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악당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특히 슈퍼히어로, 액션블록버스터 영화라면 더 그렇다. 이 장르의 많은 영화는 주동인물인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와 반동인물인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의 갈등구조를 기본으로 만들어진다. 이 구조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시작됐다. 선과 악의 대결, 영웅과 악당의 싸움은 수 천년의 시간이 흘러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다.
악당 역시 영웅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악당은 언제나 영웅을 빛내야 하기 때문이다. 간혹 영웅보다 더 존재감이 큰 경우도 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그렇다. 반대로 악당이 너무 약하면 어떨까. 영웅은 손쉬운 승리를 쟁취하고 관객의 쾌감은 반감된다.
대체로 영웅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의 인상적인 악당을 소개는 경우가 많다. 이번엔 반대로 한번 접근해봤다. 다소 힘이 떨어지는 싱거운(?) 악당 캐릭터를 모아봤다.
*경고! 악당 캐릭터 설명을 위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치광이 채식주의자 마약왕
<킹스맨: 골든 서클> 포피
킹스맨 본부를 미사일로 깔끔하게 날려버린 골든 서클의 수장, 포피(줄리안 무어)는 전 세계의 마약을 유통하는 마약왕이다. 비공식 세계 1위 부자라고 했던가. 인육으로 만든 햄버거를 다른 사람에게 먹이기도 하는 등 사이코패스 기질이 다분하다. 1950년대 미국 스타일의 아지트에 엘튼 존을 납치하기도 한다. 특수 제조된 마약을 투여한 사람들을 인질로 삼아 마약을 합법화하라고 미국 대통령을 협박하는 포피는 진정한 악당이다.
아니다. 포피 아담스는 그냥 미치광이 채식주의자 마약왕이었을 뿐이다. 진정한 악당은 이참에 마약중독자들을 다 죽여버리려는 속셈을 가진 미국 대통령과 이에 동조하는 의외(!)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포피는 진짜 악당을 위해 멍석만 잘 깔아주고 초라하게 죽고 말았다.

- 킹스맨: 골든 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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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매튜 본
출연 태런 에저튼, 줄리안 무어, 콜린 퍼스
개봉 2017 영국, 미국
아무도 죽지 않는 모래바람
<미이라> 아마네트
<미이라>의 아마네트(소피아 부텔라)는 죽음의 신 세트의 대리인 미이라다. 대리인이니까 거의 신과 가깝다는 뜻이다. 그런 아마네트는 엄청난 악당이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예고편에 등장한 모습이 거의 다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까마귀, 쥐 같은 새를 조종하는 것 정도가 인상적이었달까. 물론 시체도 조종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거의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 모래바람도 일으킨다. 모래바람으로 런던을 시원하게 날려버릴 줄 알았는데 런던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각종 영화에서 늘 폭파당하는 런던이었는데 <미이라>에선 예외였다. 게다가 인간인 닉(톰 크루즈)에게도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은에 대한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
소피아 부텔라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가젤 역으로 주목받은 바 있다. 날카로운 칼로 된 다리를 가지고 있는 가젤은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선보였다. 아마네트보다는 가젤이다.

- 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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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알렉스 커츠만
출연 톰 크루즈, 소피아 부텔라, 애나벨 월리스
개봉 2017 미국
매즈 미켈슨이 아깝다
<닥터 스트레인지> 케실리우스
<닥터 스트레인지>의 케실리우스(매즈 미켈슨)는 기본적으로 배반자다. 어쩌면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처럼 인류의 영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악당이 된 걸까.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 그 이유를 스스로 말해줬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케실리우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케실리우스는 매즈 미켈슨이라는 훌륭한 배우가 연기했다. 악역 하면 매즈 미켈슨 아니던가. <007 카지노 로얄>이라는 영화가 단박에 떠오른다. 미드 <한니발>도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는 매즈 미켈슨이라는 개성 강하고 연기 잘하는 배우가 낭비됐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케실리우스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승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을 죽이기도 했다. 그만큼 강력한 악당인 줄 알았는데 퇴장이 허무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탄생에 집중하기에도 벅찼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케실리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메인 빌런인 도르마무에게 영웅을 안내하는 역할처럼 느껴진다. 물론 도르마무도 닥터 스트레인지 앞에선 별 볼일 없는 악당이었다.

