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기억을 만나다>는 일반적인 단편영화와 동일한 구조 안에서 사건을 전개해나간다. 관객이 헤드셋을 쓰고 영화를 관람할 때 느끼는 감각이란, 대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연수(서예지)와 우진(김정현)이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나 호감을 갖게 되고 연인이 되는 과정을 만져질 듯 가까이에서 몰입해 체험하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스스로 인물의 시점이나 사건의 상황을 선택 혹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전통적인 영화보기 방식과 다르지 않다. 다만 형식적으로 사각 프레임의 한계를 떨쳐버리고 고개를 사방으로 두리번거려도 영화 속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타 4DX 효과 역시 사건과 공간으로의 몰입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기억을 만나다>는 아직 VR을 낯설게 느끼는 전통적인 영화 보기에 익숙한 관객과 신기술의 접점을 고민한 결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VR을 접할 때, 관객 혹은 사용자가 헤드셋을 쓰고 사방을 둘러보며 특정 공간을 유람하듯 체험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라고 상상하곤 한다. <기억을 만나다>가 흥미로운 것은 관객이 극장에 앉아 뒤를 돌아볼 수 없다는 가정하에 좁혀진 시야각 안에서 얼마나 실재감과 몰입감을 줄 수 있는 영상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은 이브이알스튜디오의 구범석 감독은 “연극 무대를 가까이에서 직접 체험하듯 보는” 느낌을 통해 VR영화의 특징을 극대화할 아이디어를 찾았다. 연극 무대를 관객이 자세히 그리고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듯 실재감(presence)과 몰입감(immersive)을 제공한다는 것. VR의 매체적 특성에 맞는 스토리텔링 역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게 가려고 한 점, 즉 VR만의 상호작용성(interactive)에 대한 고민도 VR과 영화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고 한 결과다.
물론, VR영화가 일반 2D영화와 가장 직접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상호작용성을 극대화한 사례도 있다. 애니메이션 <넛잡>의 제작사 레드로버가 에이펀인터랙티브와 손잡고 만든 인터랙티브 VR애니메이션 <버디 VR>은 완결된 서사 안에서 캐릭터와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공간의 기본 설정만을 관객에게 부여하고 알아서 체험하게끔 만든다. 영화의 스토리와 게임의 미션을 모두 떠오르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부여된다. 주요 무대는 영화의 배경인 과자 매장. 이곳에서 관객 혹은 사용자는 헤드셋과 컨트롤러를 이용해 영화 캐릭터인 외톨이 쥐 버디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겪는다. 체험시간은 10분 내외이며, 여러 상황 설정에 따라 시간은 달라진다.
이를 연출한 채수응 감독은 “단순하게 현실(혹은 영화)의 재현이 아니라 행위의 축적으로 만들어지는 감동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극장 안의 관객은 두 시간여의 상영시간 동안 머릿속에 축적된 장면들을 통해 감동을 느낄 것이고, 게임의 사용자는 그 게임을 실행하는 동안만큼은 보다 영화적인 액션 쾌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둘은 엄연히 다르지만 현재의 매체 개념을 적용하면 “상호작용성이라는 것은 영화보다는 게임의 매체 속성에 가깝다고 이해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화와 게임의 공존을 고민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버디 VR>은 영화가 편집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다루게 되는 반면 VR의 세계에서는 관객이 감독이 되어 설계된 세계 안에서 다양한 정보를 취사 선택할 수 있게 된다는 차이점을 살리는 방법도 고민했다.
VR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작용성과 몰입감, 실재감은 사실 어느 하나 따로 떨어뜨려 극대화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상호작용성이란 결국 내가 실제로 그 공간에 존재한다는 가상의 존재감을 보다 사실적으로 느끼게끔 해주기 위한 장치일 것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실재감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몰입감과 상호작용성, 거기에 더해 VR이 선사할 수 있는 실재감에 대해 위의 두 작품보다 집중한 작품이 최근 만들어졌다. CJ VR/AR Lab 프로듀서인 최민혁 감독의 <공간소녀>는 공간과 교감하는 감각을 가진 소녀가 주인공으로, 소녀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공간에서 소녀가 느끼게 되는 노스텔지어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1인칭 시점의 사용자 혹은 관찰자가 VR 공간을 유영하듯 돌아다니면서 소녀의 마음을 직접 체험해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3가지 챕터로 구분되는 소녀의 꿈을 따라가며 각기 다른 공간과 그 안에 담긴 기억을 체험하는 판타지 드라마. 연출을 맡은 최민혁 감독은 “VR은 단지 프레임의 확장뿐만 아니라 영화적 공간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컫는다고 말했다. <공간소녀>의 설정은 구글 틸트 브러시를 이용해 드로잉한 가상공간과 전소니 배우가 연기하는 실사의 인물 소스를 합성해 만들었으며 배경 공간에 따른 시점 변화와 사운드 효과 등을 활용해서 VR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공감각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연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