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코믹스의 대표적인 슈퍼히어로를 꼽는다고 하면, 이른바 '트리니티'라고 불리는 세 명의 캐릭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인간과 외부자, 신을 각각 대표하는 배트맨과 슈퍼맨, 그리고 원더우먼이다.
하지만 DC 엔터테인먼트가 DCU(DC 유니버스)로 쇄신을 앞둔 이 시점, 세 캐릭터는 모두 저마다의 수난을 겪고 있다. 배우 본인의 의지로 캐릭터에서 하차한 배트맨에 이어 열의를 드러냈음에도 경질된 슈퍼맨, 그리고 아직 진위를 알 수 없는 원더우먼까지.
개중 원더우먼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기는 캐릭터다. 캐릭터의 위상에 비해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영화는 관객이 기대한 것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많았고, 그럭저럭 퀄리티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팬데믹이라는 고난 속에 개봉해야 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슈퍼맨과 동일한 결과를 맞을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솔로무비 <원더 우먼>
파라다이스 섬에 살고 있는 아마존 종족의 공주인 '원더우먼' 다이애나는 반신(半神)으로 태어난 고결한 힘의 소유자이며, 단점이라고 할 만한 게 존재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히어로다. DC 세계관 내 최강자나 다름없는 슈퍼맨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초인적인 힘과 속도를 지닌 강력한 인물인데, 영화 <원더우먼>에서는 이 타고난 능력을 조금씩 각성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여성 슈퍼히어로의 대표주자이자 강력한 능력의 보유자인 원더우먼은 1941년 첫 등장 이래 관용적으로 사용될 만큼 유명세를 누려 왔다. 한때는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강력한 여성의 대명사로 사용될 만큼 문화적 영향도 크게 미친 원더우먼이지만, 명성에 비해 단독 영화화는 꽤 늦은 편이었다.
선행 제작 개념의 파일럿 영화 세 편을 제외하면 원더우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솔로 무비는 DC 확장 유니버스의 <원더 우먼>이 최초였으니 첫 등장부터 무려 약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셈이다.
1970년대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원더우먼>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회자될 만큼 비약적인 인기를 기록했지만, 이 드라마가 슈퍼히어로 원더우먼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여성 히어로를 연기하는 린다 카터의 성적 매력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원더우먼의 영웅적 면모에 집중한 실사화는 2017년의 <원더우먼>이 이래저래 최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말 많았던 프랜차이즈 DCEU의 수혜를 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데미스키라의 공주이자 신의 혈통을 타고난 '원더우먼' 다이애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역사와 당위성을 소개하는 데 성공했다. 히어로무비로서의 '액션 쾌감'은 조금 부족했을지언정, 강력한 전사로서의 면모와 동시에 현대 사회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을 가진 다이애나의 모습과 더불어 매력적인 면모를 선보인 셈이다. 곧이어 후속편이 제작되었고, <원더우먼 1984>로 원더우먼은 DC의 히어로들 중에서 가장 먼저 후속편을 확정 지은 캐릭터가 된다. 따지고 보면 DC 확장 유니버스에서만큼은 그 어떤 캐릭터들보다도 신뢰도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까지는.
희망이었던 그 시절, <원더우먼 1984>
전편의 인기가도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되었던 <원더 우먼 1984>는 때아닌 난국을 맞는다. 내부 사정으로 인해 한 차례 개봉 연기한 데 이어, 당시까지만 해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로 인해 네 번이나 개봉을 미뤄야만 했다. 코로나 19가 극성이던 시기로 관객수가 매우 하락했기에 전편에 비해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는데, 시기를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
물론 비단 팬데믹 때문은 아니었다. 여전히 부족한 액션과 더불어, 슈퍼히어로 영화라는 근간을 가지고도 장르적 공식을 따르지 않았으며 그 이외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기대할 부분이 많은 영화였지만(1984라는 상징적인 숫자라든지, 빅 브라더를 이야기하는 빌런과 물리적 공격을 시도하는 빌런의 이중 공격이라든지) 원더우먼이라는 강력한 히어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데에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여기에 갤 가돗의 연기력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DC 실사화 유니버스에서 원더우먼이 갖고 있던 위상은 여러모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린다 카터 이야기가 다시 나오기까지 했으니, 갤 가돗 배우 개인으로서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새롭게 시작한 DCU, 새로운 프랜차이즈에서의 '원더우먼'
전편만 한 후속편이 없다고는 하지만, 다수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징크스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례가 없지도 않은 데다가 쭉 지적되어 왔던 단점이 극복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어 있었으니 혹평은 피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이스라엘인으로서 2년간의 복무까지 마친 바 있는 갤 가돗이 개인 SNS에서 정치적 입장을 여러 차례 표명하면서 배우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이렇다 보니 중간자적 입장을 견지하며 인류애와 평화를 상징하는 원더우먼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갤 가돗 역시, DC 확장 유니버스에서 슈퍼맨 역할을 연기했던 헨리 카빌과 마찬가지로 경질될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갤 가돗 본인은 원더우먼 역할에 대한 애정과 열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이 루머를 반박했지만, 헨리 카빌조차 복귀 선언 직후에 경질된 적이 있기에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외신은 갤 가돗과 상반된 내용의 소식을 전했는데, 원더우먼 3편은 아직 제작이 고려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거기에 갤 가돗이 함께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갤 가돗 본인이 인용한 DC의 두 수장 발언에 신뢰성이 있다면... 갤 가돗은 여전히 원더우먼일 것이다.
현재까지 확실한 정보는 DCU를 통해 공개될 원더우먼의 새로운 이야기는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프리퀄격 스토리를 담고 있는 <파라다이스 로스트>라는 것 정도다. 데미스키라에서의 이야기를 좀 더 심도 있게 다룬다면 지금까지 원더우먼 시리즈가 보여주지 못했던 강렬한 액션에 대한 갈증을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직은 지켜봐야 할 일이다.
2017년 <원더우먼>이 DC 확장 유니버스에서도 손꼽힐 만한 성공을 거두며, 실패를 반복해 왔던 이 프랜차이즈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면서 원더우먼은 다시금 영광을 찾아가는 듯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원더우먼은 희망이자 조커 카드였다. 2편의 실패 이후에도 3편 제작에 착수하는 듯한 뉘앙스도 여러 차례 풍겼다.
하지만 DCU 개편을 즈음하여 원더우먼의 새로운 시리즈가 취소되고, 시리즈 두 편의 메가폰을 잡았던 감독 패티 젠킨스가 DCU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원더우먼'을 맡아 온 배우 갤 가돗의 거취도 미묘한 상황이 됐다. 물론 지난 영화들의 각본과 연출을 생각하면, 패티 젠킨스 경질은…. 여러모로 옳은 선택일지도 모르고, 오히려 제임스 건 산하의 원더우먼이 더 호평받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쨌거나 DC 3대장 트리니티의 일원이자 여성 히어로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원더우먼이 수난을 겪는다는 건 참 애석한 이야기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제임스 건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만 같아 보이지만, DC 유니버스뿐만 아니라 원더우먼이 가진 위상을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좀 좋은 영화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DCU의 시작이 목전에 있는 지금이야 DC 히어로 대부분이 수난과 격동의 시기이겠으나, 원더우먼은 조금 더 할 얘기가 많은 캐릭터라는 건 분명하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