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얘기한다는 것, 혹은 대부분 신자들이 믿고 따르며, 신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는 건 늘 논란의 소지가 많다. 예수가 신의 아들인지 사람의 아들인지, 또는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인지 정체를 밝히려 드는 의도 또한 그러하다. 예수는 ‘말씀’을 통해 2천년 동안 전 세계가 추앙하는 메시아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어쩌면 2천 년 동안 오해받았거나, 지나치게 찬미만 받아온 존재인지도 모른다.
예수, 인류의 선험적 자의식
이런 말은 사실 위험하다. 신자들의 돌팔매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근본적 속성과 특징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자칫 자신의 허물부터 까발리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 덕성과 윤리의식을 건드리는 존재다. 사후 2천 년이 넘었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인류의 선험적이고 원형적인 자의식을 자극한다고도 할 수 있다.
신이라면 신인 만큼, 그리고 사람이라면 사람인 만큼 예수는 다층적인 믿음과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한 인물이다. 그런 존재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는 건, 모든 비판과 질타에도 불구하고, 필연일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필연’을 수행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고난이 닥친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은 그 고난을 대표하는 문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1953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성경을 바탕으로 했으나, 소설적 상상이 많이 가미된 대작이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애욕과 분노, 슬픔 등에 사로잡힌 인물로 표현한 탓에 발표 당시에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동방정교회 측으로부터 작가가 사망할 때까지 호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시작부터 나사렛의 젊은 목수 예수가 환상과 환청, 악몽에 바들바들 떠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적 분열과 고통이 몽롱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종교계의 비판에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대거리했었다.
신부님들은 저에게 저주를 내리셨지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축복을 기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양심이 저만큼 깨끗하고, 또한 저만큼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수난, 영화의 수난
영화도 원작과 다를 바 없는 수난을 당했었다. 상영 금지 조처를 내린 국가가 그리스, 튀르키예,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필리핀, 싱가포르 등 7개국에 달했다. 주로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 나라들이다. 한국에서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88년 수입됐으나 여러 기독교 단체들(가톨릭에선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에 의해 거의 테러 수준의 핍박을 당했다가 1998년에야 심의가 풀려 2002년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란 제목으로 개봉됐었다. 영화사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14년 만에 ‘부활’한 셈이다.

영화는 원작의 내용과 주제를 그대로 따르되, 디테일에서 여러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게 예수(윌렘 대포)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등장하는 소녀다. 소녀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람의 삶을 다시 살게 되는데, 원작에서는 흑인 소년이 등장한다. <택시 드라이버>(1976)의 각본을 쓴 폴 슈레이더가 각색했는데, 가뜩이나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적 편견과 혐오를 저어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원작과 뉘앙스가 사뭇 달라진다. 흑인 소년이 등장할 때엔 ‘유혹자’로서의 악마 이미지, 이를테면 외견상, 그리고 선입견적으로 부가되는 이단과 이질의 성향이 강해지지만, 백인 소녀가 등장하면서 인간적인 유혹 혹은 성적인 금기를 넘어서는 함의가 더 분명해지기도 한다. 물론, 흑인 소년과 백인 소녀라는 설정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선입견에 기대어 해보는 말일뿐, 선입견 자체에 대한 옹호는 아니다. 원작의 영화적 변형에서 고려하게 될 법한 의도를 따져봤을 따름이다.
예수가 태어나 자라고 광야를 방황하고 열두제자를 이끌고 고행하는 내용은 익히 알려진 바에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매음굴에 들르고 환몽에 시달리는 등 허구로 가공된 예수의 행동이 신자들을 분노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에서 예수는 매우 불안정하고 때론 나약하고, 때론 괴팍한 성정의 인물로 묘사된다. 윌렘 대포가 가지고 있는 배우로서의 독특한 특징을 예수의 탈을 씌워 제대로 표현했다 여겨진다. 문제(?)는 그러한 예수가 피투성이 상태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서 불거진다.
유혹당하는 예수, 그리고 평범한 삶

