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가 세계 문학사에 남긴 영향은 지대하다. 1890년에 태어난 그는 1920년,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을 시작으로 80여 편의 추리 소설을 써내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표현이 다소 진부하지만 영어권에서만 10억 부를, 비영어권에서는 20억 부 이상 판매되어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으니 이보다 더 대중적인 작가는 전무후무하다. 첫 소설이 출판된 지 1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여전히 대중은 그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좋은 이야기는 영생한다고 하던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발표한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은 거의 100여 편에 가깝다. 그리고 2023년,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으로 애거사 크리스티의 이야기가 또 한 편 영화화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과 <나일강의 죽음>(2022)에 이어 선보이는 세 번째 애거사 크리스티 시리즈로, 이번엔 전작과 달리 영화 매체에 맞게 많은 각색을 거쳐 탄생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 원작 영화는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해냈을까. 오늘은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보았다. 100여 편을 모두 분석할 수 없었기에 아쉽게도 다섯 편만 선정하게 되었다. 만약 리스트에 없는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추천하고자 한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길.
<비뚤어진 집>(2017)
1949년에 출간된 『비뚤어진 집』(원제: Crooked House)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선정한 10대 작품 중 하나로, 크리스티는 자신의 작품 중 『비뚤어진 집』 타이틀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제목 ‘비뚤어진 집’은 동요 “비뚤어진 사람이 있었어요”(There Was a Crooked Man)에서 따왔는데, 말 그대로 레오니데스 집안 사람들의 삐뚤어진 구석을 의미한다. 작가의 대표 캐릭터인 에르퀼 푸아로나 제인 마플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특유의 서스펜스는 물론, 비틀린 가족의 초상을 잘 담아내어 명작으로 손꼽힌다.
소설은 2017년 <비뚤어진 집>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제작자인 조셉 애브람스와 샐리 우드는 애거사 크리스티 프로젝트를 위해 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 66편을 모두 읽고 최고의 작품으로 『비뚤어진 집』을 선정했다고. 영화와 소설 모두 큰 줄거리는 동일하다. 대부호인 레오니데스 집안은 3대가 저택에 모여 살고 있는데, 가장인 애리스티드 레오니데스가 살해당하면서 레오니데스 집안의 소피아와 연인이던 찰스 헤이워드가 사건을 조사해나가는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각 인물의 설정과 그에 따른 행동이 약간씩 달라진다. 또한 소설에 비해서는 조금 더 친절하게 추리를 진행하기 때문에 인물의 살인 동기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흑백 고전 누아르에서 영감을 받은 연출 기법으로 고딕풍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상미 역시 영화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매력 포인트.

- 비뚤어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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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황금가지
발매 2014.11.25.

- 비뚤어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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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질스 파겟 브레너
출연 글렌 클로즈, 질리언 앤더슨, 맥스 아이언스, 크리스티나 헨드릭스, 스테파니 마티니, 아너 니프시, 테렌스 스탬프, 아만다 애빙턴, 줄리안 샌즈, 크리스티안 맥케이
개봉 2019.09.19.
<오리엔트 특급 살인>(1974)
<오리엔트 특급 살인>하면 2017년에 개봉한 작품을 대개 먼저 떠올리지만, 1974년에 개봉한 작품 역시 주목할 만하다. 영국에서 만든 작품으로, 당대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데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네리까지 아버스넛 대령으로 출연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약간 변경된 것 외에는 대개 소설의 내용과 결말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겼는데, 역대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 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전까지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에 불만을 갖고 있던 애거사 크리스티 역시 이 작품의 완성도에 굉장히 만족했다고. 알버트 피니의 에르퀼 푸아로 연기는 ‘자신이 생각했던 푸아로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전체적인 작품성 역시 높아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잉그리드 버그먼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배경으로, 폭설로 인해 열차가 잠시 멈춘 때에 승객 한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른 사건을 해결하러 가기 위해 열차를 탔던 에르퀼 푸아로는 경찰이 올 때까지 용의자 승객 12명을 심문하며 사건을 조사한다. 에르퀼 푸아로는 발로 뛰지 않고 주어진 자료를 근거로 머릿속에서 추리하는 안락의자형 탐정의 전형으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그 캐릭터성이 도드라진다.

- 오리엔트 특급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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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황금가지
발매 2014.11.25.

