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험되는 순간, 소화되고 이해되고 느껴지는 영화를 하고 싶어요.” 김성환 감독은 <매트릭스>(1999)와 <트루먼 쇼>(1998)가 바꾼 영화 역사의 변곡점을 기억한다. 일리노이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던 그는 실험실에서 연구에 몰두할 시간에 대신 영화 찍기를 택했다. “캠퍼스에 있는 영화하고 싶은 좀비 같은 친구들 다 모아서 오늘은 30분, 내일은 1시간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 친구 중 ‘살아남아’ 영화 하는 좀비는 그가 유일하다. 취미로 시작한 영화는 동국대 영상대학원 진학으로 학문이 됐고, <야누스>(2014), <얼라이브>(2016) 등 단편 작업을 거쳐 마침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연구과정을 통해 첫 장편 <만분의 일초>라는 결실을 얻게 됐다.
<만분의 일초>는 검도 국가대표 최종 선발 라인업에 오른 재우(주종혁)가 선발전의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수련원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검도에서 이기기 위한 경쟁심, 스포츠 드라마의 ‘모든 것’을 갖춘 듯 보였던 영화는, 재우의 입소 후 감추어 두었던 본색을 드러낸다. 수련원에는 형의 죽음 후 가족을 저버리고 집을 나간 검도인 아버지의 교육을 받고 일인자가 된 제자 태수(문진수)가 있는, 즉 재우가 ‘빼앗긴’ 모든 것이 있는 문제의 공간이다.
마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를 보는 것처럼, 10년을 별러 온 재우의 복수심이 검도의 액션신과 합이 맞아 돌아가는 전개. 캐릭터의 구성, 검도 액션의 연출, 플롯의 전개까지 장르적 문법을 능숙하게 활용해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만분의 일초>는 감독의 바람처럼, 기존 독립영화의 틀을 깨는 도전으로 새로운 자극을 체험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코리안 판타스틱과 왓챠상 2개 부문 수상)을 시작으로, 올해 런던아시아영화제 최우수상 수상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런던 수상 후 개봉을 준비 중인 김성환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런던아시아영화제 최우수상 수상으로 개봉 전 힘을 받는데요. 인상적인 평이 있었다면요.
“정신없이 봤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흠뻑 젖어 들어서 보셨다는 말이라 기분이 좋더라고요.
<만분의 일초>는 검도의 정신과 아버지를 향한 재우의 원망의 마음을 접목했는데요. 출발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 한 1년 정도 검도를 했어요. 태권도 학원 다니다가 검도 도장으로 옮겼는데 검도는 뭔가 레벨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웃음) 태권도장은 또래들끼리 모여서 태권도도 하다가 피구도 하고 닭싸움도 하고 일종의 커뮤니티 장소구나 싶었는데, 검도는 약간 불교 법당 들어온 느낌이었어요. 특히 성인반, 학생반 구분 없이 같이 섞여서 하는데, 어른들이 동료처럼 알려주는 분위기가 신선했어요. 단순 호신을 넘어 어떤 예절을 지키는 정신, 무엇을 위해 예절을 지킬 것인지 그 생각을 배우는 것 같았어요. 물론 이 영화가 검도 홍보영화는 아니었고요, 오히려 검도를 소재로 삼아야겠다 하고 연락해서 단체에서도 협조를 해주신 형태였어요. 그래서 복잡한 검도 용어 같은 건 다 빼버리자는 게 기본 컨셉이었어요. 대신 우리가 많이 듣는 이야기인데, 힘을 풀어라, 힘을 빼야지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힘을 줄 수 있다. 그런 검도를 할 때 필요한 정신적인 부분을 최대한 잘 담아내려고 노력했어요.
초반부는 검도에서 일인자가 되기 위한 재우의 욕망, 라이벌 의식인 것처럼 일종의 관객을 ‘속이는’ 플롯으로 전개되는데요. 결국, 복수심에 자기와 싸우는 모습이 장르를 넘어서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구조예요.
