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시리즈, 어벤져스 영화들로 이제는 익숙해진 ‘평행우주’ 이론. 제95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는 평행우주 이론을 배경으로 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감독 다니엘 콴‧다니엘 쉐이너트, 2022)가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7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는 한국영화에서 평행우주 이론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9월 13일 개봉한다. 주인공은 <안녕, 내일 또 만나>(감독 백승빈)이다.
백승빈 감독은 <나와 봄날의 약속>(2017)에서 감독, 각본을 맡은 이후 5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본인의 표현처럼 '기이하고 괴랄(?)했던' 전작과 달리 <안녕, 내일 또 만나>는 보편적인 정서에 대한 공감을 목표로 만든 영화란다. 영화는, 현실이 지긋지긋하도록 지겨운 소년 동준(홍사빈)이 그의 청소년기의 우상 강현(신주협)과 겪었던 안타까운 사건을 출발점으로 한다. 늘 어른 같았던 형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목도한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영화는 3개의 평행우주를 보여준다.
그런데 <안녕, 내일 또 만나> 평행 우주 속 인물들은 각각 다른 선택을 했음에도 모두 비슷한 결로 살아가고 있다. 나의 다른 선택이 다른 평행우주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백승빈 감독은 <안녕, 내일 또 만나>에서 어떤 평행우주를 꿈꾼 것일까? 3개의 평행우주에서 어린 시절 형을 향해 손 내밀지 못했던 후회와 회한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영화는, 말미에 이르러 가장 놀랍고도 매혹적인 평행우주 이론을 탄생시킨다. 대학로 한 카페에서 백승빈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팬데믹이라는 힘겨운 상황에서 제작하고, 이제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상업영화도 힘들겠지만, 독립영화도 개봉이 치열하거든요. 영화에 2021년이라는 자막이 세 번 나와요. 2020년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듬해인 2021년에 개봉할 거라 생각했던 거죠. 개봉까지 2~3년이란 시간을 묵혀두게 된 건데, 개인적으로 그 기간 동안 배우들이 영화 밖에서 어떻게 살까를 상상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죠. 독립영화도 매년 수 백편이 쏟아지니까요. 코로나19 때문에 개봉이 밀린 영화들도 많을 테고요.
그래서인지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면 다들 대견하게 느껴지고요, 분명히 모든 개봉 영화들은 저마다의 장점이 있을 거란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예전에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너무 쉽게 감상을 정리했는데, 요즘은 아무리 평가가 갈리는 영화라고 해도 개봉할만한 장점이 분명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거죠.
영화산업이라는 플랫폼에서 예술노동자로 살고 있다 보니, 요즘은 예술 개념보다 노동의 개념으로 영화를 대하는 것 같기도 해요. 영화판에 오래 있다 보니, 영화든 드라마든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감상평을 할 때면 저만의 기준이 생겼어요. 좋은 작품이라면 열심히 이야기하되, 별로였다면 아예 이야기하지 말자는. 이쪽 산업 종사자로 하나의 룰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요즘 개봉영화들은 나름 장점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하셔서요. 그러면 <안녕, 내일 또 만나>도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어떤 장점이 있는 영화인가요?
제가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 <수성못>(2017)을 찍은 유지영 감독이랑 친한데요, 영화를 보고 “소재가 평행우주 이야기인데,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이 한국 영화에 있었나? 같은 평행우주 이론으로 미국에서 10대를 보낸 감독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같은 영화를 찍는데, 한국의 가장 보수적인 고장 대구에서 10대를 보낸 너는 평행우주를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요.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해보죠. 제목 <안녕, 내일 또 만나>부터 질문드릴게요. 윌리엄 맥스웰의 소설 「SO LONG, SEE YOU TOMORROW」에서 따왔다고요. 소설 글귀 중에 “그는 당시 내가 평소에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더, 우러러볼 만한 아이였고, 나는 어떻게든 노력해 그를 닮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는 구절이 영화 설정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영화의 시작을 제목과 연결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맞아요. 영화 속에서 강현(신주협)이 읽고 있는 소설 제목이죠. 윌리엄 맥스웰의 소설이고요, 국내에서는 2000년대 중반에 출간되었다가 지금은 절판 상태에요. 저는 뒤늦게 그걸 읽었어요. 그런데 소설 속 이야기가 제가 대구에서 보낸 10대 시절과 얼추 비슷하더라고요. 소설 주인공도 친구에게 도움은 주고 싶었지만 못했고요, 저 역시 아파트 위층에 살던 형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던 기억, 아쉬움이 있었죠.