- 닥터 스트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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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스콧 데릭슨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 틸다 스윈튼, 치웨텔 에지오포, 레이첼 맥아담스, 매즈 미켈슨
개봉 2016 미국
왜 자꾸 페이스북이 떠오르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렉스 루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배대슈>)은 영웅과 악당의 대결구도가 아닌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처럼 영웅인 배트맨과 슈퍼맨이 서로 싸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슈퍼히어로 영화답게 악당을 영화에 등장시켰는데 아무래도 존재감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렉스코프라는 회사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렉스 루터(제시 아이젠버그)가 <배대슈>의 악당이다. 그는 괴짜 과학자인 것 같다. IT 전문가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었다. 에디터처럼 데이빗 핀처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 출연한 제시 아이젠버그가 떠올라서 집중이 잘 되지 않은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렉스 루터는 악당이지만 배트맨과 슈퍼맨의 화해의 장을 마련해준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배트맨을 이용해 슈퍼맨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그의 계략은 당연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슈퍼맨과 배트맨은 서로 오해를 풀고 화해했다. 어쨌든 렉스 루터는 둠스데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내긴 했다. 또 마지막에 빡빡머리가 된 렉스 루터가 감옥에서 광기 어린 독백을 하며 어둠의 세력의 등장을 암시하는 장면은 조금 인상적이었다.

-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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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잭 스나이더
출연 헨리 카빌, 벤 애플렉, 에이미 아담스, 로렌스 피시번, 제시 아이젠버그, 제레미 아이언스, 홀리 헌터, 갤 가돗, 로렌 코핸, 제프리 딘 모건, 제이슨 모모아, 에즈라 밀러, 다이안 레인
개봉 2016 미국
이 꼰대, 자꾸만 끌리네
<엑스맨: 아포칼립스> 아포칼립스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아포칼립스(오스카 아이작)는 뮤턴트들의 조상이다. 최초의 뮤턴트인 그는 고대 인류의 숭배 대상이었다. 그는 고대 이집트에서 염동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피라미드를 짓기도 했다.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아포칼립스는 결국 신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고대에 봉인되었다가 현대에 되살아난 아포칼립스는 새로운 시대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예전처럼 자신과 함께할 네 명의 기수를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엑스맨> 시리즈의 악당(?)인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를 돋보이게 만들어줬다. 매그니토는 당연하다는 듯 극후반부에 아포칼립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포칼립스는 영화 내내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꼰대처럼 행동하다가 끝내 진 그레이(소피 터너)에 의해 허무하게 죽고 만다.

- 엑스맨: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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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브라이언 싱어
출연 제임스 맥어보이, 마이클 패스벤더, 제니퍼 로렌스, 오스카 아이삭, 니콜라스 홀트
개봉 2016 미국
중2병 빌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울트론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아포칼립스과 꼰대라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울트론(제임스 스페이더)은 중2병 걸린 청소년 느낌이다. 울트론을 중2병 청소년에 비유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악당이기 때문이다. 울트론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브루스 배너(마크 러팔로)가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울트론이 선한 인공지능이길 바랐던 토니와 브루스의 바람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부모 말 듣지 않는 중2병 청소년들처럼 울트론은 스스로 삐뚤어져서 인류와 어벤져스의 멸망을 바라는 존재가 됐다.
울트론은 막시모프 남매를 포섭하고 초반 어벤져스를 곤란에 빠트리며 악당 포스를 뽐냈다.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지지 시작했다. 막시모프 남매가 등을 돌리고, 스스로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에 휩싸이면서 울트론은 막판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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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스 웨던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헴스워스, 마크 러팔로, 크리스 에반스, 스칼렛 요한슨, 제레미 레너, 돈 치들, 애런 존슨, 엘리자베스 올슨, 폴 베타니, 코비 스멀더스, 스텔란 스카스가드, 제임스 스페이더, 사무엘 L. 잭슨, 수현
개봉 2015 미국
이제 시작이라고 믿고 싶어
<007 스펙터> 프란츠 오버하우서
<007 스펙터>의 프란츠 오버하우서(크리스토프 왈츠)는 말이 많다. 사상 최악의 조직 스펙터를 이끄는 수장인 오버하우서는 초반에는 거의 실루엣 정도만 공개되면서 기대감을 키웠다. 제임스 본드 영화의 유명한 악당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의 재림이었다. 하얀 털의 페르시안 고양이를 쓰다듬는 그 악당 말이다.
기대가 너무 컸을까. 막판에 마주한 오버하우서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의 법정 후견인이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보다 본드를 더 사랑했다는 데서 오는 열등감이 악당을 만들어다는 것부터가 조금 힘이 풀리는 느낌이다. 제임스 본드를 앞에 두고 어려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줄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건 제임스 본드가 너무 강했다는 사실이다. 본드는 권총으로 오버하우서가 탄 헬기를 추락시킨다. <007 스펙터>에서는 오버하우서가 죽지 않고 생포된다. 부디 다음 영화에서 달라진 블로펠드를 보여주길 바란다.

