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한 취향으로 분류되었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이제는 극장가를 압도하며 명실상부한 메이저 장르가 되었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인기가 대단한데, <귀멸의 칼날>부터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연달아 흥행에 성공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국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1위였던 <너의 이름은.>을 꺾고 약 460만 관객으로 1위 자리를 차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즈메의 문단속>이 2023년 6월 5일 기준, 관객수 약 550만을 달성하며 1위 자리를 쟁취했다. 

국내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을 때, 국내 애니메이션이 개봉했다. 대개 국내 애니메이션 하면 <또봇>이나, <뽀로로> 같은 아동용 시리즈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번에 개봉하는 <그 여름>은 청춘의 한 페이지를 수채화처럼 그린 작품으로 영상미와 작품성 모두 좋은 평가를 받은 수작이다. 오늘은 애니메이션 영화의 불모지라 불리던 한국에서 꽃피운 훌륭한 국내 애니메이션을 추천하고자 한다. 리스트엔 없더라도 좋은 작품을 알고 있다면 댓글로 추천해주시길!


<그 여름>(2023)
감독 한지원
장르 드라마/로맨스/멜로
러닝타임 61분

<그 여름>(2023)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우리가 사랑이란 감정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당하는지, 사랑이 얼마나 맥락 없고 갑작스러운지를 보여준다. 여름의 초입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그 여름>은 갑작스럽게 만난 두 소녀가 예기치 못한 감정에 빠져드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최은영 작가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하면 알아주는 ‘레드독컬처하우스'와 ‘라프텔'이 공동 제작했다. 이 말인즉, 작화나 영상미는 보증한다는 것.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은 듯, 갈색 눈동자가 특징인 고등학생 이경은 어느 날 운동장 한복판에서 고교 축구선수 수이를 만나게 된다. 축구공이 날아오듯 갑작스러운 만남처럼, 두 사람은 청량한 여름 풍경 속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을 키워 나가며 일생 단 한 번뿐인 열여덟의 여름을 통과한다. 『쇼코의 미소』로 잘 알려진 최은영 작가의 또 다른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 실린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담백하고 깨끗한 문장의 맛을 스크린에 영상으로 옮겨 담았다. 청춘의 한가운데를 함께 지난 수이와 이경은 어른이 되고, 각자의 길을 걸어나간다. 영화는 동성애에 대한 환상을 지우기 위해 수많은 잔가지를 걷어내고, 두 사람의 감정에 포커스를 맞췄다. 결국 동성커플도 똑같은 사랑이다. 반짝이던 시간이 끝나면, 아름다운 순간은 추억이 되고 나는 그 사랑으로 배운 점을 토대로 한 발자국 더 성숙한 사랑을 한다. 투명하고 맑은 순수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나고 싶다면 바로 극장에서 봐야 할 작품. 

그 여름

감독 한지원

출연 윤아영, 송하림

개봉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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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호흡>(2017)
감독 뿡빵뀨
장르 BL/로맨스/성인
러닝타임 15분

<과호흡>(2017)

영화 <과호흡>은 한국 최초 상업 BL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뜻깊다. 한국 애니메이터 뿡빵뀨가 제작한 인디 애니메이션이지만 2018년 10월, 라프텔에서 리마스터링 작업을 진행한 DVD 세트가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는 등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기에 힘입어 2019년에는 BL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까지 진출했으니 놀라운 성과다. 

<과호흡>은 BL 최초 타이틀답게 BL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활용했다. 동창회에서 짝사랑하던 상대를 재회하고, 두 사람이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주인공 이명은 학창 시절, 기흉 때문에 체육 시간에 혼자 앉아있는 학생이었다. 숫기 없는 성격도 한몫해 영 겉돌았지만 그에게도 짝사랑하던 상대가 있었다. 바로, 반장 선호. 선호를 다시 보기 위해 동창회에 나간 이명은 어두운 골목에서 그와 나란히 서서 그 시절을 회상한다. 이 이후는 19금이기에 설명하기보단 관심 있다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일본어에 익숙해진 BL 팬이라면 한국어로 말하는 BL 대사가 꽤나 자극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제작자 뿡빵뀨는 <과호흡>을 만든 이유에 대해 “국내에는 아직 BL 애니메이션이 제작된 적이 없는 점, 그리고 여성들이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이 아쉬워서 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돼지의 왕>(2011)
감독 연상호
장르 스릴러
러닝타임 96분

<돼지의 왕>(2011)

