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배상>:
빌리 와일더가 연출한 1944년작, <이중배상>은 1940년대 초반부터 50년대 중반까지 성행했던 누아르 장르의 대표작이다. 프랑스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명명된 이 “어둡고, 에로틱하며 몽환적인 영화들”은 주로 사설탐정이나 갱스터가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영화화하거나, 이 장르에 특화한 작가들–레이먼드 챈들러, 대시 해밋 등–을 직접 각본에 참여시키는 특징이 있었다. <이중배상> 역시 하드보일드 소설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제임스 M. 케인의 단편을 바탕으로 레이먼드 챈들러가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는 보험회사 직원인 월터 네프(프레드 맥머레이)의 사후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그는 고객, ‘디트리히슨’의 자동차 보험을 갱신하러 그의 집을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디트리히슨의 매력적인 아내 필리스(바바라 스탠윅)를 만나게 된다.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월터는 남편의 보험금을 위해 그를 살해할 음모를 품고 있는 그녀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다. 일반적인 자동차 사고가 아니라 기차 사고일 경우에는 보험금이 두 배로 지급된다는 걸 알고 있는 월터는 디트리히슨이 기차로 여행을 떠나는 날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몇 차례 위기 끝에 이들은 결국 계획에 성공하고 보험회사는 사건 조사에 나선다. 조사가 계속되고 월터의 상관이 이들의 음모를 알게 되면서 월터는 궁지에 몰린다. 그 와중에 그는 디트리히슨의 딸로부터 필리스의 과거 행적과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필리스에게 배신당한 걸 깨달은 월터는 그녀를 찾아가 결국 죽이고 만다. 회사로 돌아온 월터는 상관에게 사건의 전말을 고하는 녹음을 하며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케인의 1927년 단편을 영화화 한 <이중배상>은 케인과 각본에 참여했던 레이먼드 챈들러를 일약 스타로 등극하게 했다. 백만 달러가 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전국 각지에서 5백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그들의 소설 판권을 확보하는 데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점점 더 많은 ‘어두운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아르는 장르적 관습이 명백하다. (남자) 주인공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누아르 영화는 일반적으로 ‘팜므 파탈’에 의해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파멸하거나 배후에 있는 악의 세력을 밝혀내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이중배상>은 이러한 누아르 관습을 공식화한 초기 작품들 중 하나다. 대부분의 누아르 영화가 그러하듯, 영화는 당시 사회, 윤리적 기준에서 이슈가 될 만한 설정을 다수 포함한다. 예를 들어 제도권 밖의 성 재현, 계획된 살인 등 당시 브린 오피스(Joseph Breen이 지휘하던 할리우드의 자진 검열 부서. 등급제로 전환되는 1968년까지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제작 코드’를 준수해 영화를 제작해야 했다)가 주시하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관객을 포함한 산업 관계자들과 평론가들, 그리고 특히 영화감독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작품을 본 후 감독, 빌리 와일더에게 이런 문구가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중배상> 이후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는 두 개가 될 것이다. 그것은 ‘빌리’와 ‘와일더’다.(Since Double Indemnity, the two most important words in motion pictures are 'Billy' and 'Wilder').”

그 해 열렸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중배상>은 최우수 작품상과 각본상을 포함,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수상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이에 빌리 와일더는 크게 실망했다고 하나, <이중배상>의 호평은 시간이 갈수록 배가 되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50여 년이 흐른 1998년, 로저 이버트는 그가 꼽은 “역대 최고의 영화들”(Great Films)에 <이중배상>을 언급하며 “영화 속에서 맥머레이와 스탠윅이 보여준 연기는 심리적인 깊이를 넘어서는 퍼포먼스이며 애드워드 하퍼의 고독한 세팅을 연상하게 하는 촬영은 누아르 장르의 정전이다”라고 극찬했다. 과연 <이중배상>은 누아르의 대표작을 넘어 범작에서 ‘고전’(classic)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명작이다.
<긴 이별> (로버트 알트만, 1973):
<긴 이별>은 앞서 언급한 <이중배상>을 각색한 장본인이자 탐정 소설의 제왕, 레이먼드 챈들러의 ‘명탐정 필립 말로우 시리즈’ 중 한 편을 영화화한 것이다. <블랙 달리아>, <안녕, 내 사랑>, <명탐정 필립>(원제는 <빅 슬립>) 등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의 대다수가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이 작품만은 원작이 나온 지 거의 20년이 지나 만들어졌다.

〈긴 이별〉은 원작과는 많은 지점이 다르다. 영화의 배경은 소설의 1950년대가 아닌 1970년대의 LA로 바뀌었고, 필립 말로우도 기존의 염세적이고 우울한 캐릭터에서 까칠하지만 유머러스한 캐릭터로 변모한다. 영화는 도입부부터 여러 가지 사건들이 휘몰아치듯 등장한다. 이야기는 말로우(엘리어트 굴드)의 오랜 친구, 레녹스(짐 부톤)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머지않아 말로우는 레녹스의 아내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용의자였던 레녹스는 자살한다. 사건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한 모금씩 맥주를 넘기고 있노라면 어느새 필립 말로우의 눈앞에는 또 다른 의문의 고객, 아일린 웨이드(니나 반 팰랜트)가 나타난다. 아일린은 실종된 남편을 찾아 달라는 별개의 의뢰를 들고 왔지만 그녀의 사건은 레녹스 부부와 왠지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말로의 원초적 수사능력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엄청나게 복잡한 인물관계를 몇 차례의 반전에 걸쳐 밝혀낸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을 연출한 로버트 알트만과 비슷한 경향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알트만은 다수의 캐릭터를 활용하는 '앙상블 영화' 장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이별〉을 포함한 챈들러 원작 영화들이 뛰어난 누아르 영화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바로 인물 서술이다. 챈들러는 인물을 서술할 때 몇 페이지를 할애해 디테일을 강조하는데, 때로는 말로우가 담배를 피는 한 동작을 두 페이지에 걸쳐 서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디테일한 서술은 인물의 소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행동 동기나 사건의 실마리로 연결된다. 영화적 맥락에서는 클로즈업이나 롱테이크, 혹은 프레이밍 등을 통해 인물과 그의 액션에 의미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알트만 버전의 〈긴 이별〉은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레이먼드 챈들러의 각색이 아닐까 싶다. 챈들러의 말로우가 늘 혼자이거나 외톨이였다면, 영화 속 말로우는 사교적이다. 책 속 말로우가 쓸쓸한 정물화처럼 서술되었다면, 영화에서는 70년대 히피들이 점령한 LA의 에너지를 머금고, 늘 무리 속에 있는 발랄한 말로우로 재탄생한다.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말로우는 지독한 골초지만 영화 속 말로우의 담배는 원작에서처럼 사색의 수단이라기보다 과시와 유희의 수단이다.
2부에서 계속.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