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이 잘 풀리지 않는 작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이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부모가 운영하는 별장에 방문하고,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나디아(폴라 비어)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애인이라고 생각한 데비드(엔노 트렙스)를 보고 겉돌기만 한다. 그런 와중 저 멀리서 산불이 점점 그들을 향해 오고 있다. 당대 독일을 대표하는 거장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신작 <어파이어> 개봉에 맞춰 한국을 방문했다. 근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며 수많은 관객들을 만난 크리스티안 페촐트와 <어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스포일러성 정보가 있습니다.


Q. 한국에서의 일정은 어땠나요?

이곳에서 굉장히 멋진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첫 아시아 방문이고, 당연히 한국에 와본 것도 처음이에요. 이렇게까지 집중력 높고 멋진 관객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약간 슬퍼요. 한국에서 하는 마지막 인터뷰고, 통역사님과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일정이기 때문에 멜랑콜리한 기분이 듭니다. 이 멜랑콜리한 기분이 영화에서도 많이 이야기하는 그런 기분인 것 같습니다.

Q. 한국에도 페촐트 감독님 팬이 많습니다. 한국 오셔서 관객분들도 만나 뵀을 텐데, 어떤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자주 들은 질문 중 하나는 독일이 분단 후에 통일된 국가인데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어떤 경험한 제가 이 경험을 한국 관객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독일의 분단은 독일이 직접 잘못해서 일어난 결과지만, 한국의 분단은 한국인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게 둘 사이에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외에 두 국가의 사례를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한국 관객들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 그리고 열정이 한국의 영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고, 이걸 확인하게 돼서 기뻤습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Q. 원래 감독님 영화에는 독일 사회나 역사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제가 느끼기엔 이번 작품은 그런 게 없었던 것 같거든요. 혹시 감독님께서 넣으셨다면 어떤 부분에 독일 사회의 모습이 반영됐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에 한 교수님이 처음에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만들 때는 20년 혹은 30년 뒤에 후대 세대들이 우리가 어떻게 키스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춤을 췄는지, 어떻게 서로 속이고, 어떻게 고통을 받고,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요.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어파이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름을 배경으로 청년들의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영화가 굉장히 많습니다. 스웨덴, 미국, 프랑스, 그리고 한국 등 모든 나라에 이런 여름 영화들이 있죠. 과거엔 이런 여름 영화가 너무 많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여름이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지구를 망치고 있기 때문이죠. <어파이어>의 기저에 이런 생각들이 깔려 있습니다.

씨네플레이_ <어파이어>에 영감을 준 소설로 안톤 체호프의 단편 「다락방이 있는 집」을 꼽고, 생애 최고의 소설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이 그렇게 이끌렸을까요?

체호프는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가입니다. 아플 때나 아니면 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항상 체호프의 책을 챙깁니다. 저한텐 치료제라고 할 수 있죠. 체호프의 책을 보면 왜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왜 우리가 영화를 만드는지, 왜 우리가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설명이 아니라, 이 세계가 가진 복잡성과 긴장과 그 균형을 설명하고 싶어집니다. 체호프는 인간에게 친화적인 사람이고 아주 유머러스하지만 동시에 그의 작품을 읽으면 항상 눈물이 나곤 합니다.

Q. <어파이어> 시나리오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실은 다른 각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디스토피아적인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작업 초반에 코로나에 걸렸고, 침대에 누워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그때 꾼 꿈과 코로나 때문에 갖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을 쓰고 싶지 않다고 깨닫고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체호프의 단편을 읽었고, 삶을 찬미하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삶, 여름 그리고 대중에 대한 그리움이 이 각본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씨네플레이_ 나디아와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에 별장 주변에서 들리는 사운드 디자인이 굉장히 독특한데요. 실제 공간에서 들릴 법한 소리와 인공적인 소리가 겹쳐지는 것 같습니다. 초반의 사운드 디자인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그냥 마이크를 세워 놓는다고 해서 세계 그대로의 소리를 녹음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귀는 무언가를 들을 때 항상 필터링을 거칩니다. 여러 소리가 들리면 듣고 싶은 게 먼저 오고 나머지는 걸러지죠. 그래서 숲을 있는 그대로 녹음하면 필터링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제가 생각했던 건 동물들이 숲에 재난이 발생한다는 것, 숲에 불이 번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행기를 보지 못한 채 비행기의 소리만을 듣게 되죠. 이런 것들을 통해 목가적인 풍경에 위협이 당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직 사운드를 통해서만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어파이어> 촬영 현장

