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형 서점의 스테디셀러들이 나열된 칸을 보면 출판 시장에서 대중들이 선망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넷플릭스 주가가 뜨니 주식 관련 서적과 드라마 작법 같은 실용서, 넷플릭스처럼 스토리텔링하라는 식의 경영 부문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떤 트렌드를 맞이해도 불황을 모르는 코너가 있다. 자기 계발 분야다.

이 마켓에서 범주는 무의미하다. 종류도 다양하여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에서 시작하여 상위 1%의 부를 거머쥐는 법, 어지러운 집안을 정리하는 노하우, 직장에서 인정받는 방법,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더 쪼개 쓰는 법 등등 끝이 없다. 자기 계발 설파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고대 철학까지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 부처, 예수, 노자, 공자 등등의 가르침은 전부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삶을 부르짖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프로이트와 아들러를 거쳐 오늘날의 혈액형과 MBTI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인, 자본주의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명예를 위해 철학을 전한 것과는 달리 오늘날의 자기 계발은 철저히 자본과 결탁되어 현대인의 생활 태도를 만든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신작 <더 킬러>(2023)에 등장하는 킬러(마이클 패스벤더) 또한 그와 비슷한 가치를 부르짖으며 업무에 임한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킬러로서, 생활상 뿐만 아니라 일을 함에 있어서도 무결함을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병적인 강박을 불어 넣는다.
"예측하되 임기응변하지 마라, 계획대로 하라, 아무도 믿지 마라, 장점을 포기하지 마라, 보수가 있는 싸움만 해라, 공감 금지, 공감은 나약함이다, 나약함은 곧 약점이다. 단계마다 물어라, 이것이 득이 되는가?"
자기 계발 서적에서도 이제는 낡은 표현이라 쓰지 않을 것 같은 저 문구들은 마이클 패스벤더의 섹시한 보이스 컬러로 인해 거부감 없이 캐릭터로 안착된다. 완전함을 지니려 애쓰는 킬러는 파리에서 저격으로 타겟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자 킬러의 아내가 폭행당하는 보복 인사가 발생하고, 이에 킬러는 복수에 나선다. 그리고 그 복수를 행하는 과정에서도 킬러는 계속해서 저 가치들을 되뇐다. 그리하여 그가 도착하고자 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다수가 아닌 소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히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기 위해 완전무결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사는 현대인에 대한 비유가 된다. 킬러라는 직업이 흔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비유가 성립될까? 극도의 효율을 위해 획일화된 자본주의가 대세가 된 이후 사람들은 자주성과 독창성을 거세한 채로 살아간다. 그런 면에서 일정한 시간이 되면 일어나고 스스로 세운 계획을 빈틈없이 실행하고 탄수화물은 빼고 먹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킬러와 현대인을 분별하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감독의 역설
연출자인 데이빗 핀처는 <세븐>(1995)으로 유명세를 타고 <조디악>(2007), <나를 찾아줘>(2014)로 스릴러 깎는 장인을 거쳐, 넷플릭스의 <하우스 오브 카드> 및 <마인드 헌터>를 제작한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1980년대에 이미 영상계의 탕아였다. 광고제작사를 설립하여 나이키, 코카콜라 같은 초대형 광고를 시작으로 버드와이저, 리바이스, 샤넬 등의 브랜드에서 엄청난 퀄리티의 결과물을 냈다. 85년의 암협회 공익광고에서 손가락을 빨던 뱃속의 태아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으로 수많은 끽연가들을 등 돌리게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자본주의의 첨병이라 불리는 광고 시장의 선두에 우뚝 섰던 그가 영화계로 넘어와 만들었던 역설적인 영화는 <파이트 클럽>(1999) 이었다.

극중 나레이터(에드워드 노튼)의 나레이션처럼,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비를 종용한다. 타일러(브래드 피트)와 나레이터가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소비자”라고 현답한다. 나레이터에게 극도의 무상감을 안겨준 시스템은 광고였다. 그 무대의 최첨단을 달리던 사람이 이 영화의 연출이라는 사실 또한 이 작품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24년만의 역설
<더 킬러>에서 킬러는 복수라고 하는 인간적 감정을 우선한다. 그는 최고의 킬러답게 촥촥 죽여나간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 과정은 보수가 있는 싸움만 하라 그리고 이것이 득이 되는지 늘 물어야 하는 자기 계발 철학자 킬러께서 부르짖었던 그 가치와 대립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아내가 폭행당했다는데 감정이 우선이지… 하면서 영화를 따라가 보자. 영화 내부의 사운드적 요소도 그의 가치에서 조금씩 변하는 양태를 보인다. 파리의 저격에서 음악은 타인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완벽해지기 위해) 듣는 소리였다. 그러나 도미니카의 킬러의 집에서 나오는 음악은 보다 공격적이고, 관객과 킬러의 신경을 긁게 된다. 그렇게 음악이 사그라지고 나면 나머지 타겟들을 제거해 나가면서 비로소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급기야 전문가(틸다 스윈튼)를 죽일 때는 그녀의 마음'소리'에 감읍하여 업무 중에 위스키를 마시는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며 심증의 변화를 증명하기도 한다. 킬러는 자신의 세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회피한다. 무결점을 향한 자신의 노력이 과연 그럴만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 의문은 마지막 타겟을 향해 간다. 펜트하우스 잠입에 성공하여 타켓(정확하게는 실패한 의뢰의 클라이언트)을 만났지만, 그를 죽이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킬러는 자신이 다수임을 인정한다. 비로소 편안해진 정서로 말이다.
이렇게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은 그 스스로 완벽할 수 없음을 역설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카피가 전부다
<파이트 클럽>에서 타일러에게 자기 계발이라는 해로운 동화는 자위행위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궤변일지언정 실천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핀처가 보기에도 물론) 완벽에 대한 이론만 챙기고 실천하지 않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하찮게 보일까. 우리는 삶을 제어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럴수록 세계라는 그림에 존재하는 점이 될 뿐이다. 칼 세이건의 표현을 빌리자면 태양계 밖에서 우리를 봤더니 정말로 창백한 푸른 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킬러>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보자,
"유일한 인생길은 지나온 길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나처럼 다수에 속할지도 모르지."
지나온 길이란 오직 내가 실천한 것뿐이다. 메인 포스터의 카피처럼 말이다. "실행이 전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