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최대의 영화제로 손꼽히는 48회 토론토국제영화제(TIFF)가 9월 17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9월 7일부터 9월 17일까지 10일간 캐나다 토론토 TIFF Bell Lightbox에서 진행된 영화제에는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할리우드에서 개봉할 주요 작품들은 물론 다수의 한국영화 역시 공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올여름 개봉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류승완 감독의 <밀수>, 유재선 감독의 <잠>을 비롯하여 하반기 공개 예정인 전우성 감독의 <몸값 part 2>와 2024년 개봉 예정으로 알려진 허진호 감독의 신작 <보통의 가족> 또한 초청받으며 북미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토론토국제영화제가 북미 최대의 영화제로 떠오르게 된 이유는 바로 할리우드 기대작들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문에 독립/예술 영화의 메카로 불리는 선댄스 영화제와 자주 비교당하는 경우가 잦지만, 그럼에도 토론토국제영화제가 앞으로 1년 동안의 할리우드 영화판의 지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작품들이 실제로 개봉 이후 흥행과 비평,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경우가 많다. 올해는 코드 제퍼슨 감독의 연출 데뷔작 <아메리칸 픽션>(American Fiction)이 관객상을 거머쥐는 파란을 일으켰다. 사실 코드 제퍼슨은 <마스터 오브 제로>, <굿 플레이스>, <왓치맨>, <석세션> 등 많은 사랑의 TV 시리즈의 작가로 활동하며, WGA(미국 작가 조합)에서는 이미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2위가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바튼 아카데미>, 3위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며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데뷔작이 관객상을 수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할리우드의 마케팅 플레이스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토론토국제영화제에는 해마다 숨겨진 양질의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부디 이런 작품들이 국내 영화제를 비롯하여 극장에 소개될 수 있기를 바라며, 토론토국제영화제의 화제작과 기대작들을 지금부터 알아보자!
<우먼 오브 디 아워> dir. 안나 켄드릭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유달리 배우들의 연출 작품이 많이 등장했다. 배트맨과 <버드맨> 등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키튼의 연출작 <녹스 고스 어웨이>에는 알 파치노가 카메오로 등장하며, 이미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2014)와 <블레이즈>(2018) 등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에단 호크 역시 마야 호크 주연의 <와일드캣>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번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배우의 연출작은 단연 안나 켄드릭일 것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제시카 역으로 시작하여 <인 디 에어>, <피치 퍼펙트>, <부탁 하나만 들어줘> 등 인상적인 연기와 특유의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많은 인기를 끈 배우 안나 켄드릭이 이번엔 <우먼 오브 디 아워>라는 연출 데뷔작을 들고 왔다.
게다가 <우먼 오브 디 아워>의 소재는 최악의 연쇄 강간 살인범 로드니 알칼라를 다루고 있다. 그는 1968년 9세의 여아를 강간한 이래로 1979년까지 총 11명의 여성을 강간 후 살인을 저지른 무지막지한 범죄자였다. 로드니 알칼라에 대한 여담 중 하나로 70년대 미국 TV쇼에서 히트했던 예능 ‘더 데이팅 게임’에 출연해 최종 데이팅 상대로 우승했던 사실이 알려지며, 일각에서는 그를 ‘데이팅 게임 킬러’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화는 그가 무려 5명을 살해한 77년에서 출발하여 ‘데이팅 게임’에 출연한 1978년을 다루고 있다. 안나 켄드릭의 <우먼 오브 디 아워>는 범죄자에 대한 고발을 다루기보다는 ‘데이팅 게임의 출연자’처럼 익숙하고 친숙한 존재가 어느새 여성을 공격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고. 안나 켄드릭 특유의 위트가 연쇄살인마라는 소재와 어떻게 만났을까? 쉽게 그려지지 않는 두 조합을 기대해 본다.