제가 영문학을 전공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영화 작업을 하거나 서사를 창작할 때, 제 깊은 마음의 우물 속에서 물을 길어올리듯 작업하는 스타일이에요. 제 안에 맞닿은 부분을 끌어내서 스토리를 만든다고 할까요? 그 소설을 읽을 때, 한창 영화들이 엎어지면서 작업이 안 되던 시기인데요. 그때 답답했던 상황들과 책 이야기를 <의뢰인>(2011)을 만든 손영성 감독에게 했더니,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썼는데, 제작지원을 받게 되면서 영화로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픽션과 논픽션이 어디까지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뒤섞여 있는 영화죠. 제게는 심장 뛰는 경험이었는데, 관객에게도 그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2021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개막작으로 첫선을 보였죠. 그때 감독님께서는 “이 영화는 후회와 회한에 대한 영화이며, 평행우주의 또 다른 나의 이야기에서 오는 따뜻한 공감이 있는 영화”라고 설명하셨어요.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다면요.
이 이야기는 10대 소년 동준(홍사빈)이 당시 자기 모습이 싫어서 늘 다른 모습의 나를 꿈꾸는 이야기에요. 다른 우주에 또 다른 내가 있고, 자신을 지탱해주던 친구가 있다는 거죠. 그 시기를 견디고 돌파하게 해주는 친구에게 큰 일이 생겼는데, 그때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던 후회가 각각 다른 운명을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른 운명을 영화에서는 세 개의 평행우주로 설정했는데요, 그 후회를 어떻게든 바로 잡으려고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요. 그때는 그러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고 인생의 한 구간을 넘어섰을 때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그때 하지 못했던 일을 그 친구를 위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결국 내 후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고, 이 긴 여정의 마무리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여행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한한 우주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라는 것이 ‘평행우주 이론’의 기본 개념 같습니다.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평행우주란 무엇인가요?
주인공 소년 동준이 경외감을 가졌던 형 강현은 늘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서 걷잖아요. 위험하게요. 왜 위험한 걸 하느냐는 동준의 말에 강현이 “지긋지긋한 삶에 나름대로 반항하는 거야”라고 답하죠. 발 하나 잘못 디디면 떨어지듯이 손 한 뼘 뻗으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게 저는 평행우주라고 생각해요. 어디를 큰 결심해서 가는 게 아니라요. 다른 우주들이 정말 다른 우주가 아니라, 뭔가 나비효과 같기도 한데, 조금만 내가 손을 뻗고 뭐 하나 다른 선택을 하면 그 경로의 인생이 생기는 거죠.
평행우주 이론을 영화에 큰 틀로 가져오면서 꼭 지키고자 했던 기준 같은 것이 있을까요?
한 해외 영화제에서 “3개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편집 원칙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3개의 세계가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라고 답했던 기억이 나네요. 손만 뻗으면 넘어갈 수 있는? 결국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이 옆에 있어서 참 좋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 제가 가족에 대해 가진 입장이기도 했거든요. 그 사람이 내 옆에 있어서 좋고, 그때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어서 좋다는.
전작들과는 확 달라졌네요.
네. 이번 영화는 제 이전 영화들과 완전히 달라요. 예전에 제 영화의 관객은 평론가나 프로그래머였죠. 학교에서는 교수님이었고요. 물론 제 영화를 좋아해주시는 관객도 있지만,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는 편이에요. <안녕, 내일 또 만나>는 구체적 목표가 있는 영화입니다. 제 전작들을 보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던 가족이나 지인 누구나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따뜻해보인다면 그나마 다행이겠고요. 원래 제가 안아주고, 포근하고 뭐 이런 걸 별로 안 좋아하던 사람이거든요(웃음).
여쭤보기 그렇긴 한데, 이렇게 바뀐 계기가 있었나요?
