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경이 <신문기자>로 일본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상인 '일본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시상식이 열리기 전부터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을 만큼, 심은경의 출중한 연기력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던 작품이다. 작년 10월 한국에서도 개봉한 <신문기자>가 이번 수상을 기념하며 다시 극장에 걸렸다. 지난 17년간 심은경이 거쳐온 영화 속 캐릭터를 되짚어본다.
<도마 안중근>
10살 되던 2003년, 드라마 <대장금>으로 연기를 시작한 심은경은 <단팥빵>(헥토파스칼 킥 '짤'의 출처!),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출연했다. 그 즈음 출연한 스크린 데뷔작 <도마 안중근>(2004)에선 안중근의 딸로 나왔다. 나라를 위해 마을을 떠나는 안중근(유오성)은 식사 심부름을 온 딸에게 자기를 닮은 목각인형을 주고, 눈치 빠른 '아가'는 금세 낯빛이 어두워진 채 "나는 아버지가 없으면 무서워요"라고 말하자 안중근은 "아버지는 조국이 없다고 생각하면 무섭단다"라고 대답한다. 심은경의 벙찐 표정. 두 배우는 6년 후 <반가운 살인자>(2010)에서 다시 한번 부녀지간으로 만난다.
<헨젤과 그레텔>
두 번째 영화 <헨젤과 그레텔>은 화제를 모은 드라마 <황진이>에서 하지원, <태왕사신기>에서 이지아의 아역으로 얼굴을 널리 알린 2007년 말에 개봉했다. 어릴 적 헤어진 엄마를 만나러 가던 길 정신을 잃은 은수(천정명)는 깨어나 영희(심은경)를 따라 세 남매가 사는 집으로 간다. 장난감과 과자가 가득한 동화 같은 집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남매의 비밀을 점차 풀어놓는다. '신비'에서 '공포', '공포'에서 '연민'의 대상으로 점차 얼굴을 달리하는 섬세한 연기를 보여준 세 아역배우 심은경, 진지희, 은원재의 활약이 돋보였다.
<불신지옥>
<헨젤과 그레텔>에 이어 작업한 스릴러 <불신지옥>(2009)의 소진은 신들린 소녀다. 희진(남상미)은 기도에 빠진 엄마(김보연)와 단둘이 사는 동생(심은경)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사는 지방 아파트로 간다. 영화는 아파트 사람들이 소진에 대해 말하고, 그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촬영장에서 홀로 지내내며 소진의 고독에 몰두했던 심은경은 실제로 접신을 촬영하던 중에 기절하기도 했다. <헨젤과 그레텔>의 영희와 <불신지옥>의 소진 모두 공포의 주체인 캐릭터가 결국 피해자였음이 드러나면서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로맨틱 헤븐>
<로맨틱 헤븐>(2011)은 장진 감독이 평소 사랑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한 <퀴즈왕>(2010)에 이어 심은경이 또 한번 장진과 작업한 영화다. 택시기사 지욱(김동욱)은 어느날 점쟁이처럼 신통한 말을 던지는 할머니 손님을 태우고 가다가 사고로 하늘나라로 간다. 심은경은 북한군이었던 지욱의 할아버지가 전쟁 중에 만났던 첫사랑인 할머니 손님을 18살 시절 모습으로 연기했다. 젊은이의 모습으로 할머니를 연기해 코미디와 눈물을 두루 소화하는 <로맨틱 헤븐>의 연기는, 3년 후 <수상한 그녀>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써니>
첫 주연작 <써니>(2011)는 2010년 계획하던 미국 유학을 잠시 미룰 정도로 시나리오가 아주 마음 들어 선택했다. 벌교에서 자라 서울로 전학 온 나미(심은경)는 숫기 없는 성격과 여전히 남아 있는 사투리 때문에 눈치만 보다가 학교 '일짱'인 춘화(강소라)와 친해지면서 잊지 못할 열여덟 살의 시간을 지난다. <로맨틱 헤븐>에 함께 출연했던 이한위에게 특훈을 받아 사투리를 연마하고, 전작 <불신지옥>에서 선보였던 빙의를 더한 코미디 연기를 시도해 화제가 됐다. 촬영 당시 비슷한 또래였던 영화 속 나미가 느낄 법한 감정들까지 능히 보여줬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미국 유학 중 연기에 대한 감을 잃지 않고자 출연했던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갑자기 쓰러진 광해군을 대신해 왕을 연기하는 하선(이병헌)이 아끼는 기미나인 사월 역을 맡았다. 하선에게 자신이 궁으로 들어오게 된 사연을 전해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을 깨닫게 하고, 그를 대신해 독이 든 사탕을 먹어서 하선을 각성케 한다. 적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사월이 남기는 감정의 파고가 상당하다.