<드림 시나리오> dir. 크리스토퍼 보글리
최근 들어 부쩍 A24와의 협업이 많아진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하는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의 신작 <드림 시나리오> 역시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인터넷 세계의 밈과 SNS의 폐해를 날카롭게 풍자한 블랙 코미디 <해시태그 시그네>(2022)로 많은 관심을 받은 노르웨이 출신 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가 이번에는 집단 무의식과 중년의 자의식에 대한 풍자를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드림 시나리오>는 무기력한 가장이자 볼품없는 교수 폴 매튜스(니콜라스 케이지)가 알지도 못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꿈에 그가 등장하면서 하룻밤 사이에 유명인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2002년 스파이크 존스의 <존 말코비치 되기>(1999)의 후속작인 <어댑테이션>에서 꿈과 환상을 둘러싼 분열적인 작가 찰리 카우프만 역을 연기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반대로 그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꿈에 등장하는 의문의 남자가 된다는 설정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한동안 인터넷을 떠돌았던 ‘꿈속에서 이 남자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는 괴담 속 인물과도 니콜라스 케이지가 유사하게 생겼다는 점 역시 재밌는 포인트다. 북미에서는 11월 개봉을 앞둔 <드림 시나리오>를 내년에 국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 혹여 ‘그가 한국의 관객들의 꿈에도 등장하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하며 기다려 보자.
<핑거네일스> dir. 크리스토스 니코우
지난 2021년 그리스 영화의 새 이름이 등장했음을 알렸던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애플>은 그에게 제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평가를 안겨주었다.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이 유행병처럼 번지던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 망각과 기억, 그리고 상흔과 감각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기대를 모았던 크리스토스 니코우가 드디어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었다. 애플 티비+와 손을 잡고 신작 <핑거네일스>를 만들게 된 것이다. <체르노빌>부터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와 <로스트 도터>(2021)까지 인상적인 연기로 이름을 각인시켰던 제시 버클리와 <베놈>(2018)의 메일 빌런 칼튼 드레이크 역으로 잘 알려진 리즈 아메드가 캐스팅 라인업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한 전작 <애플>부터 꾸준히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제작에 도움을 주고 있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이번에도 제작에 참여하며 작품성을 보증하고 있다.
<핑거네일스>는 안나(제시 버클리)는 오랫동안 연애를 해온 자신의 파트너와의 관계가 과연 진실된 사랑인지 고민하면서, 두 커플의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를 알려주는 테스트에 참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근미래에 사랑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기술이 발명된다는 설정은 마치 단기 기억상실증이 유행병이 된다는 전작 <애플>만큼이나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또한 전작 <애플>이 사과의 단맛이라는 사소한 감각을 통해 상상력을 폭발시켰다면, <핑거네일스>는 사랑을 판정하는 기기가 서로의 ‘손톱’을 비교한다.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영화 세계는 그 누구도 고안하지 못한 독창성과 사소하고 작은 요소가 그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그의 신작 <핑거네일스>는 어떤 창의적인 세계관으로 가득할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더 콘테스턴트> dir. 클레어 티틀리
앞선 세 작품이 할리우드와 미국 인디 영화계의 기대작들이었다면, 이번에는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리얼리티 예능을 다룬 다큐멘터리 <더 콘테스턴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90년대 말 일본의 니혼TV의 ‘방송 나가라! 전파소년((進め!電波少年)’은 "버려진 섬에서 탈출하기”, “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히치하이킹만으로 횡단하기” 같은 가학성과 파격성에 정점을 찍는 리얼리티 예능을 제작하며 시청률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논란이 일어난 프로그램은 “경품 응모만으로 생활하기”로 잡지와 라디오에 엽서를 보내 당첨된 경품으로만 생활한다는 간단한 규칙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해당 예능 프로그램은 무명 개그맨들을 상대로 제비뽑기하여 ‘나스비’라는 개그맨을 속인 채 1년 3개월간 감금하여 생활하며 촬영을 진행했다. 전라의 나스비가 한 달에 6,000통의 엽서를 보내어 생필품을 확보하는 모습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제작진들은 아예 그를 24시간 인터넷 생중계하며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선풍적인 인기에도 나스비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는 마치 <트루먼 쇼>(1998)의 주인공이면서 비참한 <올드 보이>(2003)의 삶을 사는 꼴이 되었다. 15개월 만에 미션 성공을 발표하는 현장에서도 그는 전라 상태로 대중들 앞에 공개되어야만 했고, 이는 나스비가 오랜 기간 우울증과 자살 기도에 이르는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클레어 티틀리는 나스비의 일생과 잔혹했던 90년대 쇼 비지니스의 광기를 포착하면서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가장 핫한 작품으로 떠올랐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