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스러질 듯한 푸석한 머리, 퀭한 눈과 거친 얼굴. 레슬리(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얼굴과 몸에는 가난과 곤란의 인장이 여기저기 찍혀있다. 레슬리는 방금 숙박료를 내지 못해 살던 모텔에서 쫓겨난 참이다. 그녀의 삶에 남은 건 이제 핑크색 슈트케이스 하나. 거리로 내몰리고도 남은 돈을 털어 기어이 술을 쥐고 마는 그녀의 오른손을, 관객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퍼붓는 빗속에서 노숙을 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 레슬리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분노와 체념, 황폐함의 감정의 격동을 겪으며 레슬리는 생각했을 것이다. 행운을 거머쥐었다 믿었던 7년 전 그 날로 돌아가, 차라리 그 행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다면.

7년 전, 아들 제임스(오웬 티그)와 함께 살고 있던 레슬리는 19만 달러 로또 당첨이라는 행운을 거머쥔다. 아들의 생일을 복권 번호로 적어낼 만큼 가족과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싱글맘 레슬리. 과거 뉴스 화면 속 들뜬 목소리로 돈으로 이뤄낼 소원을 힘껏 외치는 그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단 몇 달이면 충분했다. 갑작스러운 행운 앞에 절제를 잃은 레슬리는 술과 마약으로 당첨금을 탕진해 버리고 급기야 이제 막 10대가 된 아들 제임스를 두고 쫓기듯 고향을 떠났다.

핑크 슈트케이스가 가진 것의 전부인, 인생 막장에 다다른 후에야 레슬리는 6년 만에 아들 제임스를 찾는다. 자신을 떠난 어머니를 원망하는 대신 제임스는 미래를 계획하는 동안 얼마든지 이곳에 머물러도 된다고 의젓하게 레슬리를 맞는다. 단 한 가지 조건은 금주. 하지만 과거의 생활을 떨치지 못한 레슬리는 이를 결국 어기고 만다. 고작 하루도 금주하지 못한 레슬리에 크게 실망한 제임스는 결국 엄마를 내쫓는다. 고향에 사는 레슬리의 옛 친구인 낸시(앨리슨 제니)는 엄마의 거처를 부탁하는 제임스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레슬리는 그렇게 몇 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텍사스로 돌아온 레슬리는 자신이 남기고 간 삶과 마주한다. 아들과의 짧은 재회의 순간, 동물원에 가자는 레슬리의 제안에 제임스는 "사람들이 주위에 서서 당신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면 어떨 것 같냐"라는 말로 거절한다. 레슬리에게 고향은 바로 그런 동물원 같은 곳이다. 갇혀 있는 것은 레슬리고, 창살 밖에서 인생의 커다란 행운을 거머쥐고도 밑바닥으로 몰락한 그녀의 불행을 조롱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다. 영화는 과거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지 않지만 복귀 후 레슬리의 행적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장면, 종교적 배타성을 암시하는 대사 등을 통해 폐쇄적 미국 서남부 시골마을의 전형을, 레슬리가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던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제임스의 간청에 레슬리에게 방 하나를 내주었지만, 낸시와 더치 부부 또한 오랜 친구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다. 결국 다시 술에 손을 댄 레슬리를 견딜 수 없었던 두 친구는 그를 쫓아내고, 거리를 방황하던 레슬리는 어느 한 작은 모텔 담벼락에서 잠을 청한다.


우연히 레슬리를 보게 된 모텔 관리인 스위니(마크 마론)는 모텔 주인이자 자신의 친구인 로열(앤드레 로요)에게 그녀의 사연을 듣게 된다. 아마 사연을 알기 전부터 스위니는 그녀의 사정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비슷한 고통을 겪어 봤기에. 모텔 부지를 도망치듯 빠져나가느라 놓고 간 짐을 찾으러 다시 나타난 레슬리에게 스위니는 혹시 며칠 전 일자리를 찾는다고 전화한 사람 아니냐는 엉뚱한 말을 해댄다. 딱히 사람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 시골 모텔 살림에 숙식제공 일자리를 제안하며 존엄성이라는 작은 선물까지 안긴 것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튀어나온 본능적 선의에 스위니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레슬리는 수락한 후다. 선금까지 받은 이상 무를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으로 통제력을 잃은 예측 불가능한 레슬리의 삶이 한 사람의 선의로 금세 제자리를 찾을 리는 만무하다. 청소를 해 번 돈으로 밤마다 술을 마치고, 술에 취해 늦게 일어나 제때 일을 끝마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당신한테 문제가 있다고 당신을 나쁘게 본 적 없어요"라고 선의를 베풀며 그녀를 믿어줬던 스위니도 인사불성의 밤이 길어지자 지치고 만다. 레슬리는 진정 복권 당첨 이후 처음 찾아온 행운을 또다시 행복으로 치환하지 못하고 이대로 흘려보내버리려는 것일까. 이때 카메라는 폐점 시간을 앞둔 바에서 텅 빈 맥주잔을 마주 보는 레슬리의 얼굴을 먼 곳에서 잡으며 반전을 꾀한다.

무조건적인 호의를 자기 파괴적인 무절제로 갚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후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란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 위로 시들어가는 그녀의 삶을 노래하는 듯한 윌리 넬슨의 곡 'Are you sure'가 흐른다. 기타 연주 하나에 목소리만 얹은 소박한 컨트리 송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위를 봐요, 바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봐요, 그 얼굴들에서 뭐가 보이나요, 당신은 정말 여기 있고 싶은가요". 한 곡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긴 카메라 샷은 점점 레슬리를 클로즈업하며 그녀의 깊은 주름, 헝클어진 머리카락, 수년간의 음주로 인해 나이보다 늙어버린 얼굴을 비춘다. 조용한 결단의 순간이다. 자존심을 세우고 세상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고통과 절망의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구원도 가능함을 대사 없이 윌리 넬슨의 노래와 레슬리의 표정만으로 연출한 이 장면은 영화를 대표하는 명장면이 된다.

이 장면 후, 영화는 어지러울 정도로 급하게 절주의 여정을 쫓는다. 금주를 선량한 개인의 선의로, 일개인의 의지로 극복 할 수 있다 말하는 영화적 설정과 스위니와 레슬리의 관계를 기어코 로맨스로 풀어낸 장면들이 아쉽지만, 화면에 부상한 '10개월 뒤'라는 글자 뒷편에 많은 이야기가 생략됐을 거라 믿는다.
진짜 기적은 일확천금의 행운이 아니라, 남을 향한 사소한 호의일지 모른다는 클리셰 가득한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데에는 레슬리를 연기한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공이 크다. 양자경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올해 열린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라이즈보로도 <레슬리에게>로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