- 007 스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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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샘 멘데스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랄프 파인즈, 레아 세이두, 모니카 벨루치, 크리스토프 왈츠, 데이브 바티스타
개봉 2015 미국, 영국
내가 알던 존 코너가 아니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존 코너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존 코너(제이슨 클락)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존 코너가 맞다. 인류의 희망을 위해 <터미네이터> 1편에 등장하는 것처럼 과거로 카일 리스(제이 코트니)를 보내는 그 존 코너다.
지금부터 반전이다. 존 코너는 스카이넷에 의해 인간 터미네이터가 됐다. 존 코너이면서 동시에 터미네이터(T-3000)인 셈이다. 기계들이 엄청난 터미네이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결과 인류의 희망 존 코너는 기계의 희망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존 코너는 어머니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와 카일 리스를 죽이러 과거로 간다. 일부 팬들은 존 코너를 <스타워즈> 시리즈의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제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황당한 설정, 복잡한 타임라인은 안녕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부활시키는 <터미네이터> 영화를 기다려보자.

-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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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앨런 테일러
출연 아놀드 슈왈제네거, 에밀리아 클라크, 제이 코트니, 제이슨 클락, J.K. 시몬스
개봉 2015 미국
낙하산 악당 캐릭터?
<스파이더맨 3> 베놈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3부작은 슈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다소 아쉬움이 있다면 <스파이더맨 3>의 악당 베놈 캐릭터를 들 수 있겠다. 베놈은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에게서 떨어져나간 심비오트가 생존을 위해 다른 숙주 에디 브록(토퍼 그레이스)에 들어가서 나타났다.
샘 레이미 감독은 <스파이더맨 3> 이후 시리즈에서 하차하게 되는데 이유는 소니 스튜디오와의 의견 충돌이라고 알려져 있다. <스파이더맨 3>에서 등장하는 베놈은 감독의 의도가 아닌 스튜디오의 요구로 들어간 캐릭터였다. 그러니 영화 전체에서 겉도는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더 맨 3>에는 베놈 말고도 뉴 고블린, 샌드맨 등의 악당 캐릭터도 등장한다.

- 스파이더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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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샘 레이미
출연 토비 맥과이어, 커스틴 던스트, 제임스 프랭코, 토마스 헤이든 처치, 토퍼 그레이스,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로즈마리 해리스, J.K. 시몬스, 제임스 크롬웰
개봉 2007 미국
악당 연기의 1인자
<아이언맨 3> 만다린
만다린(벤 킹즐리)은 토니 스타크의 저택을 날려버렸다. 충격적이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악당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실 악당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만다린은 트레버 슬래터라는 무명 연극배우였다. 알고 보니 이게 다 거짓말이라고? 팬들은 크게 낙담했다.
만다린 캐릭터를 연기한 벤 킹즐리라는 배우를 가지고 이렇게 장난스럽게 만들어도 되는 건가. <아이언맨 3>는 꽤 잘 만든 영화였지만 만다린 캐릭터는 쉽게 용서를 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만다린이 원작과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된 것이 중국 시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다린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원작에서 중국계 악당으로 설정돼 있다.

- 아이언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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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셰인 블랙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기네스 팰트로, 벤 킹슬리, 돈 치들, 가이 피어스, 레베카 홀
개봉 2013 미국, 중국
지금까지 인상적이지 않은, 다소 아쉬운 악당을 선정해봤다. 그밖에 생각나는 대로 뭔가 부족한 악당들을 나열해본다. <토르: 타크월드> 말레키스, <아이어맨 2> 이반 반코/위플래시, <더 울버린> 바이퍼, <판타스틱 4: 실버 서퍼의 위협> 갤럭투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로난 더 어큐저, <앤트맨> 옐로우 자켓,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카일로 렌 등이다. 분명 영화를 봤는데도 이 악당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기억력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인상적이지 못한 악당이라는 방증이니까.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