<수상한 그녀>
<수상한 그녀>(2014)는 2년간의 유학을 마친 심은경의 복귀작이다. 자식들이 자기를 요양원에 보낼 거라는 걸 안 말순(나문희)은 우연히 발견한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고 스무 살 때의 외모를 갖게 된다. 심은경은 전라도 사투리와 서울 말씨가 부딪히는 말투뿐만 아니라 걸음걸이까지 연구해, 53년 연상의 나문희 배우와 같은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수상한 그녀>는 866만 명을 동원하는 성공을 거두었고, 심은경에게 백상예술대상 부일영화상 춘사영화상 등의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널 기다리며>
웃음과 감동이 어우러진 <써니>, <광해, 왕이 된 남자>, <수상한 그녀> 세 작품이 연달아 큰 성공을 거둔 심은경은 차기작으로 싸늘한 스릴러 <널 기다리며>(2016)를 택했다. 15년 전 눈 앞에서 아빠를 죽은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희주(심은경)의 일주일을 그린다. 증오의 대상을 죽이고 "신이 죽었기 때문에 괴물이 필요한 거야"라 되뇌이는 희주는, 명언이 적힌 메모들로 방 안 가득 채우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가까스로 고통스런 삶을 견딘다.
<로봇, 소리> & <서울역>
2016년엔 목소리만 보탠 두 작품 <로봇, 소리>와 <서울역>이 개봉됐다. 완전히 상반된 정서의 극영화와 애니메이션. <로봇, 소리>의 소리는 실종된 딸을 10년째 찾아다니는 해관(이성민)과 동행하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억하는 로봇이다. <서울역>에선 좀비가 창궐한 서울을 헤매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가출소녀 혜선을 연기했다.
<부산행>
연상호 감독의 첫 실사영화 <부산행>(2016)엔 카메오로 출연했다. 크레딧에 오른 이름이 '가출소녀'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한 달 후에 개봉한 연상호의 애니메이션 <서울역>과 세계관을 잇는 듯한 캐릭터다. 부산행 KTX가 출발하기 직전 황급히 올라타 좀비로 변해 열차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장본인. 출연 분량은 짧지만 앞으로 쏟아지듯 등장할 <부산행> 속 좀비의 표본을 제대로 보여줬다.
<걷기왕>
<걷기왕>의 주인공 만복은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교통수단을 탈 수 없어 왕복 4시간 거리의 학교를 매일 걸어다니는 고등학생이다. 걷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 담임 선생님(김새벽)의 추천으로 경보를 시작한다. 만화 속 인물처럼 씩씩한 활력으로 가득한 만복은 그때까지 대중이 만난 심은경의 집약체 같은 캐릭터다. <수상한 그녀> 이후 연기에 대한 회의가 불어나던 시기에 만나 더욱 뜻깊게 남은 작품이라고.
<특별시민>
젊은 광고전문가 박경은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똘똘 뭉친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 선거사무소에 영입되어 정치판의 민낯을 목격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소녀'의 이미지가 강했던 심은경에게 '청년'이라는 키워드를 붙였다. 하지만 <특별시민> 속 심은경의 얼굴엔 패기보다는 패배가 더 크게 엿보인다. 박경은 치졸한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시청을 등진 채 떠난다.
<조작된 도시>
앳된 외모와 발성 때문일까, 심은경은 만화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에 자주 캐스팅 됐다. 영문도 모른 채 살인범으로 몰린 권유(지창욱)가 게임에서만 만난 팀원들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는 과정을 그린 <조작된 도시>(2017)도 그 중 하나다. 게임 상에선 '털보'였던 히키코모리 여울은 뛰어난 해킹 실력으로 권유를 돕는다. 짙은 메이크업과 어두운 차림새를 한 채 눈도 안 마주치지만, 팀원들에게 푸짐한 밥상을 대접하는 따뜻한 심성을 지녔다.
<염력>
연상호는 새 영화 <염력>(2018)에 다시 한번 심은경을 캐스팅 했다. 극악무도한 사업가 홍상무(정유미)의 지시로 사랑하는 엄마와 잘 나가던 치킨집을 잃는 류미를 연기했다. 막무가내 개발을 밀어붙이는 자본가에 저항하는 청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캐릭터였는데, 무책임했던 가부장 석헌(류승룡)에 연민을 심고 류미의 동네 사람들을 변호하는 정현(박정민)의 짝사랑 하는 대상으로 소비되는 바가 더 크게 남았다.
<궁합>
'연애하는 여자'라는 보편적인 인물은 심은경의 캐릭터와 유독 거리가 멀었다. 로맨스의 요소가 없었던 것 아니지만 늘 뉘앙스로만 남을 뿐. 제목부터 단도직입적인 <궁합>(2018)은 결혼해서 흉년을 극복하라는 왕의 명을 받은 송화옹주가 조선 최고의 역술가 서도윤(이승기)과 함께 부마 후보들을 만나는 여정을 따라간다. 이승기를 비롯한 4명의 남자 배우와 호흡을 맞추지만 혼인을 종용 받는 부조리한 상황을 펼쳐놓기 때문에 로맨스는 앞으로 나아갈 리 없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결과물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신문기자>
심은경은 2018년 첫 일본영화 <블루 아워>로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 데 이어, 이듬해 아베 신조의 사학비리 스캔들을 정조준한 <신문기자>에 캐스팅 됐다. 세간에 떠도는 말처럼 일본의 여성 배우들이 모두 거절해 그에게도 제안이 온 게 아니라, 감독이 처음부터 주인공 에리카 기자 역에 심은경을 점찍어뒀다고 한다. 심은경이 한국인인 걸 감안해 실제 인물과 달리 일본/한국인 혼혈로 설정됐다. 유창한 일본어나 거대권력의 벽에 부딪히는 기자의 감정 어느 하나 아쉬울 것 없는 모범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배우 심은경의 명백한 터닝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