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키메라>.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이번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상영작 공개 때부터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거장 감독부터 지금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예 감독의 신작까지 유럽 영화계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이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이탈리아 영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거시적인 흐름을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총 9편의 이탈리아 영화가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있으며, 그중에는 봉준호가 사랑하는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의 신작 <키메라>, <아들의 방>(2002)를 통해 황금종려상을 받은 난니 모레티의 신작 <찬란한 내일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큰 관심을 받은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영화 <아다지오>.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특히 이번에 초청된 이탈리아 영화 중에는 필름 누아르와 연관된 작품들이 눈에 띈다. <파라다이스 로스트: 마약 카르텔의 왕>(2014)으로 잘 알려진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 감독의 신작 <아모레의 마지막 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2018)로 많은 사랑을 받은 스테파노 솔리마 감독의 신작 <아다지오> 등은 모두 이탈리아의 각 계층을 누아르의 문법 아래에서 흥미롭게 관찰한다. 알랭 파로니라는 무서운 신인 감독의 돌풍도 주목할 만하다. 장편 데뷔작인 <끝없는 일요일>을 통해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심사위원특별상을 받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이탈리아 영화의 과거-현재-미래 각 한 편씩을 직접 선정하여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한 국가의 영화계가 지닌 거시적인 흐름을 한자리에서 체험할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과거 - 마르코 벨로키오 <납치>

1965년 장편 데뷔작 <호주머니의 손>을 연출한 이래로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인생은 60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은 그의 이력은 그가 이탈리아 영화의 산증인과 같은 존재임을 보여준다.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2021년에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쌍둥이 형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마르크스 캔 웨이트>를 공개하며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신작 <납치>는 에드가르도 모르타라 납치 사건이라는 실화를 각색하여 당시 교황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와 권력의 폭력 구도를 폭로하는 작품이다. 종교 기관이 조직적으로 아이를 납치하여 강제로 개종시킨다는 충격적인 사건은 몇 년 전 스티븐 스필버그도 이 사건을 각색하여 영화화를 시도했을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다. 이탈리아 사회의 심연을 파헤치는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세계와도 맞닿는 이야기기도 하다.

1858년 어느 밤, 볼로냐에 사는 유대교 가문 모르타르 가의 집에 종교 경찰이 찾아와 여섯 살밖에 되지 않는 아들 에드가르도를 납치해 간다. 가톨릭 신자인 그 집의 하녀가 에드가르도가 갓난아기였던 시절 몰래 세례를 주었다는 신고가 들어와, 아이를 가톨릭 신자로 보고 그를 개종자의 집에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교황청의 막대한 권력과 왕정과의 신경전으로 인해 ‘개종’의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로 직결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에드가르도를 되찾기 위해 10년이 넘도록 힘겨운 법적 분쟁을 거치지만, 점차 일련의 사건들은 가족들의 삶이 아닌 대의와 이데올로기에 휩싸일 뿐이다. <납치>는 종교와 권력이 서로 촘촘하게 얽힌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한 사람의 정체성이 소멸되는가를 거장의 섬세한 손길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풍자극과 사회고발극 사이에서 <납치>는 절륜한 균형을 유지한 채 역사 속의 무력한 개인의 비극을 그려낸다.


현재 -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 <아모레의 마지막 밤>

마르코 벨로키오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이탈리아 영화계의 윤리에 대한 질문을 종교로 풀어냈다면,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다음 세대는 네오 누아르의 장르를 통해 이탈리아의 초상을 그려낸다. 이들이 영화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던 90년대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로 대변되는 부패 정치인의 장기 집권과 언론 장악을 통한 비디오 민주주의의 시대였다. 마피아와의 결탁, 포퓰리즘 정치, 무기력한 언론과 이로 인한 부정부패의 만연은 당시 이탈리아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였다. 당연히 이 시기를 겪어온 감독들은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권력의 암투를 폭로하는 네오 누아르 장르를 통해 작금의 이탈리아를 묘사하려 했다.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의 <아모레의 마지막 밤> 역시 35년간 총 한 발을 쏘지 않은 ‘무사고’ 경찰 아모레가 자신의 정년 퇴임 전날 범죄에 연루되며 수렁으로 빠지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압도적인 밀라노의 풍광을 드론으로 담은 오프닝과 은퇴를 선언하는 무전으로 마무리하는 아모레의 얼굴이 담긴 클로징은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마치 위압적인 도시의 커다란 주둥이가 원리원칙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소시민 경찰을 집어삼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은퇴 하루 전 자신이 아끼는 파트너 티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아모레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탐정이 아니다. 그는 경찰 세 명과 중국인 두 명이 터널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범죄 현장에 발이 묶인 남자이며, 그를 의심하는 검찰과 자신을 이용한 브로커 무리 그리고 중국인 마피아의 시선에 포위당한 남자다.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는 <아모레의 마지막 밤>에서 끊임없이 인물과 사건의 외피를 벗겨낸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선에서 악으로, 순수에서 타락으로 향하는 이분법적인 세계가 아니다. 차라리 <아모레의 마지막 밤>은 이탈리아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해체하는 데 실패한 마틴 스콜세지의 <특근>을 보는 것만 같다.


미래 - 알랭 파로니 <끝없는 일요일>

1992년생으로 만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파격적인 작품으로 세계 영화계를 뒤흔드는 이름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미래로 여겨지는 알랭 파로니 감독의 장편 데뷔작 <끝없는 일요일>은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부터 토론토, 뉴욕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며 많은 관심을 모았다. 대학에서 그래픽아트와 사진, 그리고 VR 테크닉 등을 공부했던 그의 경력은 <끝없는 일요일>에서도 돋보인다. 마치 미디어 아트를 보는 듯한 파편화된 이미지와 열화된 픽셀 단위, 정신 분산을 일으키는 비정형의 이미지가 쇄도하며 때에 따라 VR부터 아니메를 비롯한 서브컬쳐의 이미지들을 적극 차용한다. 분명 115분의 정상적인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수십 편의 영화를 보게 된 기분이 들 것이다. <끝없는 일요일>은 사방이 이미지로 둘러싸인 지금의 세상에서 어느 하나 연결된 것 없이 모든 것이 분절되어 미분된다는 ‘동시대성’의 감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끝없는 일요일>의 출발점은 방황하는 이탈리아의 세 청춘 브렌다, 알렉스, 케빈의 하루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돈도, 일도, 계획도, 그 어느 것도 가지지 않은 채 로마의 명소들로 놀러 다닌다. 음주와 테크노, 약간의 마약과 흡연 등 자극적인 쾌락을 좇는 이들은 21세기의 히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연인 사이인 브렌다와 알렉스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 브렌다는 임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알렉스는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흔들리는 청춘을 담아내는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분열한다.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무너지는 현대 사회의 빈곤한 이미지들을 대변하듯, 알랭 파로니는 <끝없는 일요일>을 통해 무너져 가는 이 시대를 함께 붕괴하며 그려낸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