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물며 초능력을 자유자재로 쓰는 히어로가 나오는 드라마에서도 조금이나마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캐릭터를 찾기 마련이기에, 남자 셋 여자 셋이 시시콜콜한 일상을 살아가는 <프렌즈>에서 조금이라도 나와 가까워 보이는 캐릭터에게 이입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프렌즈>의 ‘챈들러’(매튜 페리)는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의 ‘최애 캐릭터’로 꼽혔다. <프렌즈> 속 챈들러는 ‘조이’(맷 르블랑)처럼 이성에게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피비’(리사 쿠드로)처럼 히피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며, ‘로스’(데이빗 쉼머)처럼 박사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레이첼’(제니퍼 애니스톤)이나 ‘모니카’(커트니 콕스)처럼 정말 자신이 원했던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챈들러는 <프렌즈>에서 보통의 우리를 가장 잘 대변하는 캐릭터였다. 비좁은 사무실에서(물론 후에 승진하며 그만의 사무실을 갖긴 했지만) 어떤 직업인지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트랜스폰스터’(레이첼이 챈들러의 직업을 정확히 몰라 지어낸 ‘아무말’)라는 일을 하며, 낯선 사람과의 어색한 분위기는 자조적인 농담으로 풀고, 주말 아침에는 운동하는 등 ‘갓생’을 살기보다는 그저 더 자고 싶은 피곤한 직장인이다.

<프렌즈>를 DVD로 빌려 보건, 넷플릭스로 스트리밍 해서 본 세대건 간에, 챈들러는 어딘가 시청자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었기에 모두의 '최애'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프렌즈> 속에서 챈들러는 그저 평범한 인간의 전형으로 설정되었는데, 완벽하지 않은, 특출나게 뛰어난 부분이 없는, 그렇다고 성격도 능력도 그렇게 모나지는 않은 캐릭터였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에 능하지 않아 실수를 하기도 하고, 매번 작동하는 방어기제 탓에 상황을 망치기도 하고.

챈들러는 자신의 미숙함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지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 속에서도 10개의 시즌을 책임질 에피소드가 있고, 사소한 계기들로 인해 그가 조금씩 행복을 찾는 방향으로 성장해간다는 사실은 평범한 우리에게 묘한 위안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평범한 내 삶도 매튜 페리와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면 시대에 남을 시트콤이 되지 않을까, 한 번쯤은 살아봄직한 삶이 되지 않을까 하고.

<프렌즈>의 시즌 2 3화, ‘헤클스 씨의 유품(The One Where Mr. Heckles Dies)’은 챈들러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에서 친구들은 아랫집 아저씨 ‘헤클스’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가 살았던 집으로 향한다. 챈들러는 헤클스가 생전 살았던 집에서 그의 졸업앨범을 보게 되고, 자신과 그의 유사성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그처럼 외롭게 괴짜로 늙어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챈들러는 헤클스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며 사소한 시도들을 한다. 그러고는 “굿바이, 미스터 헤클스”라며 그에게 작은 추모를 건넨다.

평범한 사람의 삶엔 대단한 이벤트도, 놀랄 만한 터닝포인트도 존재하지 않지만, 하루를 조금씩 다른 노선으로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헤클스 씨의 죽음’과 같은 엉뚱한 사건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에서 쳇바퀴를 멈추는 건 거대한 쐐기가 아니다. 나와는 관련 없는 사건과 스스로를 연결 짓는 작은 상상력이 나의 하루를 바꾸는 동기가 되듯이, ‘챈들러다운’ 사소한 성장이 담긴 이 에피소드는 그래서 더 큰 울림을 준다.
사실, 매튜 페리가 <프렌즈>의 챈들러 역할을 그토록 잘 수행했던 이유는 실제의 매튜 페리와 챈들러가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2022년, 그는 「Friends, Lovers, and the Big Terrible Thing」이라는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여기서 그는 처음 <프렌즈>의 대본을 본 순간, “난 챈들러를 연기해야 해”가 아니라 “나는 챈들러야”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전했다. 매튜 페리는 ‘챈들러’ 캐릭터를 보고 “누군가가 나를 1년 동안 따라다니며 내가 하는 농담과 매너리즘을 본 듯한 느낌이다”라며, “세상에 지쳤지만 위트를 잃지 않는 내 인생관이 담긴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프렌즈>로 챈들러 역할로 데뷔한 이후, 실제 매튜 페리의 삶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사고로 인해 복용한 진통제에 중독되기도 하고, 기타 약물 중독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재활 치료를 반복했다. 그의 삶은 줄곧 내면의 불안과의 투쟁으로 점철된 날들이었다.
한편, 매튜 페리는 다른 중독자들을 돕기 위해 자신 소유의 부동산을 재활 시설로 개조하기도 하는 등 중독 치료에 힘쓰기도 했다. 그는 사망 1년 전의 인터뷰에서 “(내가 죽으면)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자를 기꺼이 도와주려 했다는 것이 가장 먼저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전했을 만큼,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사회에 족적을 남기려 한 인물이기도 하다.

늘 타협의 연속이야. 항상 마음에 들진 않지. 하지만 해야 할 때가 있지.
늘 웃음과 행복, 달콤한 사탕, 센트럴 퍼크에서 마시는 커피만 있는 게 아니야.
실제 생활이라고, 알아? 성인이라면 그래야 된다고.
<프렌즈> 시즌 5 6화, 로스의 말 중에서
<프렌즈>가 선사하는 웃음은 사회적 가면도, 내면의 불안감도 모두 내려놓고 그것들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양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는 친구들에게서 비롯된다. <프렌즈>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는 드라마라고는 했지만, 사실 절대 현실이 될 수 없기에 재밌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한 에피소드에서 로스가 말했듯, 다 큰 어른들이 센트럴 퍼크라는 커피숍에 모여 매일 커피나 마시며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설령 지루하고 재미없는 하루를 살아갈지언정, 혹은 매튜 페리처럼 끝없는 내면의 불안감과 싸우며 살아갈지언정, <프렌즈>를 볼 때만큼은 그들과 함께 센트럴 퍼크에서 커피 한 잔을 하는 듯 실없이 웃을 수 있었다.

<프렌즈>의 시즌이 진행되고 주인공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변해가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친구 관계에서만큼은 예전과 변함없는 본인 그대로의 캐릭터를 발현하고, 철들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노출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생산적인 관계만이 유의미해지는 어른의 삶에서, 만남 자체가 목적이 되는 관계는 귀해지기에, 현실의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이 6명의 친구들이었던 셈이다.

약물과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해 돕기 위해 힘쓴 동시에, <프렌즈> <17 어게인> <고온> 등으로 웃음과 위로, 울림을 선사하고 간 매튜 페리. 이제 그곳에서의 삶은 센트럴 퍼크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처럼 시시하고 밍밍했으면 좋겠다. 굿바이, 미스터 페리.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