Q. 레온이 예술가로 등장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감독님의 자전적인 요소가 투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작 <운디네>에서는 물을 소재로 선택했고 이번에는 불인데, 불을 소재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원소 3부작’의 마지막인 작품에선 어떤 원소를 택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가족들이 제가 지금은 레온 같지 않다고 말했는데, 솔직히 저의 많은 부분이 레온의 모습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운디네> 촬영을 마치고 파울라 베어(한국표기로 폴라 비어)와 아주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희 둘 다 <운디네> 작업이 즐거웠기 때문에 이것이 끝난다는 사실에 조금은 슬펐죠. 그리고 운디네가 힘든 과정에서 승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부재하는 상태에서 물 밑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파울라에게 다음 영화를 찍는다면 당신이 더 자신감 있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나오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파울라는 잘 믿지 않는 듯이 “정말 한번 보고 싶네요” 대답했죠. 파울라에게 나디아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전해줄 때, 나디아는 젊은 여성이고 남자가 이 여자를 욕망하지만 이 남자의 욕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여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디아는 파울라 베어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파울라 또한 영화나 카메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원래는 공기를 세 번째 원소로 계류기구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흥미를 잃은 상태라 다음은 원소 이야기를 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Q. 촬영 전에 세트에서 배우들하고 미리 워크숍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워크숍 전후에 어떤 부분이 크게 달라진다고 느끼셔서 이런 방식으로 계속 작업하는지.

먼저 리허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세미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배우들이 함께 참여한다는 점입니다. 주연 배우들뿐만 아니라 대사가 단 한 줄인 배우도, 예를 들면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으로 앉아 있는 배우까지, 모두 함께 3일 동안 세미나에 참여합니다. 하나의 앙상블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개별 배우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이야기합니다. 연극에서 하는 것처럼 리허설을 한다기보다는, 그냥 한번 각본을 읽고 우리가 같이 영화를 보고 만화를 읽고 사진을 보고 음악을 듣고 그리고 촬영을 하게 될 모든 장소로 함께 차를 타고 갑니다. 사실 이 부분이 촬영할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촬영할 집에도 별장에도 가보고, 해안을 따라 쭉 걸어보기도 하면서, 배우들에게 무슨 일이 여기서 일어나게 될지 이야기하죠. 그럼 배우들이 자기만의 상상을 하고 그 판타지를 머릿속에 꾸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앙상블이 모두 각자의 집으로 떠나고 다시 대본을 읽어볼 때 새로운 감정,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면 배우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어떤 감정이 생기게 되는데,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배우들은 늘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미나를 하면 배우들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제가 가진 두려움까지 없앨 수 있습니다.

<트랜짓> 파울라 베어

Q. 파울라 베어와는 <트랜짓> <운디네>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계속 작업하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최근 페르소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베어는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트랜짓>을 찍기 전까지는 파울라 베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트랜짓>을 촬영한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 제가 놀랐는데, 그녀가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춤을 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파울라는 유명한 배우 아카데미에서 배운 것 같은 고전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닙니다. 춤과 아이다움의 느낌을 자아내는 움직임을 갖고 있고 그래서 굉장히 똑똑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파울라의 모습이 저에게는 신선했고 또 놀라웠습니다.

