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 이 글에는 영화 <잠>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르렁~ 드르렁~’ 오늘따라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소리. 남편의 코골이 소리가 신경을 툭툭 건드린다. 점점 커지는 소리에 남편의 몸을 팔로 툭 친다. 그러자 잦아드는 소리. 이때다 싶어 잠을 청해보려는데.
드르렁~ 드르렁~ 커어어어어~컥
영화 <잠>은 한 남성의 코 고는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코골이 범인은 현수. 그리고 그 옆에는 현수의 아내 수진이 자고 있다. 현수와 수진은 신혼부부다. 영화 <잠>은 신혼부부의 수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몇 시간이 흐르고 코 고는 소리도 어느새 잦아들었다. 하지만 수진의 옆에 현수가 없다. 수진이 놀라서 깨보니 현수는 앉아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현수의 말. “누가 들어왔어.” 그 타이밍에 문까지 쾅! 닫힌다. 수진은 깜짝 놀라 거실로 나간다.
진짜 누가 들어온 걸까.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현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아무리 깨워도 잠만 쿨쿨 잔다. 심호흡하고 거실로 혼자 나온 수진. 도둑이면 어떡하지. 바닥에 있는 도구를 손에 쥐어본다. 하지만 결과는 싱겁다. 덜 닫힌 문이 바람 때문에 저절로 움직이면서 내는 소리였다. 다행이다 싶은 수진은 배를 감싸 안는다. 그제서야 카메라는 수진의 배를 비춘다. 수진의 배가 남산만 하다. 수진은 임산부다.
아침이 밝아오고 현수는 출근을 한다. 현수는 단역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수진도 집을 나서려는데 아래층 아주머니가 벨을 누른다. 쿠키까지 두 손에 들고서는 새로 이사 왔다며 인사를 한다. 하지만 본론은 따로 있다. 아주머니는 말한다. “새벽만 대면 이 집에서 쿵쾅대는 소리에 미치겠어요. 비명소리도 좀 들리는 것 같고. 조용히 좀 살아줬으면 합니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예민한 걸까
아니면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리고 다시 찾아온 밤. 잠자는 현수가 코를 골자 수진이 뺨을 살짝 때린다. 그러자 현수가 찝찝한지 자신의 뺨을 긁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침, 현수의 얼굴이 피투성이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밤새 돌아다녔는지 피가 온 거실에 뚝뚝 떨어져 있다. 밤새도록 자신의 뺨을 긁은 것이다.
그리고 점점 심해지는 현수의 증세. 갑자기 자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거실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번엔 일하느라 깨어 있는 수진이 이를 직관한다. 수진의 부름에도 현수는 아무런 미동이 없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더니 생고기를 씹어 먹고 날계란도 입에 털어넣는다. 목이 막히는지 잠시 캑캑 대더니 이제는 수돗물까지 벌컥벌컥 마신다.
이 모든 걸 보게 된 수진은 그야말로 혼란스럽다. 아래층의 민원이 머릿속을 스친다. 매일 밤 현수는 이래왔을 것이다. 그리고 매일 밤 아래층은 층간 소음에 시달렸을 테다. 현수와 수진은 당장 수면 클리닉을 방문한다. 그리고 의사에게 다양한 해결책을 처방받는다. 집을 안전하게 만드는 게 우선. 생활 습관을 바로잡기 시작한다. 수면을 방해하는 알콜은 절대 금지. 밤 10시 전 취침은 필수. 물론 약도 처방받았다. 현수의 병은 렘수면 행동장애, 흔히 말하는 ‘몽유병’이다.
고칠 수 있을까? 고칠 수 있겠지!
현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테지만, 남편의 잠버릇도 꽤나 고약하다. 과장 조금 보태면 옆에서 골아대는 소리가 가끔 탱크 소리로 들릴 때가 있을 정도. 연애 때야 매일 함께 자는 것이 아니니 별생각 없었다. 물론 내가 잠귀가 어두울뿐더러 코 고는 소리에 크게 취약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하지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엔 남편이 참 미안해한다.
남편도 수많은 ‘노력’을 했다. 코골이에 관해서라면 모든 유튜브를 섭렵했다. 코골이에 좋다는 가습기도 틀어보고, 비타민 C도 섭취했다. 오죽했으면 코숨테이프도 샀다. 입을 테이프로 막고 자면 코로 숨을 쉬게 되어 코골이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테이프로 입을 꽁꽁 싸매고 자던 날. 옆에 누운 남편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입을 테이프로 틀어막은 탓에 침실은 묵언수행장이 됐다. 그리고 기대감에 기다려보는데. 이윽고 들리는 소리. 드르렁, 드르렁. 그리고 얼마 안 가 테이프가 툭 하고 떨어진다.
현수와 수진도 기대감에 눈을 뜬다.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하지만 거실로 나간 부부는 처참한 풍경에 말을 잃는다. 냉장고 앞은 음식 잔해물로 더럽혀져 있고. 냉동고 안에는 현수와 수진의 반려견 후추가 들어 있다. 현수의 몽유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 마음
영화는 그로부터 몇 주 후를 보여준다. 수진의 불룩하던 배는 홀쭉해졌고. 수진의 옆에는 아기가 누워 있다. 수진을 출산을 했다. 하지만 출산을 하고 나니 현수의 몽유병이 더욱 신경 쓰인다. 안방 문에 종을 달고, 현수를 침낭에서 재운다. 하지만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몽유병 살인사건을 검색해 보기에 이르렀다. 사랑스러운 반려동물 후추도 잊히지 않는다.