5년 전에 큰 경험을 했어요. 제가 상암동 첨단산업센터 근처 오피스텔에서 7년 정도를 살았는데요. 감독동이 있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작업을 한 거죠. 그때 인간 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은 적이 있어요. 너무 쇼크를 받아 술을 마시고 왕복 8차선 도로를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큰일을 어떻게 극복하신 거예요?
그때 한국영상자료원의 유성관 선생님이 칼럼을 한번 써보라는 제의를 주셨어요. 제가 영문학 전공한 걸 아시니까, 좋아하는 영미권 소설을 소개하면서 영화로 만들면 어떻게 만들지 글로 써보라고 하셨죠. 너무 행복했어요. 그때 소설 <안녕, 내일 또 만나>로 칼럼을 썼는데, 이걸 영화로 만들게 된 겁니다. 지금은 다른 칼럼에 썼던 소설로 영화를 준비하고 있고요. 칼럼에 썼던 소설로 다 영화를 하나씩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그분 덕분에 영화가 빛을 볼 수 있었네요. 기자간담회에서 영화에 감독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구체적인 부분을 몇 가지 이야기해주신다면요?
동준의 강현이 형이 윗층에 살았다는 것처럼 제 우상도 윗층에 살았어요. 그 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도 따라가서 형이 경찰차를 타고 가는 것도 봤죠. 그 현장에 아파트 주민들이 다 나와서 봤던 것들 모두 제 자전적 이야기에서 가져온 설정입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적힌 신문지 쪽지도 제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성인이 된 동준(심희섭) 에피소드에는 픽션이 많죠. 영화에서는 누나로 나오지만, 사실 저는 여동생이 있고요.
어머니 에피소드는 모두 제 자전적인 이야기에요. 제가 미취학 아동 때였을 때 엄마가 <에일리언 2>(감독 제임스 카메론, 1986)을 보러 극장에 제 손을 잡고 가셨어요. 왜 저를 데려가셨나 모르겠지만요. 실제로 영화 배우를 꿈꿨던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영화에서도 나오듯 해리슨 포드나 리처드 기어였고요. 아, 제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처럼 그렇게 못된 분은 아니고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입니다(웃음).
영화에서는 강현으로 나오죠, 혹시 그 분이 영화를 보면 자기 이야기라고 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겠는데요? 아픈 기억을 상의도 없이 영화에 썼다고 뭐라고 할 수도 있고요.
제대하고 복학을 했을 때였어요. 싸이월드 방명록에 “혹시 내가 아는 백승빈?”이라고 한 줄이 남겨져 있더라고요. 너무 놀랐어요. 그 사건 이후로는 형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가슴이 뛰어서 어떻게 답변을 해야하지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이틀 쯤 지났을까, 형이 메시지를 지웠더라고요. 더 놀랐죠.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스탠 바이 미>(감독 로브 라이너, 1986)라는 영화가 있어요. 거기서 크리스(리버 피닉스)가 심약하지만 문학적 재능이 있는 고디(윌 휘튼)를 진짜 형처럼 끌어주잖아요. 고디가 그래요. 친구들이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한다고요. 그러니 크리스가 그렇지 않다고. 넌 글 쓰는 거 좋아하니 나중에 작가가 되라고요. 나중에 쓸 것이 없으면 우리 이야기를 쓰라고요.
만약 그 형이 <안녕, 내일 또 만나>를 본다면, 분명 자신의 이야기란 걸 알 텐데요.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제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했던 부분이에요. 어디선가 형이 “어, 승빈이가 우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네”라고 이해해줄 거라고요.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감당해야겠지만요.
영화 개봉으로 두 분이 다시 만나면 좋겠네요.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영화에서 사랑을 주는 이는 대부분 여성입니다. 엄마, 누나, 여교수, 학원 원장 등이죠. 반면 영화에서 아버지는 모든 평행우주에서 부정적인 상으로 그려집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져오면서 영화적 동력이 생기는데요. 제 아버지는 사실 영화에서처럼 가부장적이거나 폭력적인 분은 아니십니다(웃음). 오히려 전형적으로 말씀을 안 하시는, 그래서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분이셨죠. 제가 10대를 보낸 대구라는 도시, 그곳의 남성과 가부장에 대한 코어라고 할까요? 거기서 뛰쳐나오고 싶었던 것들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겠죠.