세상은 ‘자기가 겪는 세상이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내 마음 하나 딱 고쳐먹으면 똑같은 문제를 훨씬 지혜롭게 얘기도 나눌 수 있고 소통도 할 수 있는 지점들이 발견할 수 있어요. 머물러 있었으면 고통만 받고 자학을 하게 되는 거죠. 생각도 습관이고 버릇일 수 있어요. 물론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벗어나고 싶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재우가 십 년 넘게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키워오다 보니, 그쯤 되면 이게 그의 정체성이 돼버린 거죠. 그게 자신을 정의하는 요소가 된 거예요. 그쯤 되면 이걸 버리면 난 뭐고 지금까지 살아온 건 뭔데라는 그런 것도 생기거든요. 재우가 자승자박하는 모습들은 그런 생각에서 파생된 것 같아요. 저는 이 영화를 재우의 ‘성장물’이 아니라, 그래서 ‘도약물’이라고 봐요.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수련원이 상징적 역할을 해주는데요.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자, 재우가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은 황태수가 있는 공간이기도 하죠.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해소할 수 있는 해결의 장으로도 활용되는데요. 이 공간을 어떻게 설계하셨나요.
그래서 초반에 중요한 씬 중 하나가 재우가 수련원에 들어가면서 소지품을 모두 반납하는 장면이었어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거라 생략할 수도 있는 장면인데, 저는 그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꼭 디테일하게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입소할 때 그런 소지품을 빼놓음으로써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려고 했어요. 장르물로써 선택과 집중을 하는 걸 장면 설계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어요.
형의 죽음 후 가족을 버리고 나간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키운 제자 황태수. 이 일련의 과정에서 아버지를 향한 재우의 그리움이 서서히 드러나는데요. 재우의 복수심리는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재우도 처음에는 아버지를 향해, 태수를 향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감정이 엉켜 있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면서부터는 자기도 도대체 이 마음의 정체가 뭔지 모르게 되죠. 이야기는 심플하게 가되, 겹쳐지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봤어요. 영화 초반부터 디졸브가 계속 나오는데. 결국 재우가 태수를 바라볼 때는 아버지도 보였다가 흰 도복을 입고 싶은 자기도 보였다가 하는 거죠. 애증의 관계에는 미워하는 마음도 있지만, 분명 사랑이 있죠. 재우는 태수를 멀리하고 싶은데, 태수는 한편으로는 내가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공백을 가지고 있는 존재니, 한편으로는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에 관해 물어보고도 싶기도 한 거죠. 이 영화가 정말 복수극이었다면, 재우는 그냥 태수 음식에다 독을 한번 타거나, 망신만 주면 끝나는 일이거든요. 이야기 전체가 한 번에 소화되거나 이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전개해 나갔어요.

재우는 수련원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자기방어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요. 이 소통의 차단에 있어서 관객에게도 일말의 동정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주인공에게 으레 줄 법한 연민의 틈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는데요. 캐릭터 묘사의 정도에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제 기준은 하나였어요. 재우가 어떤 순간에도 남 탓을 못 하게 만들겠다. 몇 가지 허물이 있어도 태수만 악마화 시키면, ‘다 쟤 때문이야’라고 하기 너무 좋거든요. 그래서 주변 인물들과 관계에서 할 법한 변명거리들을 제거해 줬어요. 영상기록자인 수아가 도와줄 때, 선배 준희가 조언을 해줄 때 재우는 번번이 그 애정이나 호의를 받지 않죠.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자기 자신밖에 남지 않는 거죠. 재우의 모든 여정은 결국 ‘넌 이제 탓할 사람이 없다. 이제 어떡할래?’ 했을 때 드디어 자신한테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지점에 다다라야 한다. 그래야 도약이 될 수 있다고 봤어요.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에서 인기를 모은 캐릭터 ‘권모술수’의 주종혁 배우가 재우 역을 연기하는데요. 강렬한 눈빛과 다크한 감정선으로 재우를 훌륭하게 표현하는데요. 캐스팅 과정이 궁금합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 과정 작품들은 취미가 아닌, 정말 산업으로 배출하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라, 배우들도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배우를 기존의 툴에서 찾게 돼요. 전문 캐스팅 디렉터도 있을 정도예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보다 저희가 먼저 찍었어요. 저희 영화 편집하는 동안 드라마가 터진 거라, 캐스팅 당시에는 단편 경력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저는 이 친구를 꼭 찍고 싶었어요. 연기 안 하고 있어도 된다. 그냥 스탠바이 하고 있어도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 정도로 배우가 가진 이미지가 강렬했어요. 예상대로, 주종혁 배우가 정말 잘해줬어요. 재우가 포커페이스를 하다가, 언제 급발진, 급제동할지 정말 내밀한 작은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표현해 줬어요.

복수의 대상이 된 태수의 설정도 흥미로워요. 재우의 어떤 공격에도 대응하지 않는 태수는 복수의 대상, 가해자로 일컬어지는 일반적인 안타고니스트와는 거리가 먼데요. 태수의 묘사는 이 영화가 일반적 복수극과 달라지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한데요.
