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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씬드로잉] 이 사람아, 예술에 완성이 어디 있나! 〈파이널 포트레이트〉

제임스 로드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만남을 그린 영화

성찬얼기자
〈파이널 포트레이트〉
〈파이널 포트레이트〉

미국 출신의 저술가 제임스 로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정보요원으로 파리에 파견된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종전 후에도 파리에 체류하면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한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탈리아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다. 자코메티는 당시 파리에서 한참 유명세를 날리던 인물이었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입상(立像)으로 20세기 조각의 혁신아로 평가받던 상황. <파이널 포트레이트>(2017)는 당시 제임스 로드가 자코메티와 교류한 일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뭐 이런 어수선한 미술가라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스탠리 투치가 각본과 감독을 맡았는데, 직접 자코메티의 초상화 모델을 했던 제임스 로드가 쓴 1985년에 발표한 『작업실의 자코메티』가 원작이다. 한국에선 예전에 번역됐다가 현재는 절판 상태다. 그 책의 표지가 바로 자코메티가 그린 제임스의 초상화다. 제임스 로드는 같은 해 800여 페이지 분량의 자코메티 평전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역시 한국에도 번역돼 있다.

〈파이널 포트레이트〉
〈파이널 포트레이트〉

제임스 로드(아미 해머)가 자코메티의 초상화 모델을 한 건 1964년 9월 12일부터 10일 1일까지였다. 꼬박 18일 동안 자코메티의 시선에 붙들려 있었던 거다. 제임스는 당시 미국으로 귀국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길어야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초상화 작업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진다. 자코메티(제프리 러쉬)의 작업은 기약도, 계획도 없다. 회색빛(영화 전체가 회색 톤이다)의 휑하고 지저분한 작업실에서 자코메티의 행동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산책이나 하자고 하는가 하면, 작업실에 막 도착한 제임스에게 요기나 때우자고 했다가 다시 뒤돌아서 바로 작업에 들어가자고 하는 식이다.

제임스는 당혹스럽다. 미국에 있는 연인과의 국제전화가 잦아진다. 귀국 비행기표를 하루가 멀다 하고 연기한다. 연인과의 갈등도 증폭한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인내심을 발휘하지만, 진이 빠지고 난감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코메티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겠지만, 도대체 그림이 완성될 수나 있는 건지, 자신이 언제 귀국하게 될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코메티는 제임스의 사정 따위 아랑곳없다. 혼잣말을 구시렁대며 혼자 좌절하고, 제풀에 짜증을 내거나 뜬구름 잡는 듯한 예술의 원리와 본질에 대한 뜬금없는 잠언을 뇌까리기도 한다. 스스로도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지 자신 없어 하는 태도다.


도대체 그림은 언제 완성되는가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간다. 그림은 기본 데생을 했다가 다시 흰색으로 지우고 회색으로 덧칠했다가 다시 엉뚱한 선을 긋고 파기하는 과정을 수차례 겪는다. 그러면서 묘하게 시점이 바뀐다. 모델을 관찰하는 화가의 시선보다 화가의 행동과 심리를 관찰하는 모델의 심리가 도드라지는 것이다. 이런 전이(轉移)는 화가와 모델 사이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화가가 모든 상황을 이끌고 가는 주체로 시작하지만, 모델도 사람인 이상 느낌과 생각이 없을 수 없다.

〈파이널 포트레이트〉
〈파이널 포트레이트〉

모델이 되는 건 모든 움직임과 표정을 타인에게 통제받는 일이다. 특정 포즈를 취한 상태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화가(또는 화가가 지시한 방향)를 줄곧 응시해야 하는데, 그땐 제약된 움직임만큼 상대의 움직임과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그러다가 구속과 억압, 지시와 복종의 메커니즘이 오묘하게 역전되는 순간이 있다. 부동과 움직임의 차이(시선의 권력이라고나 하자)가 되레 반작용을 일으켜 바라봄을 당하는 자가 바라보는 자의 동태를 움켜쥐게 되는 것인데, 이때 모델은 화가의 시점보다 더 넓고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그럴 때, 화가는 모델에게 종속당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지나야 결국엔 화가만의 독창적인 시선과 형태에 대한 자각이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지칠 대로 지친 제임스가 더 이상 귀국을 미룰 수 없어 자코메티의 동생 디에고(토니 샬호브)와 모종의 작전(?)을 짜는 상황에서 은근히 드러난다. 디에고는 평생 자코메티의 보조 노릇을 한 인물이다. 그 자신도 미술에 뛰어난 재능(자코메티의 아버지 자코모 자코메티는 유명한 화가였다)을 지녔지만, 예술가가 되기엔 너무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디에고는 형 알베르토의 그늘 노릇을 하다가 형이 죽고 난 뒤, 알베르토의 증언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그늘이 있다. 바로 아내 아네트(실비 테스튀)다.


