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도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모인 선수들을 카메라로 꼼꼼히 분석하고 개선점을 연구하는 영상분석관 '수아'(이주연)는 죽도를 잡은 '재우'(주종혁)의 오른팔 근육에 솟구친 긴장을 감지한다. 검도에서 죽도에 체중을 싣고 힘을 주는 역할은 주로 왼손이 한다. 방향타 역할만 해야 하는 오른손에 들러붙은 힘은, 버려야 할 것에 감긴 집착에 다름없다. 수아는 재우에게 들어가지 않아야 할 곳에 힘이 들어갔다고, 묵상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한다.
대표팀 감독도 차라리 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새파랗게 날 선 죽도를 물집이 잡히도록 움켜진 재우를 멈춰 세운다. 하지만 '비워지지 않으면 질 것'이라는 감독의 선문답은 격앙된 재우에게 미처 닿지 못한다. 남의 검도가 신경 쓰인다는 것은 밖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니 진짜 상대인 '나'를 마주하라는 검도 선배 준희(장준휘)의 따뜻한 한 마디는 잠깐의 위로로 스칠 뿐이다.

영화 <만분의 일초>에서 주인공 재우를 둘러싼 호의적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힘을 빼라' 말한다. 하지만 유독 힘이 들어간 그의 오른손은 쉽게 말랑해지지 않는다. 칼을 겨누고 여차하면 나의 목을 치고 나가려는 상대가 앞에서 시퍼렇게 눈에 빛을 내고 있는데, 어떻게 평점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눈앞의 선수는 재우가 생을 걸고 대면하길 기다렸던, 그의 원수다. 트라우마에서 탈출하려면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재우는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버둥거리다 숨이 끊겨도 끝장을 보리라 결심한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죽도를 움켜쥔 오른손의 떨림은 더욱 심해진다.

<만분의 일초>는 검도 국가대표 선발 3주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3년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최종 5인이 이곳 검도중앙연수원에서 결정된다. 매주 하위권에 놓인 다섯 명은 합숙소를 떠나야 한다. 저마다의 간절함을 품은 선수들은 날이 잔뜩 선 채 훈련을 거듭한다. 재우도 막바지로 국가대표 상비군에 합류해 합숙에 돌입한다. 하지만 합숙소에서 태수(문진승)의 이름을 발견한 후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공적 목표보다 복수를 하겠다는 사적 감정이 그의 내면에 휘몰아친다.

재우가 오른팔에 힘을 줄 수밖에 없던데는 특별한 사연이 자리한다. 태수는 재우의 형을 사고로 죽게 한 당사자이며 그럼에도 아버지의 애제자였다. 재우에게 가장 소중한 둘을 차례로 앗아간 사람. 재우는 남몰래 태수를 경계하며 그를 꺾기 위해 절치부심하지만, 독보적인 실력으로 모든 이에게 경외감을 자아내는 태수를 상대로 1승은 요원해 보인다. 태수에게 질 때마다 오른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가고, 첫 시합에서 2등이었던 재우는 시간이 지나며 탈락 직전에 놓이게 된다.

좌절과 분노, 복수가 뒤얽힌 호면 뒤 재우를 카메라는 집요하게 쫓는다. 특히 한정된 공간과 움직임이 많지 않은 검도라는 소재의 약점을 김성환 감독은 역이용했다. 선수들이 자조적으로 '감옥'이라 말했던 합숙소의 대련 공간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된 호면의 철망으로 다시 축소되자, 어린 시절부터 재우가 자신을 가두었던 감옥 같은 현실과 자기학대가 연상되며 관객의 가슴을 옥죈다. 대련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를 전달해야 하는 영화는 호면 속 눈빛, 표정, 땀방울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죽도가 부딪히는 소리, 잡아먹을 듯한 포효, 마룻바닥을 내딛는 삐걱거림은, 대사 없이 여러 감정을 유추하게 한다. 격렬한 대련 장면과 대조되는 건 절제미 넘치는 화면이다. 적막한 공간 속 묵묵히 검을 내리치는 장면,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두건을 팽팽히 잡아맨 뒤 호면을 쓰는 준비 의식, 경기가 끝나고 정좌한 채 호흡을 고르는 묵상 같은 의례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재우의 복잡한 내면과 충돌하며 기묘한 잔상을 남긴다. 군청색과 흰색의 도복, 붉은 두건은 흩날리는 흰 눈에 스며들어 한 폭의 동양화를 완성시킨다.

김성환 감독은 ‘재우’를 연기한 배우 주종혁을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 권민우 변호사로 인기를 얻기 전 캐스팅했다. 오랫동안 단편, 독립영화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그의 내공을 알아본 감독의 선택은 옳았다. 흔들리는 재우의 내면을 호면의 철망에 언뜻언뜻 비치는 눈빛, 오른손에 들어가는 긴장, 턱 근육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배우 주종혁은 전형적인 성장영화쯤으로 남았을 <만분의 일초>를 구도적 영화로 격상시킨다. 영화를 찍기 전, 두 달간 검도 체육관에서 훈련을 받고 용인대 검도부 학생들과 합숙한 그의 노력은 그가 묵상하는 모습이나 호면을 쓰기 전 두건을 감는 자연스러운 손놀림에서 드러난다. 신예 문진승도 눈에 띈다. 차분한 카리스마로 시종일관 자신에게 돌진하는 태수의 맹공을 가볍게 튕겨내며 단 한 번의 치명타로 압살하는 검도 일인자의 풍모를 잘 표현했다.

영화의 제목인 '만분의 일초' 속 '만분'은 '만분'(萬分, 만으로 나눔)의 일초만큼 짧은 순간이자, '만분'(滿分, 보살의 수행이 원만하여 부처의 지위에 이르는 일)에 도달해 모든 것을 초월하고 도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검체일치'(氣劍體一致, 검도에서 기와 검과 신체가 조화를 이룰 때 상대방에게 유효한 공격을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의 무예인 검도는 '만분'으로 가는 길을 닦아준다. 훈련 대련은 물론 정신력까지 평가에 반영되는 독특한 운동인 검도가 묵상으로 시작해 묵상으로 끝나는 이유다.
10대 시절의 '그날'에 머물러 있는 재우의 목적 잃은 검은 닿아야 할 상대에 닿지 않고, 시종일관 자기 목을 겨눈다. 하지만 실종됐던 아버지가 주검으로 발견된 날, 재우는 비로소 아버지를 움켜쥐던 오른손에 힘을 빼 그를 묻어줄 용기를 낸다.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꽃봉오리가 오랫동안 계절을 버티다가 개화하듯, 그의 손은 거짓말처럼 꽃 핀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낸 후, 재우는 다시 한번 대결의 장에 오른다. 상대는 물론 태수다. 손의 떨림은 이제 잦아들었다. 길고 어두운 내면의 터널을 지나 오롯이 '자신'을 마주할, 깨치고 나아갈 '만분(滿分)의 일초'에 그는 도달할 수 있을까.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자.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