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에서 이어집니다
<마누라 죽이기> 역시 앞선 <결혼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주된 에피소드는 직장, 즉 영화사 내에서의 소소한 사건들과 소영의 집에서의 상황극으로 구성된다. 소영(최진실)의 권력은 회사에서 봉수(박중훈)보다 우위에 있지만 집에서의 성적인 권력은 더더욱 강조되어 드러난다. 예컨대 이들의 ‘D-Day, 디 데이’는 전적으로 소영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봉수는 디 데이 이벤트(?)를 어떡해서든 피한다는 것이 집 에피소드들의 주된 코믹 설정이다. <결혼 이야기>의 지혜와 <마누라 죽이기>의 소영은 공통적으로 사회적 지위, 혹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며, 여성의 권력은 강한 섹슈얼리티로 대표되거나 상징된다.
비슷한 경향은 앞선 시대에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선행된 바 있다. 1987년에 개봉한 영화,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 애드리안 라인)에서 메인 캐릭터, ‘댄’(마이클 더클라스)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여성, ‘알렉스’(글렌 클로즈)는 출판사의 대표로서 커리어 우먼의 전형이다. 유부남인 댄은 그녀의 당찬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결정적으로는 그녀의 강렬한 섹스어필을 거절하지 못한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알렉스가 댄을 스토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스릴러 장르로 둔갑하는데, 결국 댄을 갖지 못할 바에야 살인까지 고사하겠다는 알렉스를 댄과 그의 부인이 함께 처단하며 결말을 맞는다. 일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또 다른 작품, 배리 레빈슨의 <폭로>(1995)에서는 유능한 여성 상관이 남자 부하직원을 강간하는 사건으로 ‘커리어 우먼’의 성적 욕망을 더욱더 극단화되어 재현된다. 커리어 우먼이 보유한 강한 섹슈얼리티, 혹은 강한 섹슈얼리티로 귀결되는 커리어 우먼은 이 영화들에서 처단되거나(<위험한 정사>), 사회적 규율로 거세된다(<폭로>). 수잔 브로믈리(Susan Bromley)와 파멜라 휴잇(Pamela Hewitt)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커리어 우먼 장르’의 영화들이 “직업을 선택한 여성들은 여성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파괴적이며 그 자체로 파괴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브로믈리와 휴잇의 주장은 <결혼 이야기>와 <마누라 죽이기>의 여성 캐릭터 설정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전자의 지혜는 죽거나 처벌받지 않지만 영화적인 재현에 있어서 직업 전선에서는 철저히 배제된 인물이다. 후자의 소영은 남편에 의해 청부살인 대상이 됨으로써 앞의 할리우드 영화들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기획영화가 배태한 ‘커리어 우먼’의 성적 신화는 더욱 진화하여 다양한 형태의 섹스 드라마들로 탄생했다. 예를 들어, 기획영화의 대두 몇 년 이후에 제작된 임상수 연출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는 세 커리어 우먼의 성생활과 그들의 대담을 중추로 하는 영화다. 메인 캐릭터, ‘호정’(강수연)은 성공한 사업체를 가진 능력 있는 여성이며, “정기적으로 일하고 틈틈이 섹스하고 결혼은 그다음”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여성, ‘연이’(진희경)는 호텔에서 일하며 때때로 성적인 일탈을 꿈꾸는 여성, 마지막으로 ‘순이’(김여진)는 대학원생으로 섹스에 대한 욕망은 많지만 주로 자위행위로 해결하는 소극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전면에 내세운 광고 카피, “처녀들이 요리하는 섹스”가 보여주듯 영화는 세 여성 캐릭터를 통해 현대 여성, 즉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당당한 여성의 성 담론을 탐구한다는 전제를 강조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세 여성의 직업과 사회적 중요성은 이들의 성생활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기능한다. 호텔리어인 연이가 호텔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을 상대로 일탈을 꿈꾸듯이 말이다. 주진숙 평론가의 분석에서도 언급되듯이, 이들을 보여주는 ‘시선의 주체’는 남성이며 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다리 율동’ 씬-포스터로도 사용된, 세 여성이 누워서 벗은 다리로 율동을 하는 장면은 “카메라의 관음주의가 완전히 성취되는 지점”(주진숙)인 것이다.
기획영화는 분명 여성을 유의미한 노동자, 즉 사회적 구성원으로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난 한국영화들이 관습화했던 여성의 캐릭터화에 어느 정도 혁신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심영섭이 주장했듯 특히 이 영화들은 90년대의 화두, 특히 “남녀 역할에 따른 갈등과 여권신장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영화 속 여성들은 남성 지배 사회의 피해자나 종속적인 존재로서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적 자아를 회복해가는 모습”을 보여준 바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캐릭터들의 ‘일하는 여성,’ 혹은 ‘커리어 우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지극히 남성 시선에서 탄생된, 즉 호스티스, 여대생에 이은 성적 대상화 그룹의 또 다른 주체로 기능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결혼이야기>와 <마누라 죽이기>를 포함한 기획영화는 앞선 시대의 한국상업영화가 작은 부분이나마 여성노동을 재현하거나 규정하는 데 있어 드라마적인 요소로 흔히 동원했던, 관습적인 개념에서의 ‘여성성’과 연계되는 장치들을 부정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하는 홀어머니’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2000년대 이후 작품인 <사랑해, 말순씨>(박흥식, 2005)까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식을 위하여)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결정적 이유로 종종 사용되는 ‘모성’ 테마가 <결혼이야기>와 <마누라 죽이기>에서는 중점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탈 관습성은 그간 고착화되었던 여성 노동의 재현적 관습을 초월하거나 전복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점점 다양한 (영화적) 형태와 작법으로 그리고 장르로 여성의 노동과 여성 노동자가 그려지고 있다는 방증이며 분명 한국 영화의 여성재현사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주지해야 할 것은 90년대 한국영화를 지배했던 이 기획영화들이 여성 캐릭터의 (성적) 재현에 있어 보여준 작은 혁명이 현재까지 의미 있는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획영화의 일하는 여성들이 ‘커리어 우먼 = 밝히는 여자’라는 공식을 대변하며 또 다른 관습을 만들어 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0년대에 들어 한국영화의 제작편수 증가와 이른바 멀티플렉스 시대의 도래로 시작된 산업적인 황금기에서 주류 한국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점점 더 대상화되거나, 부차적 혹은 소품적 인물로 하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최근 제작되고 있는 한국영화를 볼 때, 심도 있게 논할 수 있을 만큼의 여성 (노동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의 편수는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다음 소희>(정주리, 2023)나 <정직한 후보> 시리즈(장유정) 여성 감독에 의한, 여성 이슈를 다루는 작품에서 여성의 직업 혹은 노동은 단순히 내러티브를 위한 선택을 넘어 사회적으로 여성을 위치시키고 여성의 노동을 재정의하거나 노동 현장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유의미하게 선택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영화들이 대부분 독립영화이거나 상업영화 안에서도 중저예산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아쉽지만 이는 인지되고 응원해야 할 한국영화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