예술가의 그늘, 그 내밀한 애정

〈파이널 포트레이트〉
〈파이널 포트레이트〉

영화에서 아네트는 거의 몸종에 가까운 역할이다. 추레한 행색으로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자코메티를 내조하는데, 그 사정은 자코메티의 육체적 결함과도 관련 있다. 자코메티는 아네트보다 젊은 매춘부 캐롤린(클레멘스 포시)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는다. 캐롤린은 아네트의 눈총 따위 아랑곳 않고 자코메티의 작업실을 제집 드나들 듯한다. 자코메티는 그녀를 마냥 예뻐하며 신식 자동차까지 선물할 정도다. 캐롤린 말고도 자코메티의 일생엔 여러 여인들(주로 매춘부)들이 거쳐갔다. 영화에서도 매춘굴을 찾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자코메티는 성 불구자였다.

17살 때 고환염을 앓고 난 이후, 자코메티의 성 인식은 매우 비틀려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제임스 로드가 쓴 평전을 참조하면 확인할 수 있다. 한참 성적으로 달뜨기 마련인 사춘기 시절 그러한 병을 앓고 난 뒤 사람의 성정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선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함부로 판단하기 곤란한 사항이다. 아네트를 대하는 자코메티의 태도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면이 많다. 그럼에도 아네트는 이따끔 불평을 늘어놓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는 그 이면을 영화는 다 보여주지 않는다. 자코메티가 아네트에 대한 애정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지 역시 평전에 잘 나와 있다.

제임스의 초상화는 지지부진하던 끝에 제임스가 수차례 연기하던 귀국 일정을 못 박은 이후 은연중에 완성(?)된다. 그런데 그 완성이 정말 완성인지는 자코메티도 제임스도, 디에고도 장담할 수 없다. 자코메티는 초상화를 그리는 내내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에 시달린다. 명예와 부를 움켜쥔 대가의 자신감이나 허세 따윈 일절 찾아볼 수 없다. 행색은 늘 지저분하고, 하루에 담배를 네 갑씩 피워대는 괴짜 노인네의 심술만 천연덕스러울 뿐이다. 자코메티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모종의 강박에 시달리는 동시에, 강박에 시달리는 자기 자신에게마저 쫓기는 느낌이다. 수십 년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마치 아직도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도대체 미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태도다.

〈제임스 로드의 초상화〉(A Portrait Of James Lord, 1964)
〈제임스 로드의 초상화〉(A Portrait Of James Lord, 1964)

자코메티가 같은 세대 화가들을 헐뜯는 장면이 있다. 피카소에 대해선 ‘남의 아이디어나 훔쳐다 쓰는 사기꾼’이라 하고, 파리 오페라 극장의 천장 그림을 완성한 샤갈의 작품에 대해선 ‘그딴 페인트질’이라는 식으로 비꼰다. 피카소와 자코메티는 한때 절친한 사이였으나 피카소의 요란한 현시욕과 능란한 언변에 학을 떼며 절교했었다. 물론 자코메티의 입장이다. 영화에선 피카소의 입장이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예술은 영원히 길을 잃어 영원이 되는 길

예술가는 일종의 자신만의 환상에 사로잡힌 자일 수 있다. 환상인 만큼 아무리 현실의 질료를 궁극까지 몰아부친다 해도 그것은 실현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더 추구하게 되고, 그래서 더 환멸하게 되며, 그래서 더 악착같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된다.​
예술가는 일종의 자신만의 환상에 사로잡힌 자일 수 있다. 환상인 만큼 아무리 현실의 질료를 궁극까지 몰아부친다 해도 그것은 실현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더 추구하게 되고, 그래서 더 환멸하게 되며, 그래서 더 악착같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된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 자신만의 예술 세계라는 건 예술의 지상 목표인 동시에 잡히지 않는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애초에 그러한 목적 자체가 부재하는 것, 또는 부재 자체가 목적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예술가는 일종의 자신만의 환상에 사로잡힌 자일 수 있다. 환상인 만큼 아무리 현실의 질료를 궁극까지 몰아부친다 해도 그것은 실현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더 추구하게 되고, 그래서 더 환멸하게 되며, 그래서 더 악착같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된다. 나이 먹어서 더 깨닫고, 더 실력이 늘고, 더 분명해지는 건 젊은 한때의 일일 수 있다. 그 단계를 지나고 나면 도무지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허방 속에서 헛손질만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가 있는 법. 이건 비단 미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가는 음악 속에서 허우적대고, 문학가는 문장 속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어쩌면 그 길 잃음 자체가 예술의 진짜 의미이자 본질일지 모른다 <파이널 포트레이트>는 예술가, 그리고 예술의 그러한 기본 속성을 깔끔하고 유머러스하게 포착한 영화라 여겨진다.

제임스 로드는 초상화 작업이 끝난 후, 미국으로 떠난다. 자코메티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다음에도 같이 작업해 보자‘는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임스가 다시 파리를 찾기 전인 1966년 새해 벽두, 자코메티가 사망한 때문이다. 향년 6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