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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근심의 겉보기

김지연기자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긴 이미지. 구겨진 흔적까지 완벽하다.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담긴 이미지. 구겨진 흔적까지 완벽하다.

 

어떤 이야기는 행여나 관객이 알아듣지 못할까봐 하나하나 밥상을 차려준다. 그것이 모자랐는지 관객의 입에 떠 넣어 주기도 한다. 이야기의 시작과 가장 깊은 부분 및 끝을 맺는 지점이 확실해야 하고, 주인공과 악역은 확연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영화에 투자하는 입장에서 그런 형태가 인풋 대비 아웃풋이 가장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어떤 작품의 맛의 가이드라인은 획일화되지 않고 식재료도 낯설다. 때로는 생식을 먹는 것처럼 날 것을 씹어 먹고 자의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전자는 결론이 (비교적) 명확한데 비해, 후자는 과정조차 잘 모르게 되는 경우가 잦다. 굳이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를 구별하자는 것이 아니라 큰 범주에서 감상하는 태도를 구분 지을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상업 영화의 제1 덕목은 아무래도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획일화의 운명은 피해가기 쉽지 않지만, 예술 (혹은 작가) 영화에서 그런 측면은 일종의 저주가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개인적으론 후자의 그런 불친절로 인해 관객이 외면하는 것에 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빗 린치 선생님.. 이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ㅜㅠ
하지만 데이빗 린치 선생님.. 이건 너무 어려웠습니다.. ㅜㅠ

그렇게 영화를 단지 보는 것이 아닌 읽는 연습을 하고 관람하게 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요즘 세태에 트렌디한 태도가 아닌 것은 맞다. 현실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엔터테인먼트라 여겨지는 영화(혹은 극장)에서까지 생각을 요하는 행위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제시되는 언어를 읽어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곧 자신의 세상 확장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진한 위로를 건넸는데 그것이 낯선 언어로 되어있다는 이유로 도외시한다면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영화 <애프터 썬>(2022)의 경우는 영화 그 자체와 파동이 만들어내는 해빙의 효과가 꽤 웅장하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너무 간단한 이야기

이 영화의 서사는 아주 단순하다. 전체를 놓고 봐도 단편에나 어울리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11살인 소피(프랭키 코리오)는 이혼한 아빠인 캘럼(폴 매스칼)과 터키로 여행을 간다. 그들은 호텔 내부에서 놀다가 머드 마사지를 받는 곳으로 이동하고, 딸은 엄마가 있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아빠는 배웅을 한다. 이게 다다.

 

소피의 어린 시절은 macarena 등의 곡으로 90년대임이 묘사된다. 그래서 튀르키예가 아니라 당시 국가명이었던 터키로 표기한다.
소피의 어린 시절은 macarena 등의 곡으로 90년대임이 묘사된다. 그래서 튀르키예가 아니라 당시 국가명이었던 터키로 표기한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날 정도라는 터키의 하늘은 그 명성에 걸맞게 푸르르다. 부녀는 하늘 아래에서 물놀이를 하고 크루즈를 타고 물을 건넌다. 그런데 맑고 희망찬 블루의 하늘은 양면성을 가진 듯 우울한 측면을 비춘다. 생일을 맞이한 아빠는 딸의 깜짝 이벤트로 맑은 하늘 아래에서 관광객들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듣지만 어딘지 모르게 암울하다.

딸은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캠코더로 아빠를 찍는다. 그리고 렌즈 앞의 아빠는 딸이 부끄러울만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동시에 춤은 다른 이미지로도 제시된다. 갑자기 검은 배경에 점멸되는 조명이 나오며 춤을 추는 아빠의 모습이다. 여기서 춤을 추는 아빠는 비디오카메라 앞에서의 태도와는 다르게, 일종의 절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한 여인이 포착된다. 우리는 그녀가 31살의 소피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31살의 딸이 31살 시절의 아빠를 정의되지 않은 어떤 공간에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컨트라스트가 강하고 워낙에 짧은 프레임으로 지나가기에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컨트라스트가 강하고 워낙에 짧은 프레임으로 지나가기에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중간 과정과 엔딩

​그리고 갑작스레 삽입되는 두 요소가 있다. 31살이 된 소피 또한 아이를 기르고 있다고 암시하는 장면과 갑자기 서럽게 우는 뒷모습의 아빠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피는 아빠가 (울면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보낸 엽서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적힌 문구는 평범한 사랑의 메시지지만, 실은 이것은 아빠의 죽음을 암시함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아빠가 캠코더에 담은 자신의 모습을 20년이 지나서야 보는 소피가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20년 전으로 돌아가 딸을 배웅한 직후, '춤추던 정의되지 않은 공간'으로 다시 들어가는 아빠를 보여주며 완전히 끝나게 된다. 그간 보여주고 있는 아빠의 우울한 태도와 마지막 컷에서의 향방을 보면, 아빠는 아마도 터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 타이밍은 딸이 떠난 직후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아빠가 보낸 엽서는 곧 유서였던 것이다.

 


아비의 마음

​아빠는 딸에게 호신술을 알려주며, 흡연의 위험함을 강조한다. 살다 보면 마약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땐 자신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이 세상에서 곧 사라질 것을 알고 있지만, 혹여나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도 아주 약간은 남겨놓은 상태인 것이다.

혹은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이미 확정했을지 모르지만 딸에겐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마음이었다면 아주 진한 감정이 나올 수 있는 장면이 될 수 있지만, 감독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가 간접적이기에 더 강력하다.
혹은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이미 확정했을지 모르지만 딸에겐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마음이었다면 아주 진한 감정이 나올 수 있는 장면이 될 수 있지만, 감독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가 간접적이기에 더 강력하다.

아빠는 혼자 담배를 피우며 테라스에서 떨어질세라 묘한 긴장감도 주지만, 실은 그는 죽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다. 고향에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부모와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지만,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기에 죽지 않으려 분투한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태극권을 배우고 명상을 익히며 시를 쓴다. 딸과 가볍게 다투는 일이 생겨 하마터면 충동에 의해 큰일을 벌일 수도 있었으나 칠흑 같은 밤에 수영을 해버림으로써 자신을 다스린다. 그러나 우울증은 스스로 평온을 유지하기엔 힘겨운 질병이다. 아마 엔딩에서 아빠가 들어간 공간(죽음)은 혼란스러웠던 그의 내면이 되려 평안으로 향하는 선택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랑하는 딸을 남겨두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남은 사람과 영화들

​소피는 문득 31살의 아빠를 생각한다. 여행 직후에 아빠는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렇게 열어본 비디오카메라엔 11살의 자신이 담겨있다. 당시엔 너무 어려서 아빠의 상황을 읽을 수 없었다. 이윽고 영국에 도착해 아빠의 부고를 듣게 된 딸은 어땠을까? 어린 나이에 아빠의 죽음이 자기 탓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때 노래자랑에 나가자고 하지 말걸, 사랑한다고 더 말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와 견디기 힘든 죄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딸은 세월을 머금고 자신도 아이를 가지고 나서야 자신과 동갑내기였던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31살의 소피가 격렬하게 춤추던 31살의 아빠를 안으며 봉합됨을 보여준다.

​수많은 영화에서 자살과 유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제각의 방식으로 '이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애프터썬>은 겉으로 보기엔 예쁜 이미지지만, 고단한 이면으로 빚어진 속내를 통해 독보적인 심상을 제시한다. 감상과 동시에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 쉬운 영화는 아니지만, 되뇌어 보면 아픔과 힘겨움의 가면을 쓴 위로가 저며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어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진짜로 시작한다.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영화들의 가치는 거기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