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키스탄 영화가 마땅히 누렸어야 할 관심과 상찬의 말들.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이제라도 듣게 돼 다행이다. 칸에 상영된 최초의 파키스탄 영화이자, 제75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을 받은 영화 <조이랜드> 이야기다. 가부장제에 희생된 모든 여성, 남성, 트랜스젠더에 대한 오마주를 담은 영화는 역시나 고국 파키스탄에서는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조국에 보내는 가슴 아픈 러브레터를 기꺼이 쓰기로 뭉친 이들이 있었기에 영화는 전 세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2014년 17세로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제작사를 운영하는 파키스탄 출신의 '말라라 유사프자이'가 제작에 참여했다. 자기 성찰이 담긴 자전적 이야기에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서정적 구상화의 천재’로 칭송받는 화가 '살만 투르'는 포스터를 헌정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의 보수적인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습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는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 감독 '사임 사디크'의 연출이 점정을 찍었다. 진보적이고 도발적인 물결이 넘실대는 이 영화가 그의 첫 장편이라는 것이 놀랍다.

영화는 파키스탄의 대도시 라호르에 사는 한 대가족을 담는다. 라나 아마눌라, 혹은 '아바'(살만 피르자다)는 조이랜드라고 불리는 놀이공원 근처의 비좁은 집에서 휠체어에 의탁해 대가족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은 나이 든 홀아비다. 첫째 아들 살렘(소하일 사미르)은 누치(사르와트 길라니)와의 사이에서 이미 네 딸을 뒀지만, 아바에게 손자를 안겨주는 날만을 열망하고 있다. 둘째 아들 하이더르(알리 준조)는 재능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아내 뭄타즈(라스티 파루크)가 돈을 벌어오는 동안 집안일을 돌본 게 벌써 몇 년이다. 대를 잇지 못하는 첫째 아들과 아내에 기생해 살아가는 유약한 둘째 아들까지. 가부장제의 렌즈를 통하자, 가족 구성원의 삶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아바'의 시각일 뿐이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씻기고, 조카 넷을 살뜰히 챙기고, 솜씨 있게 요리를 내오며, 아내를 존중하는 하이더르와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일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는 뭄타즈는 가족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가능성이 재단된 파키스탄이라는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서로를 의지하고 행복한 날들과 그렇지 않은 날들을 그럭저럭 조율하며.

위기는 하이더르가 지역의 성인용 댄스 극장에 취직하면서 찾아온다. 아바에게는 극장 관리자로 취직했다고 속였지만, 사실 그는 트랜스젠더 스타 비바(알리나 칸)의 여섯 명의 백댄서 중 하나로 채용된 참이다. 하이더르는 카리스마 넘치는 비바에게 매혹적으로 이끌리고, 점차 춤에 몰두하면서 가족들은 묘한 기류에 휩싸인다. 속절없이 비바에 빠져드는 그의 감정은 자전거를 타고 거대한 비바의 등신대를 운반하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둘 역시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다. 연습실도 변변찮은 극장 환경, 라이벌 배우의 방해와 극장 사장의 무시를 극복하며 두 사람은 마침내 성공적인 데뷔를 한다. 언젠가 뭄바즈가 그랬듯이, 정전의 순간을 역이용해 휴대폰의 불빛을 조명 삼아 환상적인 무대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사회가 기대하는 남성상과 자기 내면의 삶, 자신에 대한 감각의 불일치는 하이더르에게 혼란을 증폭시킨다. 그는 자꾸만 불거지는 '그릇된' 감정을, 밝힐 수 없는 비밀을 꽁꽁 끌어안고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일견 당당해 보이는 비바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극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하고, 돈에 대해 전전긍긍해야 하며, 하이더르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자꾸 되묻고 의심한다.

뭄타즈 또한 원치 않는 임신으로 답답함을 느낀다. 남편의 취업으로 직장에 나갈 명분이 없어진 뭄타즈는 그가 하던 집안일을 강제로 떠맡고 출산을 준비한다. 재생산의 기능으로만 쪼그라든 존재 앞에서 뭄타즈는 우울증과 공황 상태에 빠진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보이며 생기로 빛났던 뭄타즈는 어느새 붉은 립스틱을 덧바르고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기차역의 전광판은 셀 수 없이 많은 목적지로 연신 반짝이지만, 뭄타즈는 그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불행하다면, 가부장제의 쓸모란 무엇이며, 그 끝에 쟁취하는 승리는 누구의 것인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저 일 센티의 문턱도 넘지 못하는 휠체어에 올라탄 나이 든 홀아비 '아바'의 것일까. 몸이 아픈 자신을 대가 없이 돌봐주는 이웃의 노인 여성 파이야즈(사니아 사이드)가 정서적으로 방치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심 어린 말조차 전할 수 없는 가부장제의 명예라는 것은 그저 씁쓸하고, 쓸쓸할 뿐, 승리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고정적인 성 역할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에 바쳐지는 제물은 비단 젊은이들 뿐만은 아니다. 자아가 확고한 뭄타즈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비바뿐 아니라 흔들리는 성적 정체성을 가진 하이더르와 시아버지 아바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엄숙하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억압되고 착취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그린다.

<조이랜드>는 하이더르의 댄서로의 이중생활과 그의 성적 취향을 모욕적으로 폭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한 채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초점은 하이더르에서 뭄타즈로 서서히 이동해 예상치 못한 결말을 보여준다. 남성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여성의 슬픔과 기쁨을 동서지간인 누치와 뭄타즈는 조용히 나눈다. 옥상에서의 짧은 대화, 한 가치의 담배, 그리고 '조이랜드'로의 일탈에서 그들은 잠깐 웃는다. 꿋꿋한 여성 간 연대는 결말과 공명하지 못해 그 비극성은 극대화된다.
<조이랜드>의 첫 화면에 잡힌 '유령'은 비단 파키스탄에만 떠도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제 하에서 거세된 욕망, 제한된 자유, 자기혐오와 파괴의 유령은 계급, 인종, 성별로 차별받는 자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이민자들, 억압받는 유색인들 사이로 유영하고 있다. <조이랜드> 포스터를 그린 파키스탄 화가 살만 투르는 그림을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나 유색인에 대한 차별 없는 세상을 창조하고자 했다. 사임 사디크 감독은 <조이랜드>로 가부장제의 인적 희생을 치른 모든 이들을 위로한다. 파키스탄 예술가들이 자신과 사회에 맞서 제기한 종교, 성, 계급에 대한 전복적 질문은 여기,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