<피닉스> 니나 호스

씨네플레이_ 니나 호스와 작업하던 시기와 파울라 베어와 작업하던 시기에 감독님 영화는 어떻게 다를까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 영화에서 니나 호스는 피난 상황에 있는 여왕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어 니나 호스는 사회에서 낯선 존재이거나 죽거나 실업자이거나 항상 고독합니다. 저는 니나 호스와 총 6개의 영화를 작업했습니다. 여섯 번째 영화 <피닉스>가 끝나고 나서 저희 둘 다 이젠 휴식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피난의 상황에 대한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파울라는 니나와 아주 다릅니다. 파울라는 이 상황을 춤으로 표현할 줄 알고 또 직관적인 지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영화를 촬영할 때 조금 타협해서 만족하는, 그냥 편집으로 해야겠다 하고 끝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파울라와 작업할 때 저는 그런 타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파울라는 정말로 그 신을 제대로 표현할 때까지 연기하고, 그 점이 특히 놀라웠습니다.

Q. 월너스(Wallners)의 ‘in my mind’는 어떻게 사용하게 됐나요? 가사 중에 “사랑은 우리를 모두 장애물로 만든다”는 가사가 있는데 레온이 느낀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저는 제가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계속 듣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를 틀어 제가 고르지 않은 노래를 듣는 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사실 이건 제가 넷플릭스를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TV를 보면 제가 고르지 않은 방송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월너스의 ‘in my mind’ 또한 차에서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들은 것입니다. 각본을 쓰던 중이었는데, 제가 듣고 싶어서 들은 노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이 노래를 골랐던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바로 이 노래다 싶어 그걸 들으면서 남은 각본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레온은 사람을 눈멀게 하는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열망에 자기 자신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장님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자제력을 잃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레온은 삶을 놓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로 오기 3일 전에 TV를 켰는데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1978)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DVD와 블루레이를 갖고 있고 한 30번은 본 것 같은데, 그때 TV에서 나와서 다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독일에 있는 3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같이 보고 있겠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이 들었고, 그 순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월너스의 'in my mind' 커버

Q. <어파이어> 주인공인 레온과 나디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창문을 경계로 두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바바라>에서 안드레가 처음 바바라를 볼 때도, <운디네>에서 운디네가 요하네스를 바라볼 때도, <트랜짓>조차 창문은 주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창문 너머로 한 이유가 있을까요?

영화에서 창문을 즐겨 쓰는 이유가 둘 있습니다. 창문이라는 건 항상 틀이 있습니다. 그 틀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틀 안에 무언가를 담게 되면 그 안의 이미지는 더 특별한 것이 되고, 하나의 사진처럼 보입니다. 또한 틀이라는 건 그 안에 있는 이미지를 세상과 분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바라>에서도 창문을 사용했습니다. 창문은 국가와 개인을 분리하는 도구입니다. 한편 창문을 통해서 그 아래에 있는 바바라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마치 회화 작품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파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창문은 나디아와 레온을 분리시키는 것이기도 하면서, 창문 너머로 나디아를 볼 때 빨간 원피스와 초록색 들판, 빨랫감이 바람이 휘날리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게 보입니다. 다른 작품과 <어파이어>의 차이는 우리가 레온도 이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레온 역시 이 틀 속에서 이미지가 되는데, 이를 통해 레온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대상이 되고 이때 우리는 레온을 멍청한 예술가로 그립니다.

씨네플레이_ 주인공의 로맨스를 그릴 때 보통 1:1이 아닌 그 사이에 헤어진 연인이 있거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있거나 하는 식으로 느슨한 삼각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영화로 찍기 위해서는 이 사랑의 관계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영향을 통해서 이 사랑의 관계가 파괴될 때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관계가 파괴되기 위해선 늘 제3의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삼각관계가 계속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사랑을 이룬 그 상태는 사실 제가 관심 있어 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니나 호스가 출연한 <열망>