아이러니한 경험을 얼마 전에 했어요. 여성영화제에서 피칭을 하게 되었는데요. 피칭 전에 두 달 정도를 매주 서울에서 연습합니다. 이삼십 명 되는 여성들 속에서 저만 유일하게 남자였어요. 30대 젊은 여성들 사이에 40대 중년 남성이라니! 그런데 불편하지 않더라고요.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남자 그룹이랑 뭘 하는 게 불편했거든요. 운동도 잘 못하고요. 그런데 이번에 여성영화제 피칭을 마치고 뒤풀이에 갔는데 그렇게 편하더라고요. 모르는 사람 천지인데 말이죠(웃음).
각 시간대에 사는 인물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또 다른 평행우주에서 새로운 나를 꿈꿉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면 동준의 삶은 그리 달라진 거 같지 않아요. 그래서 사실 강현이가 하는 말이 처음에는 영화의 주제 같았어요. “화내고 소리도 질러. 그래야 살아. 그래야 안 죽고 살 수 있어. 그러면 다른 우주의 내가 될 필요도 없어”라는 말이요. 감독님도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갖고 영화를 찍으신 건가요?
학교를 간다거나, 남자라면 군대를 간다거나 하는 삶의 바운더리들이 있어요. 주로 살던 곳에 변화가 있다면, 변화가 만들어내는 방향들이 있잖아요. 조금씩 다르죠. 그걸 선택함으로써 다른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러면서 이전 관계들이 흐릿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다른 길을 가더라도 비슷한 결말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운명론자까지는 아니지만요.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계기가 되는 ‘라이프 체인징 익스피어리언스(life-changing-experience)’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10대까지는 가족과 살죠. 대학을 다른 지역으로 가면 가족과 떨어지고, 아니면 그 지역 사람들과 어울리죠.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면 부모님들이 그렇게 울잖아요. 다시 못 볼 사람처럼요. 영화에서 “같이 가자”라고 좀 극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저 역시 당시 형에게 그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실제 그 장면을 찍을 때 홍사빈 배우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요.
어떤 이야기를 하셨어요?
대사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겠느냐고요. 현장에서 고민하고 있는 저를 홍사빈 배우가 보더니, 여러 버전으로 준비해서 할 테니 좋은 걸로 골라달라고 하더라고요. 왜 감독 머리 위에 있는 배우들이 있잖아요. 홍사빈 배우가 그랬어요. 그 또래에 연기자들이 참 많은데, 홍사빈 배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가 오디션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목소리인데요, 신뢰감을 주니까요. 홍사빈 배우의 목소리에서 그런 걸 느꼈죠. 예전에 <장례식의 멤버>(2008)에서 열아홉 살 이주승 배우를 만났을 때 같더라고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는 가상의 책 '모든 만약은 아프다'라는 강현의 소설이 나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인가’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때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 그러니까 경찰차가 멈춰 섰던 순간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하면서 이야기는 급반전됩니다. 용기를 낸 선택을 하고서야 팍팍했던 삶이 다시 바뀌게 되는 건데요, 손 한 뼘 뻗어서 바뀌는 거죠. 그것이 아마 감독님께서 생각하신 평행우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맞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이 제 머릿속에만 있던 거고,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했던, 빙빙 돌던 건데, 정확히 말씀해주신 거 같아요. 당시 형이 경찰차로 실려 가는데, 아파트를 빠져가는데, 제가 한 번이라도 봤으면, 붙잡았다면 운명이 달라졌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영화에서는 “내일 보자”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몇십 년이 지나서 만나잖아요.
그런데 큰 강현 역을 한 송창의 배우가 그 운명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거 같다는 대사를 해줘야 하는 순간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소름 돋는 건, “어제 본 거 같다”라는 대사를 배우가 어떤 톤으로 이야기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는데, 손창의 배우가 첫 테이크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실제로 저는 그 형을 다른 데서 만나도 못 알아볼 지도 몰라요. 시간이 많이 흘렀고, 외모도 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손창의 배우가 그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준 거죠. 어제 본 거 같다면서요.
