슬리에게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를 요구한다. 아슬리는 이 관계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몰라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사랑 때문에 사이드를 용서한다. 부조종사니까, 파일럿의 아내이니까.
그렇다면 독일 개봉 제목 “세계는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다”가 가리키는 건 무엇일까.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의 연인에게〉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를 영원히 바꿔놓은 사건인 9・11 테러를 다룬 작품이다. 9・11 테러를 다룬 대부분의 작품이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과 달리, 〈나의 연인에게〉는 관객들에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테러의 가해자가 되었다는 참담함을 경험케 한다.
그 체험은 고통스럽다. 관객들은 하늘을 날고 싶다며 환하게 웃던 사이드의 얼굴이 점점 낯설어지다가 끝내 전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아슬리와 함께 겪는다. 가장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삶을 이야기하던 이가 끔찍한 테러를 저질렀다는 공포 뒤엔 윤리적인 딜레마가 도사리고 있다. 사이드의 삶을 지척에서 봤기 때문에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과, 너무도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이의 삶에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자꾸 충돌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서늘하다. 아슬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사이드가 “나의 연인에게” 남긴 편지를 읽는다. 사이드는 편지에서 “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라며 아슬리를 “나의 부조종사”라 부른다. 그건 대체 무슨 의미인가? 아슬리 덕분에 그런 끔찍한 테러를 저지를 수 있었다는 얘기인가? 그 수많은 피에 아슬리의 책임도 있다는 뜻인가? 아슬리에게 그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언제였을까? 사이드가 아랍어를 쓰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아슬리에게 비밀을 만들던 순간? 아슬리와 가족들에게는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예멘으로 건너갔다 왔던 순간? 아슬리가 자신의 행방에 대해 함구해달라던 사이드의 부탁을 따랐던 순간?
두 사람이 조심스레 나누던 사랑의 밀어인 “부조종사”라는 말이 죗값의 연대책임이 되어 돌아오는 순간, 아슬리는 남편을 이해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지옥에 빠진다.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은 파국. 심지어 아슬리에겐 자기 자신을 온전히 연민할 수 있는 여유도 없다. 잘 몰랐다는 이유로 내가 이 모든 참극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누군가를 사랑했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 자리까지 흘러오게 된 걸까? 그렇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아슬리를, 거울 속에 비친 아슬리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고개를 돌려 응시한다. 자신을 “부조종사”로 호명하는 이 편지에 아슬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거울 속의 아슬리들은 자기 자신을 가만히 지켜본다.
3.
9・11 테러가 일어난 지 22년이 지났다. 사이드는 아슬리에게 남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이해 못 해도, 내가 남기고 간 세상은 달라질 거야. 그 결과를 보고 다들 행복할 거야.” 사이드가 남기고 싶었던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편견에 시달리지 않는 세상? 아랍인이라는 이유로 튀르키예인에게 차별받지 않는 세상? 하지만 초대형 테러 따위로 그런 세상이 오진 않았다는 사실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세상은 장벽을 높이고 문을 걸어 잠그며 폐쇄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슬람을 향한 이슬람 외부 세계의 혐오는 더 짙어졌다.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그러면 그럴수록 지하디스트(이슬람 근본주의에 뿌리를 둔 무장투쟁주의자)가 되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 악순환 속에서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는 20년 가까이 끝나지 않는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졌고, 그 결과를 보고 행복해 한 건 전쟁을 통해 제 세를 불린 군벌들 뿐이었다. 사이드가 남긴 편지는 그의 선택이 지극히 틀렸다는 것을 관객들이 모두 알고 있기에 더 비극적이다. 그는 자신이 바랐던 것 중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목숨만 앗아갔다.
그리고 그 어리석고 참혹한 편지를 아슬리와 공동 수신하게 된 관객들은, 아슬리의 자리에서 함께 사이드를 바라보며 불편한 회한에 잠기게 된다. 과연 우린 그가 용서받지 못할 결론으로 달려가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폭력과 극단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게 지난 뒤에야 던지는 질문은 무용하고, 폐허 위에 어리석은 인간이 남긴 아이러니만 남았다. 21세기의 첫 해, 그렇게 “세계는 다른 무언가가” 되기 시작했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