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스 비디오’는 이를테면 성전 같은 곳이었다. 유럽과 아시아, 고전과 현대에서 수집된 성배들이 가득한, 그리고 그런 전시물들을 찬양하는 숭배자들로 가득한, 성전이었다. 난 학교가 끝나면 캠퍼스 앞에 위치한 킴스 비디오로 여지없이 향하곤 했다. 가게의 문을 열면 오래된 플라스틱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와 가게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공기가 점원 보다 먼저 나의 존재를 맞아주었다. 허름하게, 혹은 무신경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늘 즐비했고, 그들 앞에는 손뼘보다도 더 길게, 수북이 쌓여진 DVD들이 놓여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듯하지만, 이들은 늘 서로 앞에 놓인 ‘컬렉션’들을 흘끔거렸다. 어떤 영화를 골랐는지, 나보다 고수인지, 내가 몰랐던 영화들이 있는지. 우리는 늘, 경쟁했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나 같이 영화에 미친 인간이 또 있다는 사실에. 석사를 마치는 2년여의 기간 동안 난 킴스 비디오에 모인 희귀한 영화들로 어디에서도 뒤지지 않을 영화적 취향과 지식을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돌이켜 보면, 학교에서 본 영화들 보다 킴스 비디오에서 눈 동냥으로 ‘얻어걸린 영화’들의 수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다큐멘터리, <킴스 비디오>(데이빗 레드몬, 애슐리 사빈) 는 비디오 시대의 종말로 폐업하고 만 비디오 가게, ‘킴스 비디오 (Kim’s Video)’의 역사를 그리는 작품이다. 감독이자 영화의 내레이터, 데이빗 레드몬은 킴스가 보유하고 있던 55,000편 이상의 인기/희귀 영화의 콜렉션을 추적함으로써 영화광들의 산실이었던 킴스 비디오의 흥망성쇠를 기록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스트 빌리지의 거리만큼이나 낡은, 그저 그런 비디오 가게지만 킴스는 달랐다. 나 같은 영화과 전공 학생들뿐만 아니라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스파이크 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영화감독들(혹은 이들을 꿈꾸는 아마추어 감독들)의 ‘에꼴(ecole)’ 같은 곳이었다면 이 작은 비디오가게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 될까. 전 세계에서도 구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면, 킴스 비디오를 뒤져 보는 것이 유일하고도 현명한 방법이었다.
놀랍게도 이 비디오 가게의 주인은 ‘김용만’이라는 재미교포 한국인이다. 그는 이민 1세대로 세탁소를 포함해 갖가지 사업을 전전하다가 본인의 대학 전공이었던 영화로 안착한, 진정한 시네필이다. 그는 뉴욕에만 총 5개의 킴스 비디오를 운영했고, 그중 이스트 빌리지의 세인트 마크 거리에 위치한 몬도 킴스는 일종의 플랙쉽 스토어 같은 심장부였다. 정통 시네필인 주인 김용만의 취향을 반영하듯 엄청난 다양성을 자랑했던 킴스지만 가게의 시그니처는 ‘희귀템’들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려지듯, 그는 직원들을 해외 영화제에 ‘파견’을 보내고 구하기 힘든 영화들을 직접 픽업해오게 했다. 마치 국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이 영화를 수급해오듯 말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킴스만의 타이틀들은 쉽게 구하기 어려운 아방가르드 영화들, B급 지알로(giallo) 영화들, 멸종이 (거의) 확실한 60년대 섹스플로이테이션(sexploitation) 영화들 등이었다. 나의 경우, 주로 (비교적 구하기 쉬운)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사러 들리곤 했는데 인터넷으로 영화를 사는 것보다, DVD의 커버를 구경하고, 만지고, 고르는 재미로 킴스에 다녔던 것 같다. 킴스를 가야만, 영화의 ‘물성’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리고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는) 나의 첫 킴스 구매는 자크 드미 감독의 <롤라> 였다.
몇 해 전, 킴스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난 그곳에서 만들었던 나의 모든 추억들이 생매장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영적인 ‘사형선고’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이 엄청난 선고는 나와 함께 했던 매장 안의 수많은 동료 단골에게도 비슷한 심정을 갖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큐멘터리, <킴스 비디오> 역시 킴스의 단골이었던 감독, 데이빗 레이몬이 가게의 폐업에 대해 가졌던 상념과 함께 시작된다. 가게의 전 직원들, 단골들, 그리고 이스트 빌리지의 주민들의 증언과 회고로 영화는 킴스의 황금기를 아련한 문체로 전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점은 이 다큐멘터리가 킴스 비디오의 찬란했던 과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망하고 난 ‘그 이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레드몬은 일종의 탐사보도를 하듯, 킴스 비디오의 폐업과 함께 김용만 사장이 기증했던 55,000편의 영화의 행방을 쫓는다. 그는 킴스 비디오의 레거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보석 같은 영화들이 이태리 시칠리아에 위치한 ‘살레미’라는 작은 마을에서 ‘썩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의 본론은 이 컬렉션이 이토록 방치된 이유와 그 내막을 추적하는데 할애된다.
킴스 콜렉션의 놀라운 여정은 역시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요소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중심추는 이 모든 신화의 주역, ‘김용만’ 사장이다. 그는 180 센티가 넘는 거구에 훤칠한 외모를 가졌으며 느릿하지만 날카로운 말투로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감독은 ‘미스터 킴’과 시민 케인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감독은 김용만 사장이 ‘시민 케인’이 그랬듯, 과일 좌판에서 시작해 돈을 모으고, 궁극적으로는 영화 제국을 설립했지만 그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그와 그의 조력자들에게는 킴스 비디오의 여정을, 그리고 이 영화의 (비극이 될 뻔한) 엔딩을 구원할 만한 통쾌한 묘수가 있다.
많은 의미에서 <킴스 비디오>는 비디오 시대, 혹은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종언이다. 동시에 영화는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 뒤늦게 도착한 연서(戀書)이기도 하다. 딱히 슬프거나 비극적인 대목이 없는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영화에 퍼부었던 애정과 열정, 그리고 기대어 왔던 추억과 향수 때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를 영화의 유령들에게 바친다(Dedicated to the Ghost of Cinema).”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리고 이는 극적으로 살아남은 '킴스 비디오'라는 유령의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