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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명화] 달리기를 시작하려 한다면 〈로레나:샌들의 마라토너〉

성찬얼기자

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 주-


​“우리 런닝 한 번 해볼까?” 남편의 말이 영 달갑지가 않다. 건강한 제안인데 왜 그러냐고?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전적이 많다.

​1년치 헬스 이용권을 끊었다가 기부천사가 됐고, 골프를 해보겠다고 장비까지 다 샀는데 재미를 못 붙였다. 등산을 해보겠다고 구매한 트래킹화는 창고 안을 나뒹굴고 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남편의 말에 나는 또 솔깃하고야 만다.

달리기는 몸뚱아리만 있으면 되잖아.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런닝은 몸뚱아리만 있으면 된다더니.. 남편은 그렇게 한참을 쇼핑했다.

하지만 이 말을 외친지 일주일 만에 남편은 변심했다. 온갖 유튜브를 섭렵하더니 주말에 아울렛이나 한 번 가보자고 한다. 런닝복은 땀 배출이 잘 되는 소재로 사야 한다는 말과 함께. 면으로 된 체육복을 입으면 큰일난다나 뭐래나. 불행 중 다행으로 런닝화는 집에 있는 걸 신겠단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다. ‘몇 달 뛰어보고 런닝이 몸에 익으면 그때 새 신발을 사겠음’. 정말인지 독소조항이 따로 없다.


그런 남편에게 딱 맞는 영화를 찾았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로레나 :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는 멕시코 북부 치와와의 라라무리 대자연에 사는 22살 로레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슴처럼 말이 없는 로레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것이 행복한 산골 처녀다. 그리고 영화는 로레나가 달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가 달린다. 그런데 복장이 영 이상하다. 어딜 급하게 가는 걸까. 그만큼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다. 뛸 때마다 펄럭이는 긴 치마와, 발가락이 다 보이는 샌들. 하지만 그녀의 가슴팍에는 번호가 적힌 종이가 붙었다. 이 종이만이 마라톤에 참가했음을 알려준다. 로레나는 (다큐멘터리의 부제처럼) 샌들의 마라토너다.​

로레나는 우연히 도전한 울트라마라톤 대회에서 100킬로미터를 12시간 44분 25초 만에 완주했다. 스물두 살에 벌써 네 번이나 우승한 그녀의 일상을 후안 카를로스 룰포 감독이 28분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결승전을 향해 힘껏 달리면 기분이 좋죠.

로레나는 멕시코 치와와에 산다. 이곳 라라무리는 공기가 맑은 곳이다. 로레나의 말에 의하면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도 없다. 그리고 카메라는 로레나의 일상을 비춘다.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그녀는 동물을 돌보고 있다. 그 옆,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도끼질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다 이렇게 컸어요. 집에서 친구도 없이 지냈죠.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도 아주 멀리 살죠.”​

그렇기에 로레나에게 걷는 것은 일상이다. 생필품 하나를 사러 가는 길도 서너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도 없다. 로레나는 걷고 또 걷는다.​

형제들도 함께 뛴다. 치마를 짧게 잡고 굽 없는 샌들을 신은 모습이 로레나와 판박이다. 그들의 손에는 부엉이 먹이가 들렸다. 오르락내리락. 개울을 넘고 돌 위를 달리며 동물들에게 식량을 전달한다.

​그 길을 달리다가 로레나는 자신의 다른 면을 발견한다. 달리기가 편하다는 사실. 잘할 수 있다는 사실. 뛰어갔다 오면 시간도 훨씬 절약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점점 더 달렸고, 그리고 점점 잘 달렸다.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우리 부부도 결국 달리기를 시작했다. 산악지대 절경을 배경으로 달리는 로레나의 모습에 동기부여가 확실히 됐다. 로레나 덕도 조금 봤다. 영화를 본 이후 장비빨에 대한 남편의 일장연설은 멈췄다. 샌들을 신고 달리는 로레나의 모습은 초보 러너에게도 큰 귀감이 됐다.