지금은 영화 <부산행> 감독으로 더 많이 알려진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영화 커리어를 쌓았던 인물이다. 그는 2D 애니메이션을 주로 연출해왔는데, <돼지의 왕>, <사이비>부터 <부산행>의 프리퀄 작품인 <서울역>까지 열악한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 상황에도 굵직한 작품들을 남겼다. 굉장히 어둡고 사회비판적이지만 상업영화 영역을 추구하는 감독의 특성 덕분인지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난해하지 않다고 작품의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기에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둔 편이다. 특히 <돼지의 왕>같은 경우는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 영화제에 초청받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학교폭력을 소재로 한 <돼지의 왕>은 애니메이션 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중학생 또래 간 폭력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냥개와 그에 굴복하는 돼지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며,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집단속 인간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 피해자였던 두 친구, 황경민과 정종석이 성인이 되고 다시 재회하며 그 시절의 숨겨졌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로, 가해자인 사냥개와 피해자인 돼지, 그리고 그들의 왕이었던 돼지의 왕 세 인물(들)의 구도에 집중했다. 전형적인 ‘피해자는 착하고, 가해자는 나쁘고, 피해자는 그들에게 시원하게 복수하는’ 사이다 전개 따윈 없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피해자의 삶은 여전히 피폐하다. 순백의 피해자 따윈 없기 때문에 영화는 피해자가 방관자, 가해자가 되어가는 과정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돼지의 왕

감독 연상호

출연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박희본, 김꽃비, 조영빈, 한현민, 이재형, 한윤서, 이수현

개봉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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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하는 현대사>(2014)
감독 홍덕표
장르 성인/드라마
러닝타임 3시간 52분

<발광하는 현대사>(2014)

<발광하는 현대사>는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수위가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섹스를 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강도하 작가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니, 그 수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야하진 않다. 그야말로 짐승 같은 날 것의 느낌이 난다. 작품의 스토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민주’를 갈망하는 ‘현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물들의 성적 욕망을 다루고 있다. 연상호 감독이 프로듀싱을, 홍덕표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연상호 감독은 처음부터 “‘야한 컨셉의 애니메이션’을 해보고 싶어”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홍덕표 감독은 아동용 TV시리즈물 아니면 가족용 극장 애니메이션이 전부인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에 대한 아쉬움, 불만 때문에 연출을 수락했다고. 

주인공 이현대는 일러스트 시간강사로, 평범해 보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성적 욕망에 공허함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의 상대인 민주는 교통정리 리포터로 밝고 쾌활하지만 상처 입은 과거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2년 동안 몸을 섞는 관계를 이어왔지만, 현대가 결혼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대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내 순이를 포함해 집착하다시피 놓지 못하는 민주, 현대의 학생에서 섹스 파트너가 된 주부학생, 대학후배인 미정, 단골카페 알바생 민중, 미술관 관장 영희와 관계를 가진다. 이름을 통해 ‘민주주의를 원했던 현대사’ 정도로 해석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굳이 한국 현대사와 엮어서 작품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각 캐릭터의 뒤섞이고 파괴적인 관계에 집중하면서 한국에 사는 성인들이 무엇에 종속되어 있는지 공감하는 게 더 즐거울 수도. 

발광하는 현대사

감독 홍덕표

출연 정영기, 이나라, 명승훈, 장리우, 이상희, 장혁진, 강진아, 박효준, 이민지, 황석정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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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닥파닥>(2012)
감독 이대희
장르 드라마/스릴러
러닝타임 78분

<파닥파닥>(2012)

포스터만 보면 한국판 <니모를 찾아서>처럼 보이는 <파닥파닥>은 국내 영화 홍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케팅 오류’의 애니메이션 버전이다. <지구를 지켜라>를 가족 코미디 영화처럼 홍보해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처럼, <파닥파닥>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은커녕, 꿈도 희망도 없이 잔인한 작품이다. 성인 관객들도 ‘생선을 못 먹게 됐다’는 후일담이 많을 정도로 작품은 물고기 버전으로 하드 고어 장르를 연출했다. 물고기를 산 채로 회 치는 장면을 굉장히 적나라하게 묘사하는데, 문제는 작품 속 물고기는 모두 인격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횟집 수조에서 도다리(올드 넙치)가 사랑하는 넙치 암컷이 인간에게 산 채로 목이 잘려 절규하는 장면을 눈으로 보는 신은 차마 생생히 보기 힘들 정도로 절망적인 감정을 관객에게 안겨준다. 

주인공은 횟집 수조 안 고등어로, 언젠가 이곳을 탈출해 바다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지닌 캐릭터다. 막내인 놀래미와 함께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옆 수조에 있던 킹크랩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뛰어드는데, 이 이후가 영화의 가장 참혹한 부분이다.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희망으로 도전하던 인물들이 킹크랩에게 뜯겨죽는 장면은 절망적인 걸 넘어 잔혹하다. 연출 자체도 굉장히 고어해 가장 귀여운 비주얼을 담당하던 놀래미의 시체가 점점 너덜너덜해져가는 모습은 차마 보기 어렵다. 수조 안에서 다른 물고기의 시체를 잡아먹는 장면, 회쳐지는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내장이 모두 리얼했기에 ‘생선을 못 먹게 됐다’는 관객들의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된다. 

파닥파닥

감독 이대희

출연 시영준, 김현지, 안영미, 현경수, 이호산, 김은주

개봉 201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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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