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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씨네플레이

감독 겸 배우 하명중 1986년 연출작, <태>가 지난 12월 11일 4K로 복원된 버전으로 공개되어 특별 상영회를 가졌다. 앞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37년 만에 재상영 된 바 있다. 첫 상영에는 박찬욱 감독이 참여했고 이번 상영에서는 영화에 참여했던 하명중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김영동 음악감독 그리고 주연을 맡았던 마흥식 배우가 참여했다.

 

 

영화는 외부와 교류가 단절된 전라도의 한 외딴섬, ‘낙월도’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낙월도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최부자를 포함한 몇몇 지주는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빼돌리고 명바위 수신 때문에 흉어가 들기 시작했다고 소문을 낸다. 그리고는 섬주민에게 이자돈을 꿔주면서 이를 미끼로 섬 생활을 장악하자 종천(마흥식)과 귀덕(이혜숙)은 섬을 되살리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전 주민들은 최부자들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난다. 분노가 폭발한 종천은 최부자 일당을 처치하는 데 성공하지만 궁극적으로 무당 청백이의 손에 죽게 된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섬의 자유를 지킬 것을 부르짖고 이에 청백이는 깨달음을 얻어 무아지경에서 춤을 추다 벼랑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마침내 귀덕은 종천과의 사이에서 생긴 사내아이를 낳게 되고 이로써 낙월도에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온다.

비교적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듯하지만 실상 <태>는 매우 복잡한 전개(아울러 시대에 비해 매우 빠른 커트와 페이스)와 인물구조를 보인다. 엄청난 집중력을 가지고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지 않으면 중간 시퀀스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섬의 생리를 규정하는 몇몇 인물을 학습하고 나면 영화는 오롯이 관객의 ‘판’이 된다. 작은 섬과 그 땅을 채우고 있는 미물들의 전투를 핸드 헬드로, 롱테이크로, 공격적인 줌으로 담아내는 정일성 감독의 촬영은 특히나 이 엄청난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 ‘태’에 대해서 하명중 감독은 "이어지는 생명이 아닌, 어떻게든 끊어내야 하는 생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과연 영화는 낙월도에 뿌리를 내리고, 배회하는 인간들을 통해서 생명과 죽음, 영속과 소멸의 당위를 끊임없이 역설한다. 이 위태롭고, 위대한 영화 <태>를 읽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무한하겠지만, 본 글에서는 세 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재발견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1. 하명중
 

 

하명중은 잘 알려진 바대로 감독 하길종의 동생이다. 그는 1966년 <한 많은 대동강>으로 형보다 먼저 영화계에 배우로 입문했다. 하길종이 첫 장편영화인 <화분>으로 데뷔한 이래로 그의 대부분의 작품의 주연을 도맡아 출연했다. 하길종 감독의 청춘 영화들, <바보들의 행진>, <병태와 영자> 등을 제외한 <화분>, <수절>, <한네의 승천> 등의 작품에서 하명중은 권력에 맞서거나(<수절>) 힘없이 무너지는(<화분>) 캐릭터를 연기했으며 이러한 인물들은 분명 (하길종 감독에 의해 의도된) 유신 시대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존재들이었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영화를 군림하던 배우였지만 그는 1983년 그의 첫 연출작, <엑스>로 감독 데뷔하게 된다. 조해일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으로 그는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어 그는 <땡볕> (1984)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을 받았다. 일본의 작가주의 영화들과 중국의 5세대 감독 영화들이 세계의 평단을 주목을 받는 가운데에 한국 작품으로서 베를린에 입성한, 참으로 드문 성취 중 하나였다. 그의 세 번째 연출작인 <태>는 전작 <땡볕>에 이어 일제 강점기의 한국을 그리는 작품이다. 작은 섬을 배경으로 권력의 부패를 비판하는 이 영화는 군사정권하의 영화 검열과 정면으로 부딪혔고, 개봉 1주일 만에 상영이 종영되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연출자로서 하명중의 (길지 않은) 필모그래피에서 <태>는 가장 실험적이고 출중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감독, 하명중은 어쩌면 배우로서의 긴 커리어보다 더 놀라운 재능과 천재성을 증명해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정일성 촬영감독이 담아낸 섬의 풍광과 김영동 음악감독의 구슬프고도 기괴한 사운드는 이 작품을 영화 이상의 예술 매체로 정의할 수 있게 하는 중추적 요소들이다.

 

2. 이혜숙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참극을 그대로 얼굴로 머금는 배우, 이혜숙은 촬영 당시 불과 20대 초반의 배우였다. <땡볕>의 조용원이 그랬듯, <태> 역시 비교적 신인이었던 이혜숙의 놀라운 재능과 역량을 드러냈다. 이후 이혜숙은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서 양공주로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강인한 엄마 역할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태>의 ‘귀덕’도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언례’도 이혜숙의 캐릭터는 모두 한국사의 그늘 밑을 채우고 있는 존재다. 동시에, 마치 <태>의 오프닝을 뒤덮고 있는 붉은 야생꽃처럼, 이 여성들은 혼란과 불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공간에서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종족을 이어가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세상과 땅을 잇는 미디엄으로서 이 여성들은 비극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희망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배우 이혜숙은 그런 모순과 역설의 표정을 가졌다.

 

3. 검열 
 

 

<태>는 천승세의 중편소설, 「낙월도」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의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그리고 한국영화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헤어 누드)와 개봉 연도 1986년을 고려하건대, 영화는 분명 검열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영화는 정부에 의해 ‘반정부 영화’로 지목되었고, 어렵게 개봉을 했지만 경찰들이 매표소에서 표를 사는 대학생들의 신분증을 검사하고, 정보부 요원들이 하명중 감독의 뒤를 쫓는 등 갖가지 탄압을 감내해야 했다. 따라서 <태>의 이번 상영은 한 예술가의 용기 있고 필연적인 성취를 기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군사정권기에 배태된 역사의 산물을 목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1986년은 의미 있는 작품들이 두각을 드러냈던, 한국영화사의 터닝포인트이기도 하다. 같은 해에 김수용 감독의 <허튼소리>가 공개되었다. <허튼소리> 같은 경우, 검열기관에 의해 10여 군데 이상 삭제 명령을 받고 감독은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겠다는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후에 등장하는 ‘코리아 뉴웨이브’ 영화들 만큼의 급진성을 보여주진 못했어도, 분명 86년은 검열로 질식해 가던 한국영화의 어두운 한계를, 동시에 전복의 가능성을 점치게 한 결정적인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