​다만 달리기 어플은 적극 수용했다. 해당 어플은 이어폰을 통해 마치 옆에서 뛰듯이 코치를 해 준다. 게다가 무료다. 좋아진 세상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오늘은 1분 30초 뛰고 2분 걷기를 반복하겠습니다. 자 우선 준비 달리기부터 천천히 5분 시작하죠.”​

달리는 내내 이어폰에서는 런닝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걷고 뛰고 걷고 뛰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30분. 일주일에 3번. 8주 프로그램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을 완주한다고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프로그램을 마쳐야 ‘런닝 시작할 준비가 됐다’ 라는 말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관건이다.

우리 부부는 집 앞 중학교에서 달린다. 퇴근 후 30분. 푹신푹신한 트랙을 벗 삼아 달리고 또 달린다.
우리 부부는 집 앞 중학교에서 달린다. 퇴근 후 30분. 푹신푹신한 트랙을 벗 삼아 달리고 또 달린다.
런닝 1일차. 잠깐만 뛰어도 숨이 차오른다. 이런 저질 체력!
런닝 1일차. 잠깐만 뛰어도 숨이 차오른다. 이런 저질 체력!

집 근처에 중학교도 있다. 런닝을 하려고 보니 우리 동네가 런닝하기 꽤나 좋은 인프라였다. 트랙은 또 어찌나 푹신푹신한지. 퇴근 후 30분 런닝. 숨이 차오르지만 완주하고 나서의 그 개운함은 정말인지 끝내준다. 중학교를 벗어나 강변을 달린 적도 있다. 강바람을 느끼며 달리는 기분이란. 안 해본 자는 느껴 볼 수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8주 프로그램의 절반을 지났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우리 부부는 또 다른 고비를 만났다.

오늘은 뛰는 시간이 4분으로 늘었네

휴.. 너무 힘들다..

​처음에 1분 뛰던 것이 4분으로 늘었다. 자연스레 전체 달리기 시간도 길어졌다. 4주 동안 뛰는 시간을 천천히 늘려 갔음에도 저질 체력 우리 부부에게 런닝은 꽤 힘든 일이 됐다.

​우리 부부는 또 온갖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이제는 또 겨울이네. 겨울에 뛰면 안 되는 것 아니야? 뼈 다칠 수도 있다는데. 아 로레나도 발 아프다고 했잖아!


별의별 로레나 핑계라니. 하지만 실제로 로레나에게도 고비는 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이날도 로레나는 샌들을 신고 뛰었다. 로레나의 꽉 다문 입이 그녀의 상태를 짐작케 했다. “할 수가 없었어요.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고 추웠죠. 곧 쓰러질 것 같았어요. 갈 길이 너무 먼 것 같았죠.”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로레나: 샌들의 마라토너〉

양말도 없이 맨발에 샌들만 신은 로레나는 지칠 때로 지쳤다. 굽 없는 딱딱한 샌들은 로레나에게 극심한 고통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1등을 했다. 로레나는 무려 13시간 26분을 뛰었다.​

로레나에게 런닝화를 선물해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런닝화를 받아든 로레나의 표정은 아리송하다. “이상한 느낌이에요. 전 런닝화에 익숙하지가 않아요. 이건 안 신을 것 같아요. 이런 거 신은 사람들은 늘 저보다 뒤처지더라고요.”


넌 달리기에 진지하게 임하니?

마라톤 대회를 휩쓸고 다니는 로레나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그러자 로레나는 “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로레나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아버지의 질문에 반대로 말하는 청개구리처럼. 그렇다. 로레나에게 달리기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진지하게 임할 일도 아니다. 그저 일상의 달리기에, 대회라는 명분만 붙었다. 로레나는 말한다. “절 쫓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기뻤어요. 저에게 달리기는 즐거움이에요.”

​우리 부부에게 달리기도 즐거움이 되길 바란다. 진지하게 임하는 운동이 아닌, 그냥 일상의 연장선 같은 것. 거창할 것 없는 그저 그런 것. 힘들 때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너무 즐겁기에 이겨낼 수 있는 것.​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니 비가 온다. 겨울비라 포슬포슬. 양은 많지 않다. 하필이면 다시 마음먹은 날 비가 내릴게 뭐람. 하지만 남편이 웬일로 옳은 소리를 한다.

로레나는 비 와도 1등 했던데

우리도 오늘 뛰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