-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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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시드니 루멧
출연 알버트 피니, 로렌 바콜, 마틴 발삼, 잉그리드 버그만, 재클린 비셋, 장 피에르 카셀, 숀 코네리, 존 길구드, 웬디 힐러, 안소니 퍼킨스
개봉 미개봉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
1974년 작품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케네스 브래너의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의 시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원작과 어떻게 다를까. 해당 시리즈는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리메이크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시각적인 즐거움이 도드라진다. 특히 영화의 핵심 장면을 흑백 무성영화로 연출한 장면은 고전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전반적인 스토리는 1974년 작과 동일하게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영화의 포커스가 추리보다는 각 등장인물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전과 다른데 서스펜스와 추리를 기대하고 갔다면 당황스러울 수도. 오히려 전반적으로 화려하고 유려한 연출과 등장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하면 훨씬 영화를 즐겁게 즐길 수 있다. 영화가 밀실에서 벌어지다보니 할리우드 영화치고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는데, 흥행에 성공해 <나일 강의 죽음>으로 시리즈가 이어졌다.

- 오리엔트 특급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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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케네스 브래너
출연 케네스 브래너, 페넬로페 크루즈, 윌렘 대포, 주디 덴치, 조니 뎁, 조시 게드, 데릭 제이코비, 레슬리 오덤 주니어, 미셸 파이퍼, 데이지 리들리
개봉 2017.11.29.
<나일 강의 죽음>(2022)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성공 이후, 케네스 브래너는 <나일 강의 죽음>으로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를 이어갔다. 원작 『나일 강의 죽음』은 이집트로 휴가를 간 푸아로가 유람선 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진상을 우연히 만난 옛 친구 레이스 대령과 함께 파헤치는 이야기로 영화 역시 큰 흐름 자체는 유사하지만 원작에서 크게 다르지 않던 전작에 비해선 이야기와 캐릭터성이 달라졌다. 특히 ‘가슴 뜨거운’ 푸아로는 영화 고유의 캐릭터성으로 영화에선 원작 소설엔 없는 푸아로의 젊었을 적 시절을 다룬다. 원작이 차가운 이성을 지닌 괴짜 탐정이라면, 영화는 정의감과 감정적인 모습이 도드라진다.
뜨거워진 에르퀼 푸아로와 함께 호불호가 가장 갈린 지점은 전편과 동일하게 희박해진 추리 요소다. 러닝타임의 한계로 인물이 많이 삭제되고, 합쳐지다보니 원작 팬 입장에선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다만, 케네스 브래너 특유의 연극적인 연출이 고전 영화의 감수성을 살려 영화의 무드가 좋다는 평이 많다. 또한, 사랑과 비극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인물 간의 드라마는 영화만의 색다른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다.

- 나일 강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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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황금가지
발매 2013.12.31.

- 나일 강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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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케네스 브래너
출연 케네스 브래너, 갤 가돗, 레티티아 라이트, 톰 베이트먼, 에마 매키, 아네트 베닝, 아미 해머, 로즈 레슬리
개봉 2022.02.09.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2023)
이번에 개봉한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오늘 소개하는 작품 중에 유일하게 원작과 이름이 다르다. 케네스 브래너의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의 세 번째,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은 1969년 발표작 『핼러윈 파티』를 원작으로 하는데, 전작들에 비해 비교적 유명세가 높지 않다. 원작의 유명세에서 벗어난 덕분일까, 원작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과감한 각색이 눈에 띈다. 배경부터 다른데, 원작은 영국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펼쳐진다.
영화는 원작의 고딕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해 ‘초자연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는다. 영화는 푸아로에게 오랜 친구이자 베스트셀러 추리 작가 올리버(티나 페이)가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오는 영매사 레이놀즈(양자경)의 실체를 밝혀달라고 부탁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유령이라는, 어쩌면 추리극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활용해 영화는 서스펜스를 높여가는데, 원작과는 재미의 방향성이 달라 오리지널 영화 그 자체로 즐겨도 무방하다. 원작에서는 어느 핼러윈 파티에서 살인사건을 목격했다 주장하는 13살 소녀 조이스가 양동이에 머리가 처박혀 익사된 채로 발견되면서 추리가 시작된다.

- 핼러윈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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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황금가지
발매 2013.05.27.

-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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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케네스 브래너
출연 케네스 브래너, 양자경, 제이미 도넌, 티나 페이, 켈리 라일리, 주드 힐, 엠마 레어드, 알리 칸, 카일 앨런, 카밀 코탄
개봉 2023.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