Q. 주거지나 공간에 대한 묘사도 신기합니다. <어파이어>에서 레온이 숙소를 방문했을 때 나디아는 불청객처럼 등장하잖아요. <바바라>도 그렇고, <트랜짓>도 그렇고, <운디네>의 경우에도 감시를 당하거나 집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이뤄집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주거지나 공간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평소 만화를 많이 읽습니다. 만화에서 공간을 서술하는 방식이 영화와는 다르고, 영화를 위해서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것은 어떤 장소가 인간이 거기 들어설 때 장소를 보여주는지, 인간이 들어서기 전에 장소가 존재하는 모습 자체를 보여주는지 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배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람이 거기 당도하기 전에 그 장소가 그대로 있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에 사람이 장소에 들어오면서 그곳을 방해하게 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문제, 복잡성, 약점과 강점을 갖고 공간에 들어서게 되고, 이를 통해 이야기가 생성됩니다. 이야기가 다 끝나고 사람이 거기를 떠나게 되면 그 공간에 먼지가 쌓이고 그다음에 들어올 사람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공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집이든 들판이든 해변이든 차든 무엇이든, 공간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대상입니다. 제가 한국영화와 일본영화에서 종종 본 것은 이야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그전에 이미 장소가 비춰진다는 것입니다. <브로커>(2022)는 처음에 시작할 때 밤에 비가 아주 많이 와서 물이 넘치는 모습이 여러 샷에 걸쳐서 보이고, 그다음에야 아이를 낳은 여자가 나타납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1949)도 도쿄의 모습이 먼저 보이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런 이미지들은 자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 공간이 인간을 기다리지 않지만 인간이 여기에 나와서 이 모습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게 아시아 영화에서 놀랍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Q. <어파이어>는 관객들에게 멜로로 보이기도 하고, 열등감에 찌든 예술가의 이야기로 보이기도, 청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감독님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전작들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유머 코드도 많고 분위기도 무겁지 않은데,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몇 년에 걸쳐 알게 된 배우들과 팀들과 함께 쌓은 신뢰를 기반으로 제 한평생의 꿈이었던 코미디를 찍을 수 있게 됐습니다. 만약 누가 제게 최고의 비극영화 50편을 꼽으라면 전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희극 영화 50개를 대라면 아주 어려울 것 같습니다. 좋은 코미디를 찍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코미디를 찍는 오랜 꿈을 <어파이어>를 통해 시도하게 돼서 그 과정이 굉장히 즐거웠고, 그렇기 때문에 다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다음 영화도 코미디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희극을 좋아하는 이유는 희극은 신이 역할을 다하지 않는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씨네플레이_ 레온은 어리석은 남자입니다. 아주 멋진 사람이거나 아주 악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살짝 무례한 사람이 더 연기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레온을 연기한 토마스 슈베르트의 역량이 잘 드러나는 대목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슈베르트는 환상적인 배우입니다. 하지만 그는 촬영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세미나를 진행할 때만 해도 배우들이 앙상블을 이루고 서로 재미있게 잘 지냈습니다. 다들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함께 산책을 가기도 하고 장난을 치며 놀았고요. 그런데 촬영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토마스는 고독해졌습니다. 혼자 나오는 신이 많기 때문이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토마스는 더 고독해졌고, 정말 토마스는 점점 더 레온이 되고 내가 여기 혼자 있다고 생각했다더군요. 레온이 바다에 앉아 있다가 바람이 불어 원고가 날아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걸 찍고 나서 토마스와 제가 별장으로 돌아왔는데, 다른 배우들이 함께 둘러앉아 서로 웃고 떠들고, 펠릭스의 사진을 보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죠. 그때 토마스가 제게 와서 조용히 여기 나쁜놈(asshole)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6주 동안 항상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데도 토마스는 외부인이어야만 한다는 게 지옥과도 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배우의 연기 자체도 놀랍지만, 이렇게 상황에 이입할 수 있다는 게 아주 놀라웠습니다.