후추에게 그랬듯, 우리 아기한테도 그러면 어쩌지. 수진은 아기가 걱정이다. 냉동고 안에서 얼어 죽는 아기 꿈도 꾼다. 그래서 수진은 화장실 문을 잠그고, 욕조 안에서 아기와 잠을 청한다. 하지만 또 현수가 깼다. 문을 두드린다. 쿵쿵. 수진이 열어주지 않자 문을 부술 듯 쾅쾅 쳐댄다. 그래도 문이 안 열리자 잠잠해지는데. 수진이 슬며시 문을 열자. 현수는 거실 한 켠에 오줌을 싸고 있다.
특별한 사항이 되면 어떤 일도 더 크게 다가오게 된다. 수진에게 그것은 아기. 우리 부부에게 그것은 싸움. 남편과 다툰 날엔 코골이가 더욱 크게 들린다. 사실 고백하자면 그럴 때면 팔로 치는 횟수도, 강도도 더 올라간다. 한번은 코 고는 남편을 밀어서 남편이 침대에서 떨어진 적도 있다.
싸움 말고도 하나 더 있다. 밀폐된 공간. 남편과 기차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탈 때면 늘 긴장한다. 장소 불문 코골이를 시작하는 남편 덕분(?)에 머리만 대면 잠자는 내 습관도 사라졌다.
돌팔이 새끼
수진의 외침과 함께 영화는 급변화를 맞는다. 수진은 친정 엄마의 권유로 무당을 힘을 빌려보기로 한다. 과학에서 미신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현수와 수진의 집에 온 무당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잠잘 때는 영이 약한 법이지. 그래서 귀신이 참 잘 달라붙어.” 그러다 갑자기 남자 목소리로 변하더니 수진을 빤히 쳐다본다. “개 짖는 소리 없이, 아기 우는소리 없이. 너랑만 단둘이 살고 싶다.”
뒤이어 무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수진을 혼란스럽게 한다. 수진을 거쳐갔던 남자 중 한 명이 귀신이 되어 현수의 몸에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그 남자의 이름을 알아야 빙의도 하고 굿도 할 수 있다는 것. 수진은 머리가 아프다. 거쳐갔던 남자가 한 둘인가. 그 남자 중에 죽은 사람은 또 누가 있단 말인가. SNS에서 온갖 파도란 파도는 다 타보지만. 수진의 과거 남자 중에는 고인이 된 사람이 없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 급하게 집을 내놓은 아랫집 할아버지. 유난히도 부부에게 관심이 많았던 아랫집 할아버지.
수진은 곧장 아랫집으로 간다. 아랫집 여자에게 물어보니 할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란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집에 딸이 사는 것이다. 무언가 맞아떨어지는 느낌. 수진은 그렇게 미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결말이 궁금해지는 전개
그리고 영화는 또 몇 달 후를 비춘다. 현수의 수염이 수북이 자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날은 현수가 수면 클리닉에서 퇴원하는 날이기도 하다. 몇 달간 약을 바꾸고 생활한 덕분에 몽유병이 완치되었다는 의사의 축하 인사도 받는다. 그리고 그날 수진도 퇴원한다. 수진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영화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지만. 아마도 남편의 몽유병으로 신경이 쇠약해진 이유일 테다.
그리고 수진과 현수는 몇 달 만에 조우한다. 하지만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이다. 현수가 돌아온 집은 예전 집이 아니다. 집에는 온통 부적이 붙어져 있다. 그리고 수진은 현수에게 자초지종을 말한다. 현수가 완치한 것은 병원 때문이 아니란 것을.
현수의 증상은 묘하게 귀신 들린 현상과 비슷하다. 영화 초반 얼굴을 긁어 피투성이가 된 현수의 사례를 귀접 증상으로 구분 짓는다. “여보, 그때 얼굴 막 긁고 그랬잖아. 그게 귀신이 들리면 온몸이 간지러운 현상이 일어난대. 그뿐만이 아니야. 여보가 그때 우리 후추. 귀여운 후추 죽였잖아. 그것도 귀접 증상이야. 귀신들이 강아지 보잖아. 그리고 강아지를 싫어하고.”
게다가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다. 아랫집 할아버지가 오늘 밤에 천도를 못하면 평생 현수의 몸에 붙어 있을 거란 것. 무당이 할아버지 49재 굿을 지내 주어 여태까지는 괜찮았으나 오늘부터 다시 귀접이 시작될 거란 거다. 그리고 영화는 스릴러로 바뀐다. 화장실에서 아랫집 여자가 손이 묶인 채로 발견된다. 수진은 아랫집 여자. 즉 할아버지의 딸을 인질로 만들어서라도 현수에게서 할아버지를 떨어뜨리려 한다. 그리고 수진은 아랫집 여자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현수에게 외친다. “할아버지, 내 남편 몸에서 나가!”
그러지 말라며 수진을 말리던 현수가, 갑자기 할아버지 목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귀신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이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가 끝나자 영화관이 술렁였다. 남편은 곧장 휴대폰을 켜서 영화 <잠>의 후기를 읽기 시작한다. 열린 결말이니 해석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해석은 하나다. 마지막 장면은 현수의 연기였을 거라고. 귀신들린 연기를 해야만이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임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 그 때문에 극중 인물 현수의 직업을 연기자로 설정했을 것이란 추측도 이어졌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집에 돌아오고 우리 부부도 잠자리에 든다. 하지만 뭔가 무섭다. 남편의 코골이가 시작되고도 눈이 말똥말똥하다. 코골이의 폭격 때문이 아니다. 코골이가 잦아들고 내가 잠이 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에 대한 걱정이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괜히 휴대폰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자다 깬 남편이 한마디 한다.
자기야, 자기도 코 많이 골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자.
매일신문 임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