태수는 재우에게 일종의 벽처럼 느껴지는 존재예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서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 봤어요. 영화의 전반이 재우가 복수의 대상인 태수를 계속 밀어붙이는 이야기인데, 태수는 그렇게 밀어도 안 밀려요. 그래서 재우가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태수를 향해, ‘내가 아버지 아들이다’ 같은 카드를 써서라도 밀어보려 했는데, 태수는 거기에서도 당당하게 대응하죠. 저는 결국은 재우가 거울을 마주하기까지의 과정으로 가려 했어요. 태수는 대사도 최대한 자제하고 갈고닦는, 절차탁마(切磋琢磨)형 인간으로 그리고자 했어요. 무술감독님과 둘의 검도 대결 장면에 대해 합을 짤 때도 이 상반된 캐릭터성을 최대한 잡으려고 했어요. 대치 상황에서 재우는 계속 칼끝을 움직여요. 위로 갈까, 아래로 갈까, 좌우로 갈까. 그런데 태수는 가만히 있습니다. 이 차이인 거죠. 그걸 기본으로 액션신을 짰습니다.
늦가을의 스산한 계절감, 검도 수련원 바닥의 냉기 같은 것들이 효과적 장치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요. 겨울 보다 오히려 더 싸늘한 ‘늦가을’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단 이 작품이 아카데미 장편연구과정 작품이라 제작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그때 찍어야 했어요. (웃음) 돌아보면 장편제작 과정 작품인 <파수꾼> <소셜포비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다 한겨울에 찍었어요. 주어진 환경, 예산, 일정에서 뭘 최대한 다 해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때 가을이 있다, 이 계절을 활용할 수 있는 게 맞겠다 해서 역으로 방법을 찾은 거예요. 마룻바닥은 처음엔 생각을 못 했는데 촬영장인 수련원에 가보니, 이곳 다른 검도장에 비교해 더 반들반들하고 창문 빛이 들어와서 반사 효과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우리 이거를 좀 더 적극적으로 찍어보자 한 거죠.


검도 액션이 인물의 심리 전개, 스토리텔링과도 긴밀하게 엮여 있는데요.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점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어요. 장면 구성과 실행에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일단 제가 영화 제작 방식에 있어서 뻥! 하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그 지점이 한 번 있었거든요. 단편 <야누스>(2014)가 초청되어 칸 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를 봤어요. 그때 나온 질문 중 하나가, “감독님은 어떻게 늘 적은 예산으로 그렇게 정교한 영화를 찍으십니까?”였는데 감독님 답변이 굉장히 명쾌했어요. “캠코더를 들고 미리 다 찍어봅니다.” 너무나도 심플한 솔루션이었어요. 저도 그 방법을 철저하게 따랐어요. 촬영감독 섭외할 때부터, 난 이거 영상 콘티 할 거다, 그러려면 이 작품은 사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걸 할 수 있으면 같이 가자 하는 전제조건을 달았어요. 20회 차를 한 달 안에, 예산에 맞춰, 많은 액션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현장에서 연구할 수는 없어요. 그걸 앞서 영상 콘티로 하자는 거였죠. 저, 촬영감독님, PD님, 제작부장님, 스크립터 이렇게 정예부대로 그 작업을 먼저 시작했어요. 대사, 블로킹 다 해보고 안 좋은 건 다시 방법을 만들어 나갔어요.
장르적인 재미를 가지고 가는 가운데,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독립영화의 인장도 확실한데요. 그런 점에서 감독님 작품의 방향성, 포부를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단 영화가 재밌어야 자기가 할 얘기를 전달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나, 그래서 일단은 엔터테이닝은 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요소예요. 즐겁게 영화를 봤는데, 그 아래 어떤 의미도 있다면 너무 좋은 거죠. 사실 영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게 됐는데 저는 거기서 조금 벗어난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저는 상상력과 즐거움이 그만큼 중요하고, 거기 맞춰 가고 싶어요. 미국 인디씬에서 그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위플래쉬>(2014) 같은 작품도 있었고 최근 <톡 투 미>(2023)도 있었고요. 일본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7)도 워크숍 하다가 나온 작품으로 모두 장르적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들이에요. 그런 작품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이거 찍을 때 진짜 신나게 찍었겠구나 싶어요. 이런 방향성이 한 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제 영화도 그런 방향성으로 나가고 싶어요.

이화정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