Q. 결말부에서 레온과 파울라가 다시 만나면서 희망적인 결말을 냈다고 생각합니다. 질투나 이기심이 예술가의 성장이나 행복에 중요한 원동력일 수 있겠습니다만, 과연 그렇게 주변을 모두 불태우고 이뤄낸 성장과 행복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보여드리고 싶은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두 배우가 같이 연기했다는 걸 몰랐는데, 리딩 하는 과정에서 어느 영화에서 둘이 결혼을 했다며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토마스한테는 그게 더 슬픈 일이었을 것 같아요. 옛날에는 결혼까지 한 사이였는데, <어파이어>에서는 파울라를 만지지조차 못하니까요. 끔찍한 사실은 대부분의 예술이 한 사건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예술가가 자제력을 잃지 않음으로써, 이야기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서 있음으로써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해서 그리움을 말하려는 사람은 그 세계에 참여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슬프지만 예술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른 말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까 사진을 보여드린 것과 관계가 있는. 인명 구조원을 연기한 엔노 트랩스와 펠릭스를 연기한 랑스텐 위벨 같은 경우에도 똑같이 10년 전에 같은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한 명은 네오 나치를, 다른 한 명은 동독의 젊은 남자를 연기했고, 한 사람이 다른 이를 항상 모욕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어파이어>에서 서로 키스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웃곤 했다고 합니다. 배우들이 맡는 역할이 바이오그래피의 한 부분이 되는 것 같고, 배우들이 그걸 활용하는 방식도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들은 자기가 과거에 했던 역할과 관계를 통해서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토마스 슈베르트와 파울라 베어가 함께 출연했던 <다크 밸리>

Q. 영화 속에서 산불이 나도 초반부에는 레온과 친구들이 있는 공간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펠릭스의 대사처럼 “곰팡이가 필 거야” 같은 전조증상을 나타내는 대사가 나오는데, 레온은 이 상황에 무관하듯 반응합니다. 예술가의 이야기이면서도 자연환경에 대한 경고를 주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런 식으로 산불을 표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희가 실제 촬영한 곳에서 한 10km 떨어진 곳에 산불이 났고, 영화 속 몇몇 신은 정말 산불이 난 현장을 찍은 것입니다. 불에 타버린 차라든지 불탄 동물들의 모습은 정말 현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펠릭스가 지붕을 고치는 것, 그걸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이 세상엔 세상을 유지하고 고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이런 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예술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레온은 계속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세탁을 하거나 상을 차리거나 지붕을 수리하거나 하는 거야말로 진짜 일인데도 이때 레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일에 대해 얘기해도 사실 일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성격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니나 호스가 <옐라>나 <피닉스>에서, 파울라 베어가 <트랜짓>이나 <어파이어>에서 왜 빨간색 원피스를 입느냐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저는 이 빨간색 원피스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Q. 코로나를 계기로 영화계가 많이 바뀌고, 시장이 작아지고, 사람들이 이제 극장에 오지 않는 분위기가 됐습니다. 감독님 영화처럼 예술영화나 작가 영화들이 더 어려워지는 상황입니다.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독일은 어떤지, 감독님도 이런 것과 관련한 고민이 있으신지, 그리고 코로나의 영향이 감독님의 창작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는지.

독일도 한국과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요. 극장의 방문객이 크게 줄었고, 모든 분야에 걸쳐서 사람들이 공동체가 무엇인지 대중의 공간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워야만 했습니다. 저는 조금 낙관적인 입장입니다. 영화관은 삶에 꼭 필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보고 꿈꿀 수 있는 곳이 꼭 필요합니다. 그저께 이창동 감독님을 만났을 때 제 말을 듣고는 웃으셨습니다. 감독님은 저만큼 낙관적이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저는 더 이상 코로나라는 병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신으로 병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경험을 통해 정치계의 결정엔 신뢰를 잃었습니다. 이들이 처음으로 한 결정은 청년들 그리고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 우리가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곳의 문을 닫은 것입니다. 이 청년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 대화를 해야 하는 공간을 우리는 갈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정책이 펼쳐졌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 영화에 영향을 미쳐서 젊은이들에게 다시 이 공간을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어파이어>를 만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존재하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경험을 만들어낼 공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