소녀의 유혹은 이렇다.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다. 하느님은 이미 그동안 당신이 행해온 것들로 만족하고 계시니, 이제 인간으로서 행복해지길 바라신다." 유혹에 이끌린 예수는 나무와 새들이 풍성하게 어울려 노는 신비한 세계, 이전에 살았던 돌 투성이 광야와는 완전 딴판인 세상으로 나아간다. 전혀 다른 생기와 따뜻한 햇볕이 넘치는 세상. 거의 초현실에 가까운 풍광이 예수를 사로잡는다. 그곳에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바바라 허쉬)와 재회한다. 둘은 결혼한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행복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마리아가 아이를 갖자 야훼가 마리아를 데려간다. 아내를 빼앗긴 예수는 분노한다. 그러자 다시 소녀의 유혹. 새로운 여자를 만나라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두 명의 아내를 맞아들인 예수는 아이들을 낳고 수십 년을 더 살게 된다.
성경을 바탕으로 재구성되는 이러한 허구는 예수라는 존재가 피와 살을 가진, 그렇기에 인간적 욕망과 고뇌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이자, 그러한 인간적 속성에 승복하여 신의 훈령을 배반하는 운명에 사로잡힌 자라는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상상 가능한 삶의 양태이고, 예수가 정말 신의 아들이라면 불경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그런 예수를 미화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면모를 비난하거나 왜곡하지도 않는다. 원작에서건 영화에서건 예수가 정말 사람이었으면 이랬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가정에서 출발해 이전엔 잘 따져볼 수 없었던 신의 실체에 대해 새로운 질문과 해석을 던질 뿐이다.
‘다른 존재’는 늘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예수도 마리아도 당대엔 뭇사람들에게 돌 맞는 존재들이었다. 로마인들의 핍박과 비난은 로마인 고유의 율법과 그로 인한 편견에 의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와 시선은 당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관습, 법률 체계 등의 일면을 반영할 뿐이다. 그런 한정적인 잣대 아래서 누구를 죄인으로 만들고, 다른 누구를 성자로 추켜세우는 건 그 어떤 절대성도 지니지 못한다. 예수는 당대에 채찍질과 십자가를 감수해야 하는 죄인이자, ‘다른 존재’였다. ‘다른 존재’가 죄인 취급받는 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흔하다. 그런 존재에 대해 ‘다르게’ 판단하고 바라보는 것 역시 누군가에겐 필연적인 책무일 수 있다. 돌 맞을 때 맞더라도 생각하는 바, 상상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개진하여 실천하는 것. 그런 이들에게 돌은 때로 스티로폼보다 가볍고 연약한 물질이 되기도 한다.
예수는 인류의 가장 큰 알레고리로 여태 작용해 왔다. 정말 실존했던 인물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알지만, 모든 역사적 인물이 그렇듯 절대적인 숭앙이나 절대적인 비판도 공히 사실과 적확할 수는 없는 법이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는 것도 인간의 유구한 속성이다. 때문에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어야 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마주하게 될 때 인간은 고뇌하거나 사악해지거나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균열 자체가 신이 만들어낸 인간의 기본 구조이다. 그 모든 굴레와 모순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신의 진짜 얼굴을 알현하게 된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유혹당하는 존재다

그런 차원에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진지하게 자신의 본능과 도덕, 신성과 사욕 등과 사투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에게 던져지는 가장 기본적인 유혹을 다룬 영화라 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더욱 그럴지 모른다. 내가 아닌 자, 나와 다른 자, 그러면서 똑같은 사람 앞에서 정말 당신 자신으로 그 사람을 껴안을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신은 항상 당신 편일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은 결국 당신의 어떤 모습을 벌하거나 끌어안을 것이다. 상충이고 모순인가. 그래, 이 자체가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부여받은 무시 못 할 ‘유혹’이라 여기자. 선택은 물론,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