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손만 뻗으면 바로 운명이 달라지는 세계로 가잖아요. <에브링씽 에브리웨어 앤 올앳원스>는 그게 좀 다른 거 같아요. 테마가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해지고 다정해지자는 건데, 그게 그 영화가 그렇게 좋게 느껴지는 부분인 것 같더라고요. 다정하고 친절하게 애정을 표현하고요. 그게 어떻게 보면 용기가 아닌가. 어머니도 본인이 배우의 꿈을 안 하고 대구에 있으면서 아버지 만나 결혼하고 사신 건데, 결혼을 안 했으면 배우를 하셨을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인 거 같아요.
어쩌면 <안녕, 내일 또 만나>는 평행우주 이론을 빌려서 용기 있는 선택을 권하는 영화가 아닌가 싶네요.
저는 어떤 좋은 생각이 있어도 문장으로 만들지 못하면 본인이 잘 모르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대한 말로 쓰려고, 표현하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방금 기자님께서 정리해주신 말씀이 이 영화를 표현하는 한 문장인 것 같습니다.
과찬이시고요. 이제 감독님께 질문을 드려야겠네요. 영미 낭만주의 문학에 푹 빠져 사셨다고요. 영화도 만드시고,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하십니다. 만약 평행우주가 있다면, 다른 우주의 백승빈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영화 속에도 나오는데, 저는 사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해요. 아카데믹한 거죠. 학교에서 강의를 하든, 어떤 형태로든요. 아마 아버지가 교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화아카데미에서 강의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숭실대에서 시나리오 강의도 3년 정도 했거든요. 그때 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시나리오 수업을 하면서 정말 좋았어요. 이십대 후반 친구들이 서사를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와, 나는 이 나이 대에 이런 생각 못했는데 하는 것도 느꼈죠. 그중에 몇몇 멋진 친구들이 있었는데, 훗날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뿌듯하면서 짜릿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작가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요.
한편으로는 제가 영화아카데미를 갈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에요. 친구들은 다 알죠. 영화에서도 외향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많은 기회를 경험할 수 있고, 그게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줄 수 있다는 말, 그건 어머니가 하신 말이었어요. 영화아카데미를 갔기에 가능했던 말이죠.
어머니를 배제한다면요?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버지처럼 집 근처 학교에서 임용고시를 보고 편하게 교사를 했을 거 같기도 해요. 창작자로서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원칙이 있거든요. 단, 범법행위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요.
작가 말고도 많이 해보고 싶은 건 있죠. 제가 쓰고 만드는 것들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제가 우울한 감정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어요.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다 그렇겠지만요. <나와 봄날의 약속>(2017)으로 로테르담영화제에 갔을 때 들었던 질문이에요. 한 백발 노인이 “강하늘이 연기한 우울한 작가가 당신처럼 보인다. 영화 만들고 여기 오니 어떤 느낌이냐”라고 물었던 적이 있어요. 나중에 우울증이 자신을 스마트하게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퓰리처상 작가 소설 한 부분이 떠오르더라고요. 쇼크였죠. 내가 우울한 기분으로 뭔갈 쓰고 만드는게 이것 때문인가? 우울하면 보통 아무것도 안 하는데 말이에요. 오래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거 같게 느껴져서요.
차기작은 뭐로 준비 중이신가요?
아까 말씀드린 여성영화제 피칭작인 <아이엠러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수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져요. 그곳에 아무도 가지 않는데, 그 저수지를 마치 취미처럼 찾아가서 쉬는 여자 ‘오사랑’이 주인공입니다. 그 저수지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거죠. 거기에 관심 있는 남자를 데려오고 싶어해요. 약을 먹여서 데려오는 건데요, 어찌 보면 납치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영화적으로 소개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주제는 ‘사랑은 병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환자이며, 우리 모두는 환자가 되고 싶다’라는 거죠.
매혹적인 한 문장이네요.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영화 러닝타임이 144분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내가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살 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그게 앞으로의 삶을 더 열심히 살 수 있게 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드는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하거든요. 관객들도 그런 걸 느끼신